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71화 (71/239)

#71. 예상 밖의 반응

―가사 어때? 나는 무척 마음에 들던데.

“네, 저도 좋았어요.”

제시가 보내온 가사는 수철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예상했던 거보다 훨씬 좋았다.

3곡의 가사는 모두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Two People In London’은 런던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두 사내의 얘기를 담았다.

런던으로 출장 간 두 사내. 둘은 우중충한 런던 날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다리 위를 뛰어가던 두 사내. 서로 부딪쳤다. 미끄러져 넘어지고, 다쳤다. 그리고 같은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됐다. 그 인연으로 둘은 병원에 누워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간다는 이야기다.

둘은 어느새 절친이 되고,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내리는 비를 보며 손자에게 런던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들려주며 엔딩을 지었다. 지극히 서양적인 가사였다.

‘Sleepless In Island’는 장르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독특했다. 스릴러 같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메시지도 담고 있었다.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섬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두 남녀. 지도를 펼쳐놓고 휴가를 계획했다. 그리고 도착한 섬. 섬은 소문대로 정말 아름다웠다.

섬엔 사람도 없고 둘뿐이었다. 둘은 마치 원시인이라도 된 듯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자연을 만끽했다. 그런데 그날 밤, 이상한 느낌에 깨어 보니 몸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섬도 물에 잠겨 사라지고 있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렵게 빠져나온 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그들의 눈에 들어온 지도. 거기엔 자신들이 머물렀던 섬이 없었다. 처음부터 환상의 섬이라는 건 없었다. 그 섬은 존재하지 않았다.

‘Film music without film’은 제시가 가장 좋아했던 만큼 가사에도 입체감이 도드라졌다. 수철은 가사가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나 읽으면서 음미했다.

[귀가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우린 들으려 애쓸 필요가 없겠지요. 눈이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우린 보지 않아도 돼요. 자. 이제 상상해 보세요.]

이렇게 시작한 가사는 앞을 못 보는 소년이 사람들의 도움으로 산속으로 트래킹(Tracking)을 떠나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산속에서 처음 마주하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소년은 자신이 상상하는 모습을 눈앞에 그린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동물 울음소리. 소년의 닫힌 눈꺼풀이 암막 커튼이 되고, 거기에 소리를 그림으로 바꾸는 영사기가 영상을 비춘다. 소리를 통해 소년만의 상상이 그려진다.

소년이 그리는 자연의 모습은, 눈 뜬 우리가 보는 자연보다 더 아름답다.

―가사 읽고, 혼자서 기립 박수를 쳤다니까?

영준이 형은 가사를 읽고 기립 박수를 칠 정도로 감동받았다고 했다. 그건 수철도 마찬가지였다.

제시의 가사는 보이스만큼이나 훌륭했다. 작사가로 데뷔해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Film music without film’뿐만이 아니라, 모든 가사에는 제시의 색채가 듬뿍 묻어 있었다. 제시만의 독특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세상을 보는 그녀만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난 정말 놀랐어, 제시가 그렇게 가사를 잘 쓸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

“저도 감탄했어요. 음반이 나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기대돼요.”―대박 조짐이 보여, 가사도 그렇고 곡도 그렇고.

“그러면 좋죠. 저도 그러길 바라요.”―한번 기대해 봐.

“네.”

수철은 영준이 형의 칭찬이 듣기 좋았다. 그만큼 제시를 보는 수철의 눈이 정확했다는 얘기가 된다.

가사 이야기는 이쯤하고, 수철은 멤버들의 이야기로 대화를 돌렸다.

“그런데 형이 아주 바쁘시겠어요. 공연 스케줄 잡으려면 말이에요.”―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계속 스케줄 조정 중이야. 공연을 잡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공연 요청이 너무 쏟아져서 정신이 없어. 어쩌면 멤버들이 며칠 더 머물러야 할 수도 있어.

“말만 들어도 바쁜 게 확 느껴지네요.”―즐거운 비명 같은 거지. 어쨌든 녹음 스케줄은 네가 다 진행할 거지?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어?

“네,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녹음실도 이미 다 예약해 놨어요.”―시간은 얼마나 잡았어?

“넉넉하게 이틀 잡았어요. 악기 녹음 하루, 보컬 녹음 하루. 이렇게요.”―잘했네. 프로듀싱은 네가 다 할거지?

“네.”

―그러면 믹싱은 언제 끝낼 거야?

“다음 날 바로 마칠 생각이에요.”―하루면 부족하지 않겠어? 외국으로 내보내는 첫 앨범인데.

“신중하게 해도 하루면 충분할 거 같아요.”―그래,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영준이 형은 녹음 관련해서는 수철에게 맡겨 놓고 있었다. 수철의 곡이라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같이 녹음해 본 경험이 있어서 수철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 이번엔 수철이 물었다.

“녹음 일정이랑 금액 정리해서 음반사로 보내야 하는 건가요?”―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거기서도 이번에 한 명 들어올 건가 봐.

“녹음 구경하러요?”

―그건 아니겠지. 한국에서도 유통할 계획이니까 겸사겸사 비즈니스로 오는 거겠지. 한국으로 바로 오는 게 아니라 일본을 들렀다 오는 거로 봐서는 거기서도 유통을 할 생각인가 봐.

“아, 그렇군요.”

―얼핏 듣기로는 아시아 지역에도 꽤 많은 홍보를 할 생각인가 봐. 우리가 계속 활동해서 인지도가 올라가면 음반 매출도 상승할 거로 기대하는 거 같아.

“그럴 수 있겠네요.”―그래, 그렇게만 되면 서로 좋은 거지.

말만 들어도 모두에게 기분 좋은 이야기다.

“형.”

―응?

“제가 공연도 빠지는데 도울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너도 나만큼 바쁘다고 들었는데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일이 많아지긴 했지만 시간은 만들 수 있어요.”―부럽다. 넌 그럴 능력이 되니까 시간 조절도 하는데, 난 매일 쫓기고 있어. 괜히 특강을 맡아서 이게 뭔 고생이람?

“하하, 힘내세요.”

―힘내야지. 이제 한 주만 더 돌아다니면 끝나. 휴, 그래도 끝이 보여서 다행이야.

“그래도 멤버들이 오는 시간이랑 잘 맞아떨어져서 다행이네요.”―그래, 일부러 내가 그렇게 조절을 했지. 어쨌든 네가 특별히 도와줄 건 없는데, 시간이 된다면 멤버들 서울 구경시켜 줄 때 너도 같이 다녔으면 좋겠어. 내가 미리 말을 해 놓긴 했는데, 녀석들이 섭섭해하더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실망이래, 크크.

“아, 그렇다면 꼭 참석해야겠네요. 안 그래도 하루 이틀은 같이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그래, 우리가 받은 대접이 있는데 갚은 건 갚아야지. 아무리 음악 하는 친구라고 해도 말이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영국과 호주에서는 계속 붙어 다니며 공연을 같이했는데, 정작 한국에 초대해 놓고, 코빼기도 안 보일 수는 없다. 받은 만큼 갚겠다는 이유보다, 인연이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래서 수철도 한 번쯤은 같이 여행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울 관광뿐만이 아니라, 경주 여행도 참석할 생각이에요. 추억을 만들어야죠.”―진짜?

“네.”

―좋은 결정이야! 멤버들이 좋아하겠어. 내가 다 고맙네, 아주 굿 뉴스야!

수철의 말에 영준이 형은 기뻐했다. 중간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고생을 좀 한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 주 네 작업실에서 봐.

“네, 그때 봬요.”

―아 참! 작업실에 뭐 필요한 거 없어?”“네, 없어요. 그냥 오세요.”―그래도 말해 봐, 네 작업실에 처음 가는데 나도 뭐 하나 사 가야지.

“그냥 오셔도 돼요. 자꾸 뭘 받으니까 부담돼요. 이미 많이 받기도 했고요.”―그래도 필요한 거 한 가지만 말해 봐. 그냥 가면 손이 심심해서 말이야.

“정 그러시면 화분만 빼고 아무거나 하나 사 주세요. 작은 거로요. 화분이 너무 많아서 물 주기 바빠요.”―하하! 그래, 알았어. 내가 적당한 거로 하나 사 갈게.”

* * *

박 대표가 소파에 드러누워서 햇볕을 쐬고 있다. 마치 일광욕을 하는 모습이다.

수철이 작업하다 말고 돌아봤다.

“쌤, 작업 안 하세요?”“아, 여기 너무 좋아. 햇볕도 잘 들고, 공기도 신선해. 나도 3층으로 옮길까 봐.”“그럼 작업실 바꿀까요?”“그건 아니야, 풍수지리적으로 내 작업실에서 대박 날 확률이 더 높아.”“헐, 그런데 왜 매일 여기 와 계세요? 쌤도 작업이 밀렸다면서요?”“야! 너 치사하게 왜 자꾸 내쫓으려고 그래? 너도 내 작업실에서 맨날 죽 때렸잖아.”

“죽을 때려요?”

“암튼! 내 작업실에 매일 왔었잖아, 이제 네 작업실 생겼다고 날 쫓아내면 이건 배신이지!”“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작업이 밀려서 그렇죠.”“나 신경 쓰지 말고 작업해, 그리고 그렇게 대꾸할 시간 있으면 달달한 커피나 한 잔 타 줘. 아이구, 좋다.”

수철이 뭐라 해도 박 대표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철이 커피를 타러 일어나자 얄밉게 한마디 덧붙였다.

“아이스로 부탁해!”

“쩝, 알았어요.”

“얼음 듬뿍 넣고, 큰 잔에다 만들어 줘. 우유도 넣어서 카페라테로 플리스!”

주문 사항도 많다. 대놓고 수철의 작업을 방해할 모양이다.

박 대표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수철은 박 대표의 주문대로 큰 잔에 아이스 카페라테를 만들어 건넸다. 그리고 한 번 더 난감함을 어필했다.

“쌤이 뒤에 누워 있으니까 신경 쓰이잖아요.”

“아이구, 좋다.”

수철의 불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 대표는 소파로 파고들었다. 더 편안한 자세로 두 다리를 쭈욱 뻗었다. 수철을 약 올리려고 작정을 했다.

수철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작업해. 난 광합성 좀 할게. 아이구, 좋다. 역시 사람은 햇빛을 보고 살아야 해. 아이구, 좋아.”

사우나에서 낼 법한 소리를 내고 있다. 결국 수철은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요, 쌤은 여기서 광합성 많이 하고 계세요.”

컴퓨터를 끄고 주섬주섬 악보를 챙겼다.

박 대표가 한쪽 눈을 빼꼼히 뜨고 쳐다봤다.

“어디 가게?”

“쌤 작업실이요.”

“……내 작업실은 왜?”“거기서 작업하려고요.”

“그래, 알았어.”

“가실 거예요?”

“아니, 이따 만나서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쩝, 알았어요. 전화 주세요.”“그래, 작업 열심히 해. 청소도 해 주면 땡큐!”

무슨 일인지 박 대표가 생떼를 부리고 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작업실을 바꿔서 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박 대표의 작업실에서 혼자 작업하다 보니, 수철이 매일 와서 작업할 때 박 대표도 불편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 * *

“금별기획에서 너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뼈를 발라서 생선 살을 한 움큼 입에 집어넣던 박 대표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손을 내밀었다기보단 그런 제안을 하더라고요.”“그게 그거지. 영상사업단을 만들고 사람들을 끌어모은다고 하더니 너한테까지 손을 뻗었네.”

박 대표는 금별기획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수철이 최 팀장을 만난 얘기를 들려주자 박 대표의 표정이 우려스럽게 바뀌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 폭풍이 한번 몰아치겠어.”

“폭풍이요?”

“그래, 경쟁력 없는 회사는 한 방에 무너지거나 빨려 들어갈 거야. 힘없는 회사들이 살려면 그 길밖에 없지. 손 놓고 무너지느냐, 아니면 금별기획의 부속품이라도 돼서 살아남느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지.”

“아…….”

“경쟁력 있는 기획사도 하청 업체로 전락할 수 있어. 경쟁 상대가 안 되니까 말이야.”

“아…….”

“정부가 빨리 나서야 해. 기획사들이 무너지기 전에 발 빠르게 움직여서 독점을 막고, 관련 법도 만들고 말이야. 그런데 만만치는 않을 거야. 금별기획 뒤에는 엘진 그룹이 있거든.”

“…….”

수철이 대꾸 없이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박 대표가 뒤늦게 재미없어하는 수철의 표정을 눈치챘다.

“미안, 내가 너무 부정적인 얘기만 했지?”“아니에요, 이제 익숙해요.”

“하하, 녀석.”

박 대표는 멋쩍게 한번 웃고는 표정을 바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것저것 다 빼고 너만 보고 결정한다면, 난 찬성이야.”

“네?”

“영상사업단에 들어가는 거, 찬성이라고.”

박 대표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뜻밖의 반응에 수철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