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72화 (72/239)

#72. 더 나은 선택

“진심이세요?”

“그렇다니까.”

수철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박 대표가 이유를 설명했다.

“거기라면 너한테 날개를 달아 줄 수 있어.”

“날개요?”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을 빨리 갈 수 있게 도와줄 거야. 아무 걱정 없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줄 거란 말이야.”“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그래, 내가 지금까지 봐 온 그 회사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어. 기획사들이 할 수 없는 일을 거긴 할 수 있어. 오직 너한테만 초점을 맞춰서 너의 가치를 극대화시킬 거야.”

“아…….”

“이렇게 생각하면 돼. 거기서 못 하는 일은 아무도 못 하는 거야. 그러니까 검증도 빠르고 판단도 빨라. 그리고 그곳의 확장력은 상상을 초월해. 거기에 비하면 다른 기획사는 애들 장난 수준이지.”

엘진 그룹과 금별기획의 대단함은 김명석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철은 그 회사의 대단함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수철이 놀란 건 대기업에 냉소적이던 박 대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였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개인이 하는 것과 조직이 움직이는 건 차이가 커. 너한테는 널 도와줄 힘 있는 조력자가 필요해.”“쌤이 계시잖아요.”

“나는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야.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 그래.”

박 대표는 씁쓸한 미소로 수철을 바라봤다. 그러다 뭔가 작정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때가 되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할게.”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물까지 한잔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너 혼자 모든 일을 다 할 순 없어. 시간이 갈수록 널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질 거야. 계약도 해야 하고, 법률적인 자문도 필요하고, 재정 문제, 스케줄 관리 문제, 기획, 제안 등등. 할 일도 많고, 필요한 사람도 많아.”

수철은 박 대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언젠가는 자신을 도와줄 회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수철은 만약 그런 때가 오면 박 대표에게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이었다. 계약 문제도 자금 관리 문제도 모두 박 대표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지금은 나 홀로 사장이지만 박 대표도 기획사 대표다. 일의 경험도 많고 박식하다. 수철은 박 대표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박 대표의 회사에 수익이 많이 나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것이 박 대표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 대표는 그런 수철의 생각을 모르고, 더 크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박 대표가 노파심에 물었다.

“설마, 네가 회사를 만들어서 그 일을 다 할 생각은 아니지?”“네, 그건 제가 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회사를 만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건 수철에게 너무 먼 얘기다. 사람들과 부딪치고, 섞여서 같이 일하는 것은 수철에겐 어려운 일이다. 수철에겐 그런 DNA가 없다.

“그래, 네가 회사까지 만들고 그 일을 하기는 무리야. 못 한다는 게 아니라, 그 일까지 하면서 창작을 하기는 어려워. 집중력도 떨어지고 스트레스만 받을 거야. 그건 내가 겪어 봐서 잘 알아.”“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수철은 고개를 끄덕여 공감했다. 수철이 박 대표를 통해 많이 본 모습이다.

“사실, 난 그 일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언젠가 때가 오면 말이야.”

수철의 눈이 반짝였다. 박 대표도 수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진 그룹이 손을 내밀었다면 난 기분 좋게 물러날 수 있어. 그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선택이기 때문이야.”

박 대표는 수철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생각을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수철은 반발했다.

“그런 일은 쌤이 원래 하시는 일이잖아요. 대기업이 더 잘할 수 있다고 해도, 전 쌤이 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그래, 네 말대로 그런 건 내가 할 수 있지. 그런데 난 너의 작품을 세상에 알릴 힘이 없어.”

“…….”

“생각해 봐, 모든 음악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 그런 욕심이 창작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거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내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 그래서 그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이게 모든 음악가의 꿈이잖아. 안 그래?”

“……그렇죠.”

“그 역할을 엘진은 할 수 있고, 난 할 수 없다는 얘기야. 이게 현실이야. 난 너의 길에 걸림돌이 될 생각은 없어.”

박 대표는 단호하게 말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엔 몇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저는 쌤과 같이 일하는 게…….”

수철이 말꼬리를 흐렸다. 박 대표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일은 친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야. 감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은 일이야. 일은 엘진이랑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 나랑 하면 되지.”

“…….”

“수철아.”

“네.”

“쉽게 생각해. 네가 한국을 벗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어. 널 경험해 본 사람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러려면 그런 일을 잘하는 회사와 손을 잡는 게 맞는 거야. 더 집중력 있고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회사 말이야. 그곳이 바로 금별기획이고, 엘진 그룹이야.”

김명석도 그렇고, 박 대표의 말도 그렇고 금별기획과 엘진 그룹의 대단함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음악을 비즈니스로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박 대표의 말대로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들려지길 꿈꾼다. 당연한 얘기다.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회사가 능력 있는 회사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수철이 생각하는 음악은 누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잘되고,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음악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세상 끝까지 가야 하는 음악, 세상 끝까지 가야 하는 소리는 당연히 간다. 수철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수철은 대단한 회사보다 편안한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싶다. 그것이 수철의 생각이다.

음악은 수철이 세상 밖으로 퍼트리면 되니까.

“쌤의 말뜻은 잘 알겠어요. 그런데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 회사가 대단한 건 알겠는데,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어요.”“거긴 다른 곳과 달라. 널 철저하게 리스팩하고 케어할 거야. 그리고 아티스트 개개인에게 맞게 맞춤형 시스템을 구성할 거야. 모든 아티스트가 걱정 없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말이야.”

“……네.”

“그런 덩치 큰 회사가 음악판까지 들어와서 독점하려 한다는 게 나도 열받아. 하지만 창작자로서 볼 때는 괜찮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회사는 찌질하지가 않잖아.”“찌질하지 않다니요?”“지금 대중음악계에서 잘나가는 기획사 중에 찌질한 대표들이 엄청 많아. 걸어 다닐 때마다 찌질, 찌질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야. 정부 관계자들 만나면 맨날 손 비비고, 죽는소리나 하고. 에이, 쩝.”

박 대표는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암튼, 이게 솔직한 내 생각이니까 잘 생각해 봐. 금별기획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네가 바라는 길을 빨리 갈 수 있어. 게다가 계약서도 없다며?”“네, 그렇게 들었어요.”“미친 거 아냐? 계약서가 없다니.”

“…….”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겠지. 아티스트를 현혹할 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거야.”

“뽕이요?”

“자신들 시스템을 한번 경험하면 중독될 거란 뜻이야. 그걸 믿으니까 아티스트도 선별해서 컨택하는 거고.”

“아…….”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줄까?”

“뭔데요?”

“엘진 그룹 대리가 전화하면 잘나가는 기획사 대표도 맨발로 뛰어나간다는 얘기가 있어. 과장된 얘기지만 그만큼 레벨 차이가 난다는 얘기야.”“아, 그 정도군요.”

“그래, 어쨌든 내 생각은 이러니까 곰곰이 잘 생각해 봐. 너에겐 좋은 기회야.”

“……네.”

수철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표는 그런 수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넌 거절할 생각이었지?”

수철의 성향을 잘 아니까 묻는 거였다.

“아니요, 저는 다른 제안을 해 볼 생각이었어요.”

“다른 제안?”

“네, 거기서 저한테 관심이 많다고 하니까, 먼저 앨범 한 장을 제안해 볼 생각이었어요. 결정은 그다음에 해도 되니까요.”“역제안을 하겠다는 얘기네?”

“네.”

박 대표는 수철의 말뜻을 유심히 생각하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재밌다. 재밌어.”

“……?”

“거기서도 황당하겠어. ‘어린 녀석이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이제 엘진 그룹을 상대로 역제안을 해? 나 참.’ 혀를 차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하하. 재밌다, 재밌어.”“제가 이상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야.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봐. 그게 너다운 거지. 네가 보기엔 받아들일 확률이 꽤 있어. 너한테 음악 감독을 제안할 정도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야.”“아……. 그런가요?”“그래, 게다가 거기서도 네 실력을 한 번 더 확인해 볼 수 있으니까 좋고, 너는 거기 시스템을 접해 볼 수 있으니까 좋고. 서로 좋은 거지. 하하. 수철이 너, 은근히 영리한 구석이 있어.”

“아, 네…….”

박 대표가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근데, 어떤 앨범을 제안하려고?”“제시의 앨범이요.”

“제시? 그건 영국 음반사에서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거기는 첫 번째 앨범만 하고요. 두 번째 앨범을 제안해 보려고요. 영상 콘텐츠가 전 세계로 간다고 하니까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세상 사람들이 제시를 알게 되면 놀랄 테니까요.”“세상 사람들이 널 알게 되면 더 놀라겠지.”

“네, 뭐…….”

“암튼 좋은 생각이야. 의외로 좋은 결과가 생길 수도 있겠어. 하하.”

박 대표가 다시 크게 웃었다.

* * *

다음 날.

수철은 작업을 하다 말고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둘러 작업실을 나섰다.

하린이 레슨을 하러 가기 위해서다.

같은 시각.

박 대표는 말끔한 차림으로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 들어섰다.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멀리서 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박 대표는 웃으며 손을 든 사내에게로 걸어갔다.

“오랜만이에요, 형님.”

사내는 박 대표가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이게 얼마 만이냐? 삼 년은 넘은 거 같네?”

박 대표도 웃으며 사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사내의 이름은 이진석. 금별 기획에서 차장 직급을 맡고 있다.

이진석 차장은 음악을 좋아해서 박 대표가 밴드를 할 때부터 따라다녔던 동생이자 팬이었다.

그 후 대학을 마치고 연예부 기자로 활동하다 경력과 정보력을 인정받아서 금별기획에 특채로 입사해서 차장까지 달았다.

“형님, 연락 좀 자주 하시지.”“연락은 네가 해야지. 바쁜 건 너잖아. 난 한가해.”“네, 제가 자주 연락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죄송하긴, 쌍방과실이지. 그리고 넌 나랑 노는 물이 다르잖아.”“다르긴요, 형님은 대표시잖아요.”“대표면 뭐 해? 너희 회사 사원만도 못한데.”“에이, 형님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그리고 먹고사는 건 다 똑같죠.”“하하, 그래. 먹고 사는 건 다 똑같지. 맞는 말이야.”

박 대표는 오랜만에 만난 이 차장과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금별기획에서 추진하는 영상사업단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영상사업단 진행은 잘돼 가?”“알고 계시는군요.”

“나 같은 소규모 기획사들은 금별기획같이 큰 회사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잖아.”“아직 구체화하는 과정이에요.”“섭외하는 아티스트가 많은가 봐?”“여러 장르의 아티스트를 접촉하고 있지만 인원은 극소수예요. 프로젝트 자체가 희소성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거니까요.”“희소성의 가치? 하하, 천재 프로젝트라는 말이네?”

이 차장은 박 대표의 웃음이 귀에 거슬렸다.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시크한 톤으로 대꾸했다.

이 바닥을 잘 아는 박 대표를 속일 수도, 속일 생각도 없었다.

반면, 박 대표는 이 차장의 당당함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요즘 천재가 붐이야, 트랜드로 자리 잡겠어.”“좋지 않게 보시는 거 압니다.”“그렇진 않아, 천재들에겐 언제나 조력자가 필요하니까. 난 단지 그들이 경제 논리에 휘둘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뿐이야. 그들은 사회에 대한 면역력이 약하거든.”“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희가 가장 염두에 두고 준비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니까요.”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박 대표는 이 차장의 눈에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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