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73화 (73/239)

#73화. 조력자란(1)

“어떻게 준비한다는 거야?”“그건 대외비입니다. 회사 시스템과 관련된 부분이라서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대외비? 시스템? 고작해야 실패한 지난 천재 프로젝트 분석하고, 음악계 원로들 모아서 세미나하고, 그래서 보여 주기식 안전장치 좀 만들고. 그런 거 아니야?”

박 대표는 누굴 속이려고 하냐고 노려봤다.

핵심을 찌르는 말에 이 차장은 낮은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맞습니다, 부정하지 않을게요. 형님이 전문가인데 제가 어떻게 속이겠습니까? 그런데 형님.”

“말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다짜고짜 저를 그렇게 쏘아붙이세요? 저한테 회사 프로젝트 따지러 오신 거예요?”

그 말에 박 대표가 멈칫했다.

“내가 그랬나? 하하, 미안. 내가 천재 프로젝트에 좀 예민해서.”

그제야 뭉쳤던 인상을 풀고 멋쩍게 웃었다.

박 대표가 천재 프로젝트에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다.

천재성을 잃어 가는 천재를 안타깝게 지켜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수철이 옆에 있다.

박 대표는 알고 있다.

천재라는 이유로 스카우트되어 자본의 논리에 놀아나다 차갑게 버려진다는 것을.

비열한 생태계.

이곳에서 박 대표는 수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물끄러미 보던 이 차장이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는 아티스트의 고급성을 살려서 예술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이 말 또한 천재 프로젝트라는 말이다.

천재들의 예술적 가치를 고급성이니 브랜드 가치니 하는 경제 용어로 포장하고 있다.

이런 말들이 박 대표는 불편했다.

천재성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경제라는 통속적인 가치에 억지로 쑤셔 넣은 느낌이 들었다.

“예술가의 브랜드 가치라…….”

박 대표는 말을 곱씹었다.

“왜 그러세요? 이 말도 거슬리세요?”“브랜드라고 하면 왠지 상품 같아서 말이야. 예술가 개개인의 창의성을 돋보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뭐 그런 부드러운 표현도 있는데 말이야.”“요즘은 개인에게도 브랜드 가치라는 표현을 많이 써요.”“나도 알아. 그런데 기업에서 말하는 예술가의 브랜드 가치라는 말은 왠지 불편해. 그 가치가 회사의 이익과 연결되는 가치니까 말이야.”

“…….”

이 차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불편한 진실이었다.

“하린인가? 그 아이는 천재가 아닌 거 같던데?”“갑자기 하린이 얘기는 왜 꺼내세요?”

이 차장이 불편함을 드러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박 대표는 이 차장의 과한 거부 반응이 의아했다.

“하린이가 천재는 아니지만 노래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요. 그래서 길게 보고 투자하는 거고요.”

“길게?”

“네.”

“이유가 있어?”

“죄송해요, 하린이에 대해선 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이 차장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런 경우는 종종 있으니까.

‘경영자 가족과 관련됐겠지.’

암튼 이걸 물으러 찾아온 것은 아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본론을 꺼냈다.

“용수철 알지?”

“네, 용수철 아티스트는 제작 지원팀의 최민준 팀장이 담당하고 있어요. 물론 형님도 아시겠지만요.”

“내가 알아?”

이 차장은 박 대표가 찾아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형님이 용수철 아티스트와 관련돼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벌써 조사를 했군.”“저희가 대충 일하는 회사는 아니잖아요?”

박 대표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 차장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내가 연락할지도 알고 있었겠네?”

“네.”

뻔뻔하게 대답하는 이 차장을 잠시 바라봤다.

“어디까지 알고 있어?”“회사에서는 형님이 용수철 아티스트 뒤에서 멘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용수철 아티스트가 우리를 냉소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순간 박 대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얼굴까지 붉어졌다.

박 대표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넌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잖아?”

“전 알죠.”

“그런데 가만있었다는 거야?”“형님과의 친분을 밝힐 상황은 아니었어요.”“그럼 내가 수철의 앞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겠네?”“저 빼고 모두 그렇게 생각하죠.”

박 대표는 굉장히 언짢았다.

천재의 앞길을 막고 있다니.

제일 싫어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런 오해가 싫어서 조심한 건데.’

처신에 한계를 느꼈다.

이 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용수철 아티스트에 대한 얘기는 파다해요. 천재적인 재능에 탁월한 외모까지. 영입 1순위죠. 음악 감독이 아니라 음악 고문이라도 맡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재능과 외모.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수철은 최고의 상품 가치를 갖고 있다.

군침을 흘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린이 보컬 트레이닝을 맡고 있는 거 아시죠?”

“알아.”

“실용음악과 교수 두 명이 6개월간 붙어서 레슨한 거보다 용수철 아티스트가 몇 주 봐준 것이 더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 냈어요. 그것도 혼자서요. 그런데 어떻게 군침을 안 흘리겠어요?”

수철의 재능에 관한 얘기는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다.

누구나 한번 경험하면 놀라고 관심 두는 건 당연하다.

욕심을 내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래, 군침 흘리는 건 당연하지. 누구나 그럴 거야. 그런데 뛰어난 작곡 실력? 보컬 트레이닝? 수철은 그 정도가 아니야.”“천재라는 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천재? 네가 보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야.”

박 대표의 의미심장한 말에 이 차장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박 대표는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박 대표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용수철에겐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더 있다는 말이다.

이 차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의자에서 몸을 세웠다.

“그 정도예요?”

“그래.”

“대체 어떻길래 그렇게까지 말씀하세요?”“네가 무슨 상상을 하든 그 이상이야.”

박 대표는 힘을 주어 묵직하게 말했다.

하도 묵직해서 이 차장이 주눅 들 정도였다.

“형님이 그렇게 말하실 정도면……. 상상이 안 되네요.”“지켜볼 기회가 생기면 알게 될 거야.”“그럼 그런 기회를 꼭 만들어야겠군요.”

이 차장은 박 대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꾸했다.

수철을 꼭 영입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어, 수철은 어디에 묶이는 스타일이 아니야. 묶으려고 하면 오히려 튕겨 나가 버려. 그러니까 혼자서 자기 길을 가도록 놔둬야 해.”“그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신중하게 접근하는 거고요.”“신중? 그런 거 같지 않던데?”

박 대표는 금별기획의 갑작스런 접근에 수철이 부담을 느꼈던 모습이 떠올랐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다르지만 저희는 신중하게 하고 있어요. 다른 아티스트들보다 훨씬 더요.”

이 차장은 다른 아티스트보다 수철에게 더 공을 들인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만큼 수철의 가치를 높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드라마 음악을 맡긴다고?”

“네.”

“관계를 만들겠다는 거군.”“그렇기도 하고, 저희가 만드는 컨텐츠엔 언제나 음악이 필요하니까요. 사실 저희 입장에서만 본다면 용수철 아티스트같은 사람이 작곡, 연주, 프로듀서, 음악 감독까지 다 해 주면 좋죠. 그런데 그럴 순 없잖아요.”

솔직한 말이었다. 하지만 수철은 그렇게 소모적으로 재능을 써서는 안 된다. 수철은 자신이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수철이 같은 천재는 조심히 접근해야 해. 자칫하면 깨질 수도 있는 유리그릇이야.”

느닷없는 박 대표의 말에 이 차장이 멀뚱히 쳐다봤다.

“지금까지 해 왔던 스타를 만드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말이야. 자칫하면 천재성을 잃을 수도 있어.”

박 대표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실리자 이 차장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형님이 걱정하시는 게 정확히 뭐예요?”

빙빙 돌리지 말고 찾아온 용건을 말하라는 뜻이다.

박 대표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난 수철이 같은 천재가 만들어 가는 음악 세상이 정말 궁금해. 그 녀석의 미래가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

“그래서 난 조심스레 지켜보기만 하는 거야. 도와 달라면 도와주고, 물어보면 조언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지. 앞으론 그마저도 없어지겠지만.”

이 차장은 박 대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때가 되면 난 구경꾼이 되겠지. 수철이 만든 작품을 즐기는 구경꾼 말이야.”“추상적이군요. 형님은 제작자보단 음악가의 감성이에요.”“맞아, 내 정체성이 뭐냐고 물으면 비즈니스보다는 음악가에 가깝지. 내가 어쩌다 제작자가 됐는지는 너도 잘 알잖아?”

“…….”

제작자로 전향한 것이 박 대표에게 아픈 기억이라는 것을 이 차장도 잘 안다.

그래서 선뜻 아무 말도 못 했다.

박 대표가 다시 말에 힘을 줬다.

“내가 걱정하는 게 뭐냐고? 난 너희가 수철에게 날개를 달아 줄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래서 수철과 너희가 한 팀이 되길 바라. 진정한 한 팀 말이야. 그런데 서로 상처만 주고 끝날까 봐 그게 걱정이 돼.”

예상치 못한 말에 이 차장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박 대표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조율이 필요해. 그리고 그게 내 역할이야. 양쪽을 잘 아니까.”

박 대표의 말에 이 차장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구겼던 주름이 풀리며 환해졌다.

“형님이 그렇게 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중간에서 박 대표가 조율만 해 준다면 자신들에게 냉소적인 용수철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

이 차장은 내심 그걸 기대하고 나온 자리였다.

그런데 박 대표가 먼저 말을 꺼내 주니 흡족할 수밖에.

이 차장은 시간을 확인하고 몸을 세웠다.

“형님, 점심시간이 다 되었는데 식사부터 하시죠? 제가 자주 가는 맛집이 근처에 있어요. 형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밥을 먹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하던 말은 다 하고 밥을 먹든지 해야지. 앉아 봐,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어.”

박 대표는 아직 중요한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 차장을 보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이 차장은 고집을 피웠다.

“에이, 형님!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죠. 식사하고 커피 한 잔 더하면 되죠, 어서 일어나세요.”

이 차장은 벌써 수철을 영입이라도 한 듯 기분이 좋아져서 박 대표를 일으켜 세웠다.

* * *

“입맛에 맞으세요?”

“응, 맛있어. 맛집 맞네.”

박 대표는 이 차장이 안내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커피는 아까 마셨으니까 이번엔 차를 마시죠. 제가 아는 곳이 있어요.”

자리를 옮긴 둘은 옛날얘기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 갔다.

그러나 박 대표가 프로젝트 얘기를 꺼내면서 이 차장의 얼굴은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난 이런 프로젝트를 잘 알아. 천재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것은 회사의 이미지 변신을 노리거나 문화사업을 독점하려는 거겠지.”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박 대표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직장 상사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철을 자본의 논리 위에 올려놓고 방향을 잡을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해. 수철은 그렇게 대하면 안 돼.”

이 차장은 조금씩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조율하기로 했으면 끝난 얘긴데 왜 자꾸 토를 다는지 이해가 안 됐다.

‘자기 아들도 아닌데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박 대표는 조율을 말하면서 일방적으로 수철의 편에 서서 수철을 어떻게 대하라는 말만 하고 있다.

설정이니 자본의 논리니 하는 단어를 쓰며 회사를 삼류 장사꾼 취급하고 있다.

이 차장이 몸을 세웠다.

“형님. 너무 단정 짓는 거 아니에요?”

“단정 짓다니?”

“왜 용수철은 돈이랑 거리가 멀 거라고 생각을 하세요? 형님이 부모라도 돼요?”

“뭐!”

박 대표가 미간을 구겼다.

“수철은 그런 쪽이 아니야.”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이 차장은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한술 더 떴다.

“장담하지 마세요. 그건 형님이 모르셔서 하는 말이에요.”“뭐? 내가 모른다고?”

눈에 힘을 주며 이 차장을 쏘아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난번 ‘현성’에서 우리와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 결과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아시잖아요?”

이 차장이 현성그룹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사례로 꺼내 들었다.

‘현성’이라는 말에 박 대표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돈.’

언론에 천재가 돈을 밝힌다는 기사가 도배되면서 프로젝트는 불미스럽게 끝이 났다.

겉으로는 회사와 천재의 갈등으로 보였지만 여러 소문이 돌았다.

경쟁 관계에 있는 기업에서 물을 먹이려고 작전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었고, 천재들이 진짜 돈에 환장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박 대표가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을 당겼다.

“그건 그들이 돈을 밝힌 게 아니라 분배의 문제였어. 공정한 분배 말이야. 그래서 목소리를 높인 건데 언론이 과장해서 떠들어 댄 거라고.”

박 대표가 목청을 높여서 설명했다. 하지만 이 차장은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