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조력자란(2)
박 대표는 이 차장의 계속되는 도발에 미간을 좁혔다.
“대체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수철이 돈에 환장해서 날뛰기라도 할 거라는 거야?”“아니, 제 말은…….”
박 대표의 날카로운 반응에 이 차장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형님 말씀대로 우리도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문화 예술 쪽으로만 접근하고 싶죠, 회사의 이미지에도 그게 좋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천재들이 그렇지가 않다니까요?”
“뭐?”
“아니, 용수철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전 단지 ‘현성’에서 벌어진 사례를 말씀드리는 거예요.”“그건 분배의 문제였다고 말했잖아, 왜 자꾸 돈으로 몰아가려는 거야?”“아니, 그게 아니고…….”
이 차장은 목이 타는지 물을 들이켰다.
“네, 저도 알아요. 형님이 ‘현성’을 향해서 쓴소리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제 말은 이론과 실제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이론과 실제의 차이?”“네, 공정한 분배, 우리도 당연히 그걸 바라죠. 그런데 천재의 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아요. 그들은 어떻게든 재능과 유명세를 결부시키려고 해요.”“그건 당연한 거 아냐?”“형님, 유명세가 곧 돈이잖아요. 그들은 교양 있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어렵게 살아서 그렇다는 건 이해해요, 그래도 도가 지나쳐요. 회사에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다고요.”
박 대표도 이 부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박 대표가 만난 몇몇 천재의 가족들도 그랬다.
무슨 금광이라도 발견한 듯이 온 가족이 나서서 돈에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그 모습을 박 대표는 씁쓸하게 지켜봤다.
그들은 심지어 회사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며 법적 소송을 벌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회사에서는 프로젝트를 포기했고, 스트레스를 못 이긴 천재는 천재성을 잃거나 잠적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정신병원에서 발견됐다.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박 대표는 씁쓸한 얼굴로 입을 뗐다.
“수철은 그렇게 챙겨 주는 가족도 없어.”“알아요, 그래서 더 신경이 쓰여요. 사람들이 저희 선의를 왜곡할까 봐 걱정도 되고요.”
박 대표는 선의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대꾸하지는 않았다.
이 차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아티스트들이 직접 자본의 논리를 갖고 들어오는 예도 있어요. 모르시죠?”
“그래?”
박 대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네, 딱 천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재능이 탁월한 사람들이에요.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몇 달 안 됐는데도 이미 그런 경험을 몇 번 했어요.”“그러면 회사 차원에서는 좋은 거 아냐?”“네, 저희는 좋죠. 그렇게 생각을 확실하게 밝히고 들어오면 일하기가 훨씬 수월하죠. 그런 아티스트들은 바로 계약합니다. 본격적인 윈윈이 시작되는 거죠.”
이 차장은 수철도 그러길 바라는 눈치였다.
어떻게든 수철을 자본의 논리 위에 올려놓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이를 느낀 박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수철은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런 성향이 아니야.”“과연 그럴까요? 형님이 우리 시스템을 훤히 아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말에 박 대표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허, 너, 정말?”
이 차장이 수철을 매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자존심도 상했다.
그런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차장의 이어지는 말은 결국 박 대표를 폭발하게 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형님이 중간에서 조율하겠다고 하시니까 방향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그래야 형님도 좋고, 용수철도 좋고, 저희도 좋은 거 아닙니까.”
수철을 잘 설득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하게 만들라는 얘기였다.
그러면 보상을 하겠다는 얘기였다.
“이 녀석이 보자 보자 하니까!”
탁!
박 대표가 눈을 부라리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비릿한 웃음을 보이던 이 차장은 박 대표의 거센 반응에 움찔했다.
“형님! 흥분하지 마시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뭐가 가장 좋은 방법인지요.”“허! 너 참, 끝까지……!”
박 대표는 잠시 이 차장을 노려봤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정도였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현성 프로젝트의 끝이 어땠는지 너도 잘 알잖아! 거액을 주고 잘나가는 아티스트들 스카우트했다가 뜻대로 사업이 이뤄지지 않으니까 서둘러 폐업한 거잖아. 현성도 손실을 입었지만 아티스트들은 어떻게 됐어? 그때 충격으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거나 아예 생명이 끝나 버린 아티스트가 대부분인 걸 몰라?”
천재들이 돈을 밝혀서 사업이 종료된 것처럼 보도됐지만 실제로는 천재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사업에 실패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그리고 박 대표도 이들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박 대표가 냉정하게 프로젝트의 병폐를 짚자 이 차장은 우물쭈물 빈약하게 대꾸했다.
“……현성이랑 저희는 다르죠.”“뭐가 달라! 현성이 엘진보다 한 수 위 아니야?”
“…….”
박 대표의 연이은 팩트 체크에 이 차장은 대꾸를 못 하고 썩은 웃음만 보였다.
“내가 미리 경고하겠는데, 만약에 수철에게 불이익이 돌아가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박 대표가 계속해서 날을 세우자 이 차장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형님, 아니, 성준이 형, 우린 금별기획이에요. 형이 혼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 말에 박 대표가 씨익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너, 내 스타일 알지?”“알죠. 맞다고 생각하면 무식하게 돌진하잖아요. 코뿔소처럼.”“무식? 코뿔소? 너도 내 뿔에 한 번 찔려 볼래?”“하하, 말이 그렇다고요. 형님, 진정하세요.”
이 차장은 손사래를 치며 웃어넘기려 했다.
“농담 아니야, 잘못되면 정말 내가 다 쑤시고 다닐 거야. 공정위, 인권위. 다 가서 난리 칠 거야.”“공정위는 그렇다고 치고 인권위는 뭐예요?”“대기업이 천재를 착취한다.”“네? 형님 무슨 그런 소름 돋는 말씀을…….”
“왜, 겁나?”
“우리도 그 정도 안전장치는 하죠.”“그 안전장치가 계약서 없다는 거?”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은 누구 편을 들까? 대기업? 아님, 연약한 천재?”
“…….”
결국, 이 차장이 꼬리를 내렸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몸을 붙여 왔다.
“자, 형님. 시간도 없는데 이제 그만하시고, 어서 꺼내 놓으세요. 형님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요.”
“뭘 꺼내 놔?”
“플랜을 갖고 오셨을 거 아닙니까.”“플랜? 그건 너희가 찾아야지, 왜 나한테 물어?”
박 대표가 되묻자 이번엔 이 차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예요? 그럼 그냥 막무가내로 오셔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계신다는 거예요? 형님처럼 이성적이고 치밀한 사람이요?”“난 방향만 얘기하러 온 거야, 너랑 딜을 하러 온 게 아니라고.”
“허!”
이 차장이 혀를 찼다.
박 대표가 찾아온 목적을 종잡을 수 없었다.
말을 들어 보면 제작자가 아니라 수철의 열성 팬 같았다.
‘진짜 용수철을 아껴서 저러는 건가?’
목적이 어떻든 이 차장은 대화를 계속 이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고, 박 대표가 알아서 조율을 잘하길 기대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어쨌든 용수철도 우리가 필요하고, 우리도 용수철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확인했고요. 형님이 서로 잘되기를 바라며 조율하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저는 그렇게만 알고 있을게요.”
나머진 알아서 잘하라는 얘기였다.
“그래, 그런데 이건 알고 있어야 해.”
“또 뭘요?”
“수철은 한번 튕겨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불편해서 등 돌리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그러니까 신중하게 접근해. 수철한테는 돈이니 계약서니 하는 건 안 통하니까.”
“…….”
“난 오늘 이 말을 하러 온 거야. 수철을 잘 아는 지인으로서 말이야. 그래야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
박 대표는 본심을 꺼내 놓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플랜이 있냐고? 그래, 굳이 플랜을 말하자면 이거야.”
“어떤?”
“수철에게 어떤 방향도, 계획도 제시하지 말고 수철이 혼자서 가는 걸 지켜봐. 조용히 서포트만 하면서 말이야.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일 거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야. 그러지 않고 어떤 의도를 갖고 끌고 가려고 하면 수철은 그냥 튕겨 나가 버릴 거야.”“비서 역할만 하라는 얘기네요.”“처음은 그렇게 시작하는 게 좋아. 그래야 성공할 수 있어. 수철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이 차장은 박 대표의 말이 진심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접근법은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다.
박 대표가 말을 이었다.
“수철이 까다로워 보이지만 일단 친해지면 그 누구보다도 믿을 만한 녀석이야. 친해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믿으면 끝까지 가는 녀석이야. 일관성 하나는 짱이지.”“멋있게 들리네요.”
“멋있는 녀석이야.”
이 차장은 박 대표가 진심으로 수철을 아낀다는 걸 알았다.
계속 색안경을 쓰고 본 것이 미안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의문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뭐?”
“여기서 형님이 얻는 건 뭐예요?”“말했잖아, 난 한 명의 팬으로서 수철의 미래를 지켜 보고 싶은 거라고.”
“…….”
“믿든 안 믿든 그게 내 진심이야.”“믿을게요. 형님이 원래 돈을 좇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형님은 참…….”
“참 뭐?”
“형님은 원래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좋아했고요. 그런 히피 같은 분이 왜…….”
“왜 집착하냐고?”
“네.”
이 차장의 뚱딴지같은 질문에 박 대표는 피식 웃었다.
“집착하는 게 아니야. 서포트할 거면 확실하게 하고, 그게 아니면 그냥 가는 길 알아서 혼자 가게 건들지 말라는 거야. 아무래도 수철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니까.”“진짜 사랑하시나 봅니다. 사귀기라도 해요?”“그래 사귄다 어쩔래?”“커밍아웃하신 겁니까?”“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말 잘 명심하는 게 좋아.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생기지 않게.”“네, 잘 알겠습니다.”
이 차장이 웬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드라마 작업하면서 용수철이 먼저 우리랑 계약하고 싶어 하면 그땐 형님도 포기하셔야 합니다?”“물론이지, 그땐 네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않고 사라져 줄게.”“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좋은 밑그림 한번 그려 볼게요.”“이제야 얘기가 통하네.”
드디어 둘의 긴장감이 해소됐다.
마치 협상에 성공한 사업가처럼 서로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형님.”
분위기가 다시 평온을 되찾자 이 차장이 평소 궁금하던 걸 물었다.
“왜?”
“형님은 유독 왜 이렇게 천재 관련한 프로젝트에서 날을 세우세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자료를 찾다 보면 형님 이름이 많이 등장해요.”
“알고 있어.”
박 대표는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천재가 무너지고 사라지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 왔어. 그런 친구들은 사람들의 작은 질투심에도 쉽게 무너질 정도로 약해. 그래서 어쩌면 신이 공평한 거고.”
“그게 무슨?”
“천재적인 재능을 주는 대신 다른 재능은 거둬 가니까. 사람마다 재능의 평균치는 결국 같다는 말이야.”
“아, 그렇군요.”
이 차장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5% 정도밖에 안 돼.”
“5%요?”
“내가 생각하는 천재 생존율 말이야.”“그 정도밖에 안 돼요? 천재 스토리는 많이 듣잖아요?”“많이 듣지, 그런데 알고 보면 그들이 다 천재는 아니야. 천재이길 기대하며 천재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지. 실제로는 눈에 띄지 않는 천재들이 많아. 관심받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숨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살아가는 거지.”
“그렇군요.”
“난 천재들이 그들의 재능을 펼치며 많은 작품을 하길 바라. 그게 사람들에게도 축복이야. 그래서 난 그들을 돕고 싶은 거고.”
“이해돼요.”
이 차장은 박 대표의 진심을 공감했다.
“난 천재들이 오래 살아남아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 음악이 주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해 주길 기대해. 그래서 그들이 천재성을 잃는 건 정말 비극이라는 거야. 그건 우리가 행복해질 기회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거든. 누군가 그들을 지켜줘야 해. 내가 그 역할을 하고 싶은 거야.”
박 대표를 묵묵히 바라보던 이 차장이 입을 뗐다.
“형님 뜻은 잘 알겠어요. 진심이 느껴지네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형님이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고 계시면 용수철의 프로모션은 형님이 직접 하시는 게 낫지 않아요?”“난 그럴 역량이 안 돼.”
“어떤 역량이요?”
“수철을 밀어서 세계로 내보낼 역량 말이야.”“그건 회사의 역량만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수철의 재능 정도면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계의 주목을 받는 건 정해진 수순 아닌가요? 어느 정도 자본만 확충해도 될 거 같은데.”
그 말에 박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돈도 돈이지만 난 조직이 없잖아.”“그렇죠, 조직은 있어야죠.”
의아해하던 이 차장도 조직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뭔가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형님의 신념과 우리의 조직력이면 말이에요.”
“그럴 수도.”
박 대표는 대화를 멈추고 시간을 확인했다.
“할 얘기는 다 했으니까, 인제 그만 일어나자.”
“네.”
박 대표는 계산서를 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