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소리의 원리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거 같아서 괜히 미안하네.”
계산을 마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 차장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 차장도 손을 잡으며 대꾸했다.
“아니에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져서 제가 죄송해요.”“다음번엔 우리가 잘 가던 할매집 가서 생선구이에 막걸리 한잔하자.”“좋죠, 막걸리 한잔하면서 천재와 음악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다시 한번 얘기 나눠요.”“하하, 그래. 그때는 일 얘기를 떠나서 예전에 형 동생 분위기로 함 놀자.”“네, 저도 바라는 바예요.”
박 대표는 이 차장과 악수하고 돌아섰다.
이 차장은 멀어지는 박 대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서 있었다.
‘참 대단한 형이야. 40대 중반을 훌쩍 넘은 나이인데도 말이야.’
아직까지도 열정과 순수함을 가진 박 대표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 차장도 빙그레 웃고는 돌아서 사라졌다.
* * *
부스에서 노래를 마친 하린이가 다시 컨트롤 룸으로 돌아와 수철과 마주 앉았다.
수철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다 좋아, 지금 상태만 유지하면 네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소화하는 거야.”
수철의 칭찬에 하린이의 입이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수철이 한마디 더 얹었다.
“그런 의미에서 넌 아주 훌륭한 학생이야.”
“호호!”
하린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몸을 기울여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른 선생님들은 칭찬에 너무 인색하세요.”
그 말에 수철도 소리를 죽여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 생각에 넌 연습은 그만하고, 나가서 뛰어노는 게 좋을 거 같아. 그 정도면 노래는 충분히 잘하거든.”“알겠어요, 선생님 말씀 꼭 명심할게요. 호호.”
하린이도 히죽거리며 수철의 말에 보조를 맞췄다.
“그래, 꼭 기억해. 히히.”“네, ‘나가서 뛰어놀자!’ 타투(Tattoo)로 팔에 새길게요.”“에이, 그건 아니지.”
수철이 다시 몸을 세웠다.
“다 좋고, 한 가지만 덧붙일게.”
“네.”
“소리를 길게 내는 연습을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스타카토로 끊어서 소리를 내 봐. 아― 길게 하고 나서 아, 아, 아, 아. 이렇게 끊어서 연습해 보는 거야.”
“네, 알겠어요.”
“연습할 때 메트로놈을 켜 놓고 하는 거 잊지 말고.”
“네.”
“그리고 하린이 너. 비피엠(BPM)이 뭔지 알아?”“네. 알아요. 빠르기 잖아요.”“그래, 1분 동안 똑딱거리는 개수야. 처음엔 60으로 느리게 하고, 그다음엔 90, 그리고 마지막엔 120으로 놓고 빠르게 스타카토를 해봐.”
“네, 알겠어요.”
“처음엔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굉장한 효과가 나타날 거야.”
“어떤 효과요?”
하린이가 굉장한 효과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수철은 하린이와 눈을 마주치며 허리를 곧게 폈다.
“이렇게 허리를 곧게 펴서 아. 아. 소리를 한번 내 봐. 스타카토로.”
“아. 아. 아. 아.”
수철을 따라서 하린이가 허리를 곧게 펴고 소리를 냈다. 수철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어때? 길게 소리 낼 때와 달라지는 게 느껴져?”
“잘 모르겠어요.”
하린이는 고개를 저었다. 수철이 묻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자, 이번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배에 손을 대 봐. 그리고 다시 소리를 내 봐.”
“아. 아. 아. 아.”
하린이가 배에 손을 얹고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변화를 감지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와! 신기해요.”
“달라지는 게 느껴져?”“네, 아랫배가 뽈록뽈록 움직여요.”“힘을 주어 애써 발음해서 뽈록거릴 때와는 다르지?”
“네.”
“말할 때마다 단전에서도 같이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네, 맞아요. 아랫배가 따로 숨 쉬는 거 같아요.”
하린이는 이런 변화가 신기한 듯 배에 손을 얹고 계속 소리를 냈다. 수철은 신기해하는 하린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복식호흡이 잘 잡혀서 그런 거야. 그런 의미에서 대장 선생님께 감사해야 해.”
“아, 네.”
하린이는 대답하고는 김명석이 있는 복도 쪽을 힐끗 한번 쳐다봤다.
수철이 계속 말을 이었다.
“복식호흡이 잘 잡혔기 때문에 이런 연습이 가능한 거지만, 거꾸로 이렇게 연습하면서 단전의 힘이 더 단단해지기도 해.”
“아…….”
“소리는 입에서 나오지만, 시작은 거기서부터 하거든. 네가 손을 대고 있는 그 부분에서 소리가 시작되는 거야.”“아! 무슨 말씀인지 알 거 같아요.”
하린이는 배를 만지며 눈을 반짝였다. 소리를 낼 때마다 단전이 뽈록하는 것이 소리가 시작되는 의미라는 걸 이해했다.
“사람이 내는 소리의 원리가 그래.”“소리의 원리…….”
하린이는 수철의 말이 명언처럼 들리는지 곱씹었다.
수철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이런 연습이 필요한 이유를 알겠지?”
“네.”
“그래, 열심히 해봐. 며칠만 연습해도, 소리 내는 데 자신감이 더 붙을 거야.”“네, 기대돼요. 며칠 후가요.”
하린이는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그동안 수철이 알려 준 연습법을 체험해 본 학습 효과에서 나온 눈빛이었다.
“참고로, 어느 하나의 연습법 때문에 네가 이렇게 좋은 성장을 하는 건 아냐. 연습법은 서로 다 연결돼 있거든.”
“아…….”
“그래서 지금 너한테 나타나는 긍정적인 효과는 지금까지 네가 연습한 모든 연습법의 결과야. 복식호흡, 길게 소리내기, 테너 곡 연습 등등. 그 효과가 너한테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거야.”“무슨 말씀인지 알 거 같아요. 저도 그게 느껴지거든요.”
하린이가 수철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래, 그 느낌이 지금까지 네가 그만큼 열심히 연습했다는 증거야.”
그 말에 하린이의 입이 배시시 벌어졌다.
“제가 좀 열심히 하긴 했죠. 호호!”
표정이 돌변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수철도 하린이의 장난스러움에 따라 웃었다.
“하하, 그래. 그건 인정. 잘했어.”“알아주셔서 감사해요, 다른 선생님들은 무서운 얼굴로 열심히 하라고만 하고 정말 칭찬을 안 해 주세요. 채찍을 들면 당근도 줘야 하는데 말이에요. 저는 칭찬에 목마르다고요. 흑흑.”
하린이는 은근슬쩍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며 우는 시늉을 했다.
뭐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멀리서 김명석이 돌아봤다.
하린이는 우는 시늉을 멈추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수철이 씨익 웃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의식해서 소리를 낼 때만 단전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지만, 나중에 복식호흡이 잘 잡히고 소리가 안정되면 평소 말할 때도 지금 같이 뽈록뽈록 움직이는 걸 느끼게 될 거야.”“와, 그때가 되면 진짜 고수가 되는 건가요?”“하하, 그래. 고수가 되는 거야. 지금처럼 꾸준하게 한다면 말이야.”“네, 저는 계속 열심히 할 거예요. 아 참!”
하린이는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지 손으로 허벅지를 탁 쳤다. 그리고 수철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난번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코끝에 소리를 붙인다는 말,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오호, 그래?”
“네, 거울 보면서 경음 연습하다 보니까, 소리가 코끝에 붙는 게 보이더라고요.”“와, 진짜 고수 다 됐네?”“호호, 아직은 연습생이죠. 선생님께 사랑받는 귀여운 연습생 정도?”
기분이 좋은지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장난을 쳤다.
이번엔 수철도 같이 맞받아쳤다.
“과연 다음 연습 때도 그럴까?”
“네?”
“하하! 농담이야.”
“선생님―!”
하린이가 뱁새눈을 뜨며 째려봤다. 수철은 웃음을 멈추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계속해 봐, 코끝에 붙으니까 뭐가 달라지는 거 같아?”“우선 자신감이 확 붙었어요. 연습하는 게 즐거워요.”“그래, 그럴 거야. 그리고 발음도 더 정확히 조여지지 않아?”“네, 맞아요. 발음할 때마다 단어가 코끝에 착착 달라붙고 있어요. 그리고…….”
하린이는 자랑거리라도 생긴 듯 계속 떠들었다. 수철도 일일이 호응해줬다.
수철은 그 느낌을 잘 안다. 하린이는 갈수록 자신감이 더 붙을 것이고, 소리에 대한 이해도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하린이의 엄청난 성장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수철이 생각하는 하린이의 미래다. 하린이는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하린이의 자랑이 멈추자, 수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테너 곡은 인제 그만 불러도 돼.”“벌써요? 연습법이 잘 붙는다고 하셨잖아요.”“여기까지가 딱 좋아. 잘못하면 네 목소리가 굵어질 수도 있어. 살짝 그런 조짐도 보이고.”“아……. 네. 알겠어요. 그럼 원래 하던 곡만 연습하면 돼요?”“그래, 나중에 필요하면 새로운 연습곡을 붙여 줄게.”
“네. 선생님.”
“그리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연습하지 말고 그냥 쉬어. 무리해서 연습하지 말고.”
“네, 알겠어요.”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수고했어.”“수고하셨습니다.”
* * *
“다 끝났어?”
수철이 콘트롤 룸 밖으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김명석이 일어났다.
“네, 하실 말씀 있으세요?”“그런 건 아니고. 특별한 일 없으면 밥이나 같이 먹자고.”
“네, 좋아요.”
“돈가스 좋아해?”
“완전요.”
“잘됐다. 요기 앞에 돈가스집이 오픈했는데, 거기 가 보자. 맛집인지 확인해야지.”
“네.”
수철은 김명석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한 번만 더 하면 하린이 연습은 끝나는 거지?”
“네.”
“다음 주에 할 거야?”
“네.”
“금별기획에서는 네가 하린이를 계속 맡아 줬으면 하는 눈치던데.”
“…….”
수철이 대꾸가 없자 김명석은 고개를 돌려 수철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곤 빙그레 웃었다.
“금별기획에서 너한테 특별 보너스를 주려나 봐.”
“특별 보너스요?”
“그래, 하린이 연습에 만족도가 크다는 뜻이겠지. 덕분에 나도 좀 챙기게 될 거고. 하하, 어쨌든 즐거운 일이야.”
수철에게 관심이 많은 금별기획에서 하린이 보컬 트레이닝을 핑계로 특별 보너스를 주고, 더불어 수철을 소개한 김명석에게까지 보너스를 주겠다는 거였다.
수철은 뭔가 꺼림직했지만, 김명석은 기분이 좋아서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역시 큰 곳은 달라. 사람 다룰 줄을 안단 말이지. 이래야 우리도 일할 맛이 나지. 안 그래?”
“……네, 그렇죠.”
수철은 김명석의 좋은 기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 동조했다. 하지만 마음은 부담스러웠다.
지금도 하린이의 레슨비로 너무 많은 돈을 받고 있다. 그런데 보너스까지 준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느닷없이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부아오 탄룽 지칭. 지징 흐…….
중국어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김명석은 씨익 웃더니 수철을 보며 무대 위의 연극배우처럼 팔을 벌렸다.
“열정을 얘기하지 마라. 열정과 재능은 기본이다.”
“……?”
“저 중국어의 뜻이야. 요즘 연습실에 중국인 유학생이 많아, 기획사 오디션을 준비하는 애들이지.”
“아, 그렇군요.”
김명석의 말을 듣고 연습실 복도를 보니 그들이 내뿜는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저런 멘트에 돈 많은 중국인 엄마들이 뻑 간대. 역시 서비스 마인드는 우리나라가 최고야, 하하.”
김명석은 이런 모습이 재밌는지 껄껄 웃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는 데 또다시 중국어 소리가 들려왔다.
“무대에선 쫄면 끝이야! 네가 무대를 점령해야 해! 너의 목소리로 관객들을 잡아먹어야 한다고!”
김명석이 또 번역을 해 줬다. 그러면서 다시 껄껄 웃었다.
“하하. 역시 우리나라 음악 장사꾼들은 달라. 대사가 찰져. 거의 연극배우들 같아.”
“…….”
“생각해봐. 전쟁에 나가는 스파르타 전사들에게 하는 말 같지 않아?”
비하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명언을 쏟아내고 소리를 지른다고 실력이 늘지는 않을 텐데.
수철은 그런 생각을 하며 김명석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수철의 시선을 의식한 김명석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