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웰컴 투 코리아(1)
“선생님은 중국어도 잘하시네요.”
수철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김명석이 손을 저었다.
“아니야, 나도 잘 몰라. 단지 저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야. 연습생만 바뀔 뿐 트레이너는 항상 같은 말을 반복하거든. 하하.”
김명석이 예전에 말한 연습생 훈련 프로그램이 이런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 공장에서 찍어 내듯이 시스템을 돌린다는 말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김명석이 물었다.
“어떤 생각이 들어?”
“뭐가요?”
“지금 저들의 방식 말이야.”
수철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저렇게 소리를 지르면 불안만 더 키우는 거 아닌가요? 무대를 지배하려면 방법을 알려 줘야지, 윽박지른다고 되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그렇지.”
“음악은 즐겁고 자유로워야 하는데 애들이 음악을 경쟁으로 받아들일까 봐 걱정돼요.”
그 말에 김명석이 수철을 힐끗 쳐다봤다.
“역시 넌 달라.”
“뭐가요?”
“음악을 보는 눈 말이야.”
“…….”
“지금 저기 있는 연습생들이 모두 하린이 또래들이거든. 고작해야 이제 15살 전후야.”
“그렇군요.”
수철은 대꾸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중학생이 먼 나라까지 와서 연예인이 되겠다고 저런 훈련을 받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받는 압박감이 수철에게도 전달되는 거 같았다.
수철이 말이 없어지자 김명석이 수철의 표정을 읽었는지 어깨를 붙여왔다.
“막 달려가서 수철이 네가 다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수철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물었다.
수철은 부정하지 않았다. 김명석의 물음대로 그런 생각이 들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하,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저 트레이너들이 왜 저러는지 알아?”
“왜요?”
“주먹구구식 옛날 방식을 답습하는 거야.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중국 엄마들이 저런 방식을 선호한다는 거야. 트레이너의 열정 넘치는 모습이 매력적이라나? 게다가 저렇게 소리 지르는 트레이너들이 섹시하다는 엄마들도 있어. 하하. 참 세상 재밌지 않아?”
김명석은 자신의 건물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이 재밌다며 연신 껄껄거렸다.
* * *
영국에서 비행기가 도착했다. 곧이어 샘, 데이비드, 알베르토가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Hey! Good To See You Again!”
“웰컴 투 코리아!”
수철과 영준이 형은 멤버들과 일일이 포옹하며 반가움을 나눴다.
멤버들은 처음 방문하는 한국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와. 공항 멋있다. 반짝반짝하네. 난 이렇게 세련된 공항은 처음 봐.”
마치 시골에서 도시를 처음 온 사람처럼 공항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영준이 형은 뒤에서 이 모습을 재밌는 얼굴로 쳐다보다 멤버들을 커피숍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커피 마시면서 한 시간만 기다릴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제시 말하는 거지?”
멤버들은 제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호주와 영국을 오가며 공연을 하는 제시는 영국에서도 꽤 유명한 존재였다. 영국 멤버들은 제시가 노래를 부른다는 소식에 기뻐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기 온다!”
한 시간 후, 제시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한 명씩 포옹하기 시작했다.
“잘 지냈어?”
“그래, 오느라 수고했어.”
제시는 수철, 영준이 형과 인사를 나눈 후 다른 멤버들을 쳐다봤다.
“너희도 오랜만이야. 여기서 만나니까 더 반가워.”“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만나서 반가워.”
제시가 인사를 건네자, 샘, 데이비드, 알베르토가 돌아가면서 인사했다.
“난 너희와 함께하는 이번 연주 여행이 기대돼. 녹음과 앨범도 마찬가지고.”“그래, 우리도 같은 마음이야. 우린 네 보컬의 마법을 잘 알고 있다고. 하하.”
알베르토가 크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시는 특유의 시크한 톤으로 대꾸했다.
“고마워,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내가 게을러질 수도 있으니까.”“하하! 그래, 기억해 둘게.”
멤버들은 갈 생각은 안 하고 자신들만의 특유한 농담을 던지며 공항 한가운데서 웃고 서 있었다.
“이제 갈까?”
영준이 형이 앞장서자, 모두 따라서 공항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영준이 형은 멤버들이 가져온 짐을 차곡차곡 차에 실은 후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녹음과 공연의 동선을 고려해, 마포의 한 호텔로 잡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첫 식사인데 뭐 먹고 싶어?”
“삼겹살!”
멤버들은 서투른 발음으로 모두 삼겹살을 외쳤다. 어디서 한국의 삼겹살이 맛있다는 걸 들은 모양이었다. 제시만 삼겹살이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알베르토는 미식가답게 인터넷을 뒤져 한국에서 먹어 볼 음식 리스트를 만들어 왔다. 일 순위가 한우였지만 비싼 걸 아는지 오늘은 삼겹살을 선택했다.
식탁에 소주도 한 병씩 놓였다.
“영준, 그거 어떻게 만드는 거야?”
“뭐?”
“소맥 폭탄주.”
데이비드가 떠듬떠듬 발음하며 잔을 내밀었다. 직접 만들어 보려다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줘 봐, 내가 만들어 줄게.”
영준이 형은 소맥을 한 잔씩 만들어 모두에게 돌렸다.
멤버들은 한국에 오면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술에 대한 예법도 알고 있었다. 수철에게 고개를 돌리고 마시라고 할 정도였다. 자신들이 나이가 많다는 얘기였다.
고기를 구워 쌈을 싸고, 다 같이 건배하며 한 잔씩 들이켰다.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술도 몇 잔 더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영준이 형이 한국에서의 일정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이틀간 녹음을 하고, 다음 날부터 바로 공연을 할 거야. 녹음 일정은 수철이 설명할 테니까 난 공연 일정만 얘기할게, 우선 첫 공연은…….”
영준이 형이 잡은 공연 일정은 빡빡했다. 마냥 즐겁던 멤버들의 표정은 얘기를 들을수록 무거워졌다.
한국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음악을 들려준다는 건 기쁜 일이다. 하지만 공연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강연과 클리닉을 포함해 하루에 기본 두 차례씩의 스케줄이었다.
“와,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영준이 형의 일정을 들은 몇몇은 혀를 내둘렀다. 공연을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처음 방문한 한국을 여행하고 싶다.
공연 일정을 다 들은 알베르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영준! 너, 연주 여행의 묘미를 잊은 거 아냐?”
그 말에 다른 멤버들은 침묵했다. 하지만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한국인의 특성답게 빡빡한 스케줄을 좋아하는 영준이 형을 우려했다.
“걱정 마, 그것도 다 생각하고 있어.”
멤버들의 표정을 읽은 영준이 형이 이번엔 멤버들이 좋아할 일정을 얘기했다.
“이번 주말엔 서울 투어를 할 거야. 그리고 다음 주엔 1박 2일로 경주 여행도 할 거야. 공연 없이 여행만 말이야.”
그 말에 멤버들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영준이 형이 계속 말을 이었다.
“경주는 너희가 좋아할 만한 곳이야. 거기에 가면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경험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나라의 고유한 음식도 맛볼 수 있어. 맛집이 많거든.”“그래, 좋아. 난 그런 곳을 가는 것을 아주 좋아해. 한국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데이비드가 나서서 호감을 표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너희가 시간을 내서 한국을 좀 더 경험하고 싶다면 제주도도 갈 생각이야. 제주도는 정말 아름다운 섬이거든.”
제주도라는 말에 이번엔 샘이 반응을 보였다.
“나도 제주도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어. 내가 한국을 간다고 하니까 친구가 제주도를 꼭 가 보라고 했어, 사진을 보여 주면서 말이야. 정말 아름답더라고.”
샘은 다른 멤버들을 보며 제주도는 환상적인 섬이라고 감탄했다. 사진으로만 봤을 뿐인데 말이다.
샘 덕분에 영준이 형의 얼굴도 환해졌다.
영준이 형은 여행 가이드처럼 대한민국 투어라도 시키고 싶은 표정이었다. 친한 사람들이니까 그만큼 보여 주고 싶은 것도 많은 것이다.
“시간이 된다면 더 많은 여행을 할 생각이니까 기대해. 그리고 내 가이드 실력도 믿어 봐.”“그래 기대할게. 네 트럼펫 실력의 절반만 돼도 우린 만족할 거야.”
알베르토가 농담스레 대꾸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공연도 좋지만 우린 더 많은 휴식과 즐거움이 필요해. 이번 연주 여행이 우리가 한국을 잘 알 기회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고.”
그 말에 영준이 형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준이 형의 브리핑이 끝나자 수철이 녹음 일정을 얘기했다. 통역은 영준이 형이 담당했다.
“녹음 스케줄은 심플해, 내일 오후부터 시작할 거야. 연습하고 바로 녹음할 생각으로 연습실이 있는 녹음실을 선택했어.”
“굿.”
샘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내일은 악기 녹음만 할 거야. 보컬 녹음은 모레 오전부터 할 거고.”
수철은 제시와 눈을 마주쳤다. 제시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듀싱은 내가 맡을 거고, 믹싱도 나 혼자 할 생각이야. 너희는 트랙에 소스만 넣어 주고 나가서 놀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오케이! 굿! 멋있어, 넌 훌륭한 프로듀서야.”
녹음 일정을 들은 알베르토가 수철을 칭찬했다. 그러면서 질문을 던졌다.
“마스터링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알베르토가 마스터링을 묻는 이유는 녹음과 믹싱은 한국에서 하더라도 마스터링은 영국에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영국과 한국 사람들의 음악을 듣는 귀는 다르다. 한국은 촉촉한 사운드에 익숙하고, 영국은 다소 건조한 사운드에 익숙하다.
두드러지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음반의 색깔을 다듬는 마지막 작업인 마스터링은 영국에서 하는 게 좋다는 뜻이다. 음반을 내는 곳이 영국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철도 그것을 알고 있다.
“마스터링은 당연히 영국에서 해야지. 거기서 음반을 낼 거니까 그쪽 사운드에 맞춰야지.”“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알베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일은 이렇게 진행될 거야. 내가 여기서 믹싱을 마치고 음원을 보내면 거기서 마스터링 하고 다시 나한테 보낼 거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모니터링하고 결정지을 거야.”“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네가 한국에서 모니터링하면서, 영국의 사운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겠어?”“그래서 미리 레퍼런스(reference)를 몇 개 준비해뒀어. 영국에서 히트한 앨범만 뽑아서 말이야.”“내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 수철,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잊고 있었어. 쏘리, 맨.”
알베르토는 멋쩍게 손을 들었다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앨범은 언제쯤 나올 거 같아?”
이번엔 샘이 궁금한 걸 물었다.
“그건 음반사에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음원을 언제까지 만들 건지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시디를 찍고 앨범 자켓을 만드는 부분은 내가 모르거든.”“그러네. 쏘리, 나도 알베르토처럼 어리석은 질문을 했어.”
그 말에 알베르토가 주먹을 내밀어 샘과 부딪쳤다.
이때 영준이 형이 나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 부분은 내가 설명할게, 내가 알기로는 거기서 앨범을 서두르고 있어. 앨범이 많이 팔리는 시즌에 맞추려는 거 같아.”
“그렇겠지.”
영준이 형의 설명에 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준이 형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수철이 빨리 녹음을 마무리 짓길 바라고 있어. 거기서는 너희가 한국에서 공연하는 것은 모르거든. 녹음하고 여행 정도 하는 거라 생각할 거야.”“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서 연주 여행을 하더라도 녹음부터 서둘러야 한다는 말이지?”“맞아, 쉬지 않고 내일 바로 녹음을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야.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앨범 자켓은 몇 가지를 놓고 생각 중인가 봐.”
“몇 가지?”
데이비드가 갸웃하며 되물었다. 자켓이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영준이 형에게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