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접근법
“앨범 제작에서 중요한 부분이 가수 뽑고, 곡 쓰고, 프로듀싱하는 건데, 가수는 선택하면 되고 작곡과 프로듀싱은 넌 뭐 말할 필요가 없고. 네가 배울 건 기획 과정, 진행 순서 그리고 녹음에선 마스터링 정도가 전부야. 나머진 자켓 만들고, 홍보 시디 찍고, 유통사 잡고, 보도 자료 만들고 그런 과정인데, 그건 굳이 네가 다 경험할 필요가 없어.”
“그런가요?”
“그래, 홍보하고 마케팅하는 것은 네가 할 일도 아니고, 그건 전문가들의 영역이야.”
“……그렇군요.”
“기획하는 것과 마스터링은 굳이 앨범 제작을 하지 않아도 내가 경험을 시켜 주면 될 텐데. 특히나 너는 한 번만 하면 바로 알 테니까 말이야.”
박 대표의 생각과 달리 수철은 앨범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다 만들어 보고 싶다.
하나하나 직접 다 관여해서 일관된 색깔로 만들어 보고 싶다.
가사는 물론이고 믹싱과 마스터링. 그리고 앨범 발매까지.
모두 경험해 보고 싶다.
욕심이라기보다 궁금함과 호기심이다.
음악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앨범이 나올 때까지 하나의 색깔로 연결하고 싶다.
처음 생각과 작품의 결과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도 직접 경험해 보고 싶다.
박 대표도 수철의 이런 의도를 알지만, 제작까지 직접 하는 건 과하다고 생각한다.
“난 아직도 네가 앨범 제작까지 알려고 하는 게 납득이 안 가. 하지만…….”
그러면서 박 대표는 수철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수철은 박 대표의 논리적인 설명에도 생각의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박 대표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넌 할거지?”
“네.”
“그렇지. 누가 널 말리겠어.”
“헤헤.”
“알았어. 네가 하겠다면 해야지.”
“감사해요, 쌤.”
“그래, 한 번쯤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경험할 거면 빨리하는 게 좋고.”
수철은 진심으로 박 대표가 고마웠다. 이해가 안 간다고 하면서도 수철의 뜻을 따라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충하지 않고 고민한 흔적이 보여서 더 고맙고, 감사했다.
“앨범은 급할 게 없으니까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짬짬이 진행하자.”
“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프로젝트는 빈약한 부분이 있어.”“빈약한 부분이요?”
“누군가 주체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 사람이 필요해. 너는 제작 과정을 체험해 보는 정도면 되지만 앨범이라는 게 누구에게는 엄청난 프로젝트거든. 넌 습작처럼 쉽게 해 버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이야.”
“…….”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최고의 수혜를 받을 사람을 한 명 끼워 넣는 게 좋을 거 같아.”
이건 수철도 충분히 공감한다.
셋이서 한다면 수철의 심적 부담도 줄어든다.
“그래서 말인데……”
“……?”
“다혜랑 같이하면 어떨까?”
“다혜요?”
“그래, 지금 너보다 이런 프로젝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은 다혜야. 어차피 시작할 거면 둘이 하든, 셋이 하든 큰 상관이 없어. 오히려 셋이 하는 게 좀 더 즐거운 과정이 될 거야.”
박 대표는 접근법을 고민하다가 이번 프로젝트는 수철보다 다혜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같이 진행하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네, 저도 좋아요.”
수철은 흔쾌히 오케이 했다.
“다혜는 작곡가로서 혼자 뚫고 나가는 길을 가야 하니까, 이번 기회에 제작을 경험한다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잊고 있었지만, 다혜도 박 대표가 아끼는 애제자다.
박 대표가 다혜를 생각하는 마음을 알 수 있어서 조금 뭉클했다.
“전 완전 찬성이에요.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수철도 박 대표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철은 제작 과정만 경험해 보면 된다. 그래서 누군가 앨범을 주체적으로 끌고 갈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혜가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박 대표에게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앨범 제작을 같이 하고 싶다고 요청한 것도 건방진데 그런 얘기까지 꺼내는 것은 무례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박 대표가 먼저 얘기를 꺼내 주니 기뻤다.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역시.’
역시 박 대표와는 통하는 게 있다.
“같은 생각을 했다고?”
“네.”
“마음이 통했네?”
“네, 헤헤. 그런데 다혜가 같이할까요?”“하겠지. 너랑 같이하는 거 좋아하잖아. 싫다고 해도 내가 등 떠밀어서라도 하도록 만들어야지. 큰 공부를 할 좋은 기회인데 놓치면 안 되지.”“네, 같이하면 좋겠어요.
“이 앨범은 급할 게 없으니까 장기 프로젝트처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하자. 디테일 하나하나 챙기면서 말이야. 포커스는 다혜에게 맞추고.”“네, 찬성입니다. 스승님. 존경합니다.”“어쭈, 이제야 철이 드는구나?”
“좋으세요?”
“이 녀석이 또?”
“헤헤! 그럼 쌤이 다혜랑 얘기해 보실 거죠?”“그래, 내가 해 볼게. ……그러고 보니 요즘 녀석이 뜸하네? 넌 언제 봤어?”“저도 꽤 됐어요. 요즘 연습실에도 안 나타나고, 음악을 등한시한다는 얘기가 있던데요.”“차 사서 놀러 다닌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어. 그러고 보니 요즘 수업도 빠진다는 말이 들리던데…… 안 되겠다, 이 녀석 당장 소환해야겠다.”
* * *
“드라이브시켜 줄까?”
다혜가 귀걸이를 길게 늘어뜨리고 나타났다.
선글라스를 쓰고 차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이 어릴 적 뉴스에서 봤던 야타족
같았다.
수철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음악은 그만둔 거야?”
느닷없는 물음에 다혜는 선글라스를 내리고 쳐다봤다.
“무슨 말이야? 음악을 왜 그만둬?”“음악 안 하고 맨날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연습실에 안 나온다는 불평도 있고.”“그건 뭐……. 요즘 내가 젊음을 좀 즐기고 있긴 하지. 호호.”“소문이 사실이구나?”“그렇다고 음악을 그만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냥 음악 스트레스를 좀 푸는 중이라고나 할까.”
“음악 스트레스?”
“창작하다 보면 생기는 스트레스 있잖아. 인간의 깊은 고뇌 같은 거.”“인간의 고뇌? 네가? 진짜?”
“…….”
다혜가 인상을 쓰며 째려봤다.
수철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만둬야지.”“아니, 얘가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그렇게 쉽게……. 암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요즘은 잠시 일상 탈출한 거고. 너도 알다시피 내 분위기가 좀 바뀌었잖아.”
씨익 웃으면 등 뒤에 있는 차 지붕을 툭툭 두드렸다.
수철은 귀엽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너도 질풍노도의 시기냐?”“뭔 소리야? 내 나이가 몇인데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어?”
다혜가 눈을 흘겼다.
“왜? 누가 또 질풍노도의 시기래?”―요즘 내가 좀 그래.
갑자기 박 대표가 씨익 웃으며 나타났다.
수철의 작업실 소파에서 뒹굴다 내려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느닷없는 등장에 다혜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쌤!”
박 대표는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다혜. 내가 바로 질풍노도의 쌤이야.”“쌤이 왜 거기서 나와요?”“질풍노도의 시기라서 그래.”
매일 작업실에 와서 소파에 뒹굴며 커피 타 달라고 떼쓰는 박 대표에게 수철은 질풍노도의 시기냐고 물었다. 그래서 박 대표는 틈만 나면 그 말로 장난을 치고 있다.
다혜가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에 꽂으며 물었다.
“쌤이 왜 질풍노도예요?”“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수철이 작업실 소파에 달라붙어 있어.”“그건 질풍노도가 아니라 빈대잖아요.”
“빈대라니, 얘가?”
박 대표가 눈을 흘겼다.
“질풍노도는 밖으로 막 뛰쳐나가고 그런 거 아니에요?”“나도 한 번씩 밖으로 막 뛰쳐나가고 그래.”
“그건 미친…….”
“뭐!”
“아니에요. 죄송해요.”
박 대표가 눈꼬리를 치켜세웠다가 내렸다.
“빈대는 너무 없어 보이잖아. 내가 나름 교수고, 회사 대표고. 흠…… 히트곡은 없지만 그래도 앨범 몇 장 낸 뮤지션인데.”
박 대표는 중얼거리다 장난기가 도는지 갑자기 다혜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근데 너, 남자친구 생겼어?”“네? 갑자기 뭔 소리예요?”“남자 태우고 놀러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아니, 대체 그런 소문은 누가 퍼트리는 거예요?”
다혜가 미간에 찌푸리며 박 대표와 수철을 번갈아 봤다.
“그냥 친구들 몇 번 태워 준 거예요.”
“남자 친구들?”
“헐, 쌤! 그냥 남자 사람 친구들이요. 몇 번 드라이브시켜 줬는데, 녀석들이…….”
“녀석들이 뭐?”
“진짜 드라이브만 하더라고요.”“하하! 뭔가 기대하긴 했다는 얘기네?”“기대라기보다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거 있잖아요? 안전벨트 매 주다가 슬쩍 손도 스치고, 뭐 그런 거요.”
그 말에 박 대표가 크게 웃었다.
“하하! 사춘기냐?”
“쌤, 제가 나이가 몇 갠데 사춘기라뇨.”“몇 갠데? 나보다 많아?”
“쏘리. 쌤.”
“어쭈. 이제 말도 짧아졌네.”
박 대표는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드라이브시켜 줬는데 잘 안 됐다는 말이야?”“경치 좋은 곳에 차 세우면 빨리 가자고 그러질 않나, 분위기 좋은 카페 가자고 하면 네가 살 거냐고 물어보기나 하고. 밥 먹자고 하면 엄마가 동태찌개 만들어 놨다고 먹으러 가야 한다고. 이런 동태 같은 놈들이 그러더라고요.”
“하하!”
“킥킥!”
수철과 박 대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야, 용수철! 너 지금 비웃는 거야?”
“아니야, 미안.”
수철을 째려보다가 다시 박 대표에게 고개를 돌렸다.
“쌤, 저 지금 심각해요. 이러다 트라우마 생기겠어요.”“에이, 천하에 윤다혜가 그깟 일로 트라우마라니? 안 어울려.”
“사실인데…….”
“다 그러면서 연애 고수가 되는 거야.”“연애 고수요? 저를 바람둥이로 보시는 거예요?”“내가 널? 에이, 전혀 아니지.”
박 대표는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암튼 드라이브시켜 준 소득은 없었다는 얘기네.”
“그런 셈이죠.”
“널 택시 기사로 생각했나 보다.”“그건 아니죠. 이렇게 예쁜 택시 기사 본 적……. 암튼 그건 아니죠.”“내릴 때 돈 내지 않았어?”
박 대표는 재밌는지 계속 장난을 걸었다.
결국 다혜가 불끈했다.
“그만하시죠!”
“알았어. 쏘리.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또 무슨 장난을 치시려고?”
다혜가 적대감을 보였다.
“장난 아냐. 그냥 지적 호기심 같은 거야.”
“흠. 뭔데요?”
“네가 드라이브시켜 준 남자 사람 친구 중에, 네게 관심 보인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다혜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없었어요.”
“안타깝네.”
“드라이브시켜 주고 카페에서 커피도 다 사 줬는데, 기껏 야밤에 문자 보내서 ‘너 오늘 좀 이상했어. 불편하고 무서웠어. 우리 앞으로 음악만 열심히 하자.’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절교하려고요.”“뭐? 남자친구 만들려다가 실패해서 절교? 하하하.”
박 대표는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저렇게 웃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다혜가 수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얘기가 저렇게 웃겨?”“저 정도는 아니더라도 웃긴 건 사실이야.”
“흠…….”
다혜는 깔깔거리는 박 대표를 보며, 수철에게 다시 물었다.
“쌤이 공감 능력이 좋은 거야? 아님, 공감 능력이 제로인 거야?”“그런 거랑 상관없이 요즘은 그냥 웃고 싶으면 웃으셔.”“웃고 싶으면 웃으셔?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로 들리네. 외로움에서 오는 우울증 같은 건가?”
다혜와 수철이 소곤대는데 웃음을 멈춘 박 대표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차례가 돌아온 거야?”
“차례요?”
“드라이브 차례 말이야.”“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다혜가 시크하게 대꾸했다.
“의리 없는 녀석. 남자 쫓아다닌다고 스승과 친구는 뒷전이라니.”“그래서 왔잖아요. 수철아, 물소리 들리는 시원한 데 가서 카푸치노나 한잔하자.”“난 안 돼. 레슨 가야 해.”“뭐야? 네가 나보다 더 바쁘네.”
이때 박 대표가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쁜 수철은 놔두고 드라이브는 나랑 하자.”“쌤은 차 있잖아요.”“차 있는데 뭐? 그래서 안 태워 준다는 거야?”“쌤이랑 둘이서 드라이브하기엔 날씨가.”
“날씨가 뭐?”
“너무 좋잖아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아! 소녀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이 화창한 날씨!”
그러다 다시 박 대표에게 고개를 돌려서.
“이런 날씨에 쌤이랑 둘이서 드라이브하기는 그림이 좀…….”
다혜와 같이 날씨가 진짜 화창하다고 느끼던 박 대표가 그 말에 불끈했다.
“이 녀석이 대놓고 차별하네! 젊고 잘생긴 사람은 되고, 나이 많고 외모가 보통인 사람은 안 된다는 거야?”
“쌤.”
“뭐!”
“외모 보통인 거 맞아요?”“아니, 이 녀석이? 너 스승의 은혜도 몰라? 내가 불러 줘? 큰 소리로 동네 사람들 다 들으라고 떠들어 댈까? 제자가 스승을 대놓고 무시한다고?”
박 대표가 괜시리 흥분했다.
“알았어요, 타세요. 은혜 넘치시는 스승님.”“이제야 정신이 돌아왔네.”“네, 어른 공경해야죠. 오늘은 어르신께 봉사할 운명인가 보네요.”
다혜가 정중하게 몸을 숙이며 뒷문을 열었다.
“어르신, 상석에 타시죠?”“싫어. 앞에 탈래.”
* * *
박 대표와 다혜는 헤이리 예술마을의 한 카페에 마주 앉았다.
박 대표는 커피를 마시며 프로젝트에 관해서 설명했다.
다혜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접근법은 바로 이거야. 3인 3색.”
“3인 3색이요?”
“그래 세 명의 작곡가와 세 가지 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