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83화 (83/239)

#83화. 죽은 앨범 살리기(1)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짜고짜 전화해서 ‘쌤, 다혜랑 얘기 잘됐어요?’라고 묻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제작을 배우겠다고 박 대표를 졸라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상황이다.

수철은 전화를 내려놓고 의뢰받은 CM송 편곡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작업실을 나와서 박 대표에게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박 대표는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정말 미치겠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죽겠다며 하소연하는 이 실장을 인상을 찌푸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박 대표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소문은 듣고 있었어.”

이 실장이 이마에 주름을 잡은 채 물었다.

“어떤 소문이요?”

“어떤 소문이겠어? 결과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지.”

박 대표의 말에 이 실장은 머리를 숙이더니 뒤통수를 박박 문질렀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닙니다. 저, 완전히 망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자신의 신세가 처참하다는 얘기를 반복하며 죽고 싶다는 말까지 하자 박 대표는 말문이 막혔다.

말에는 힘이 있다. 빈말이어도 그 말에 담긴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된다. 이 실장의 감정이 전달돼서 박 대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그렇게 고집을 피우더니, 쯧쯧.”

결국, 혀를 찼다.

“대표님,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미치겠습니다.”“그러게 하지 말랬잖아. 인제 와서 그러면 나 보고 어쩌라고? 에이!”

박 대표는 언짢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를 돌리려고 커피포트에 물을 담아서 올리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물이 끓는 동안 박 대표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는데…….’

이 실장은 맨 밑바닥부터 시작해 제작자까지 된 인물이다.

실장 명함을 달고 다니지만 사실은 대표다.

아직 회사가 크지 않아서 실장 명함을 유지할 뿐이다.

이 실장도 나름 후배들에게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올라와 소위 새끼 매니저라 불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단돈 30만 원을 받으며 운전해서 가수들 실어 날랐고, 가죽 가방 하나 옆구리에 차고 스케줄을 따내고, 소화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 결과 센스는 좀 떨어지지만 업계 관계자로부터 성실하다는 인정을 받으며 눈도장을 찍더니, 조금씩 승진해서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

‘참 성실한 녀석이었는데…….’

기획사에서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은 적당히 눈치가 있으면서 시키는 대로 토 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다.

똑똑한 거 별로 안 좋아한다.

말 많은 거 싫어한다.

잔머리 굴리는 거 제일 싫어한다.

그들이 찾는 가장 바람직한 매니저의 덕목은 첫째도, 둘째도 성실이다.

박 대표가 처음 봤을 때 이 실장은 제작 판에 어울리지 않게 풋풋하고 활달했다.

그래서 박 대표도 나름 이뻐하며 챙겨 줬다.

조언도 해 주고, 밥도 사 주고, 처음 앨범을 제작한다고 할 땐 무료로 곡을 써 준 적도 있다.

그만큼 이 실장은 한때 박 대표와 꽤 친했었다.

‘이 바닥에 어울리지 않게 천성이 착한 녀석이었지.’

그렇게 박 대표를 믿고 잘 따르던 이 실장이 어느 순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박 대표가 상종도 하기 싫어하는, 소위 양아치 제작자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부터다.

“기회가 왔을 때 제작 퀄리티를 높여야지. 그래야 오래 롱런하는 거야.”“하! 대표님, 아직도 뭘 모르시네요. 제작은 무조건 인맥입니다. 인맥이 있어야 투자도 받고, 홍보도 하죠. 퀄리티요? 그건 돈만 있으면 생기는 거 아닙니까?”

이 실장은 박 대표의 조언을 무시하며 양아치 제작자들과 함께 인맥 쌓기에 급급했다.

“어리석은 녀석, 실력이 있어야 인맥도 쌓이는 거지…… 쯧쯧.”

이 실장의 삶은 계속 술과 유흥으로 얼룩졌고, 제작은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투자와 인맥.

두 가지만 있으면 무조건 성공한다고 믿었다.

“음악이야 틀어 대면 좋아하게 돼 있지 않습니까? 자꾸 틀어 대는데 유명해지지 않을 곡 있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방송에서 음악 나오게 하는 게 제작자 능력 아닙니까?”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작자 능력은 어떻게 생깁니까? 까놓고 말해서 돈과 인맥이지 않습니까?”

이건 틀린 말이었다.

순서가 거꾸로 됐다.

기획사를 평가하는 관계자들은 냉철하다.

인맥을 만들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인맥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어딘가 허점이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서대로 얘기하면, 제작으로 먼저 신뢰를 쌓고, 그러면 자연스레 인맥이 생기게 되고, 그다음에 돈이 붙는다.

그걸 아는 박 대표가 목소리를 높였다.

“신뢰도 없이 인맥만 있다고 무턱대고 돈을 투자할 바보가 어딨어?”

하지만 이 실장은 박 대표의 조언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대표님, 대박 낸 거 있습니까? 그렇지도 않으면서 뭔 충고를 그렇게 하세요?”

박 대표의 아픈 부위를 후벼 파며 대들었다.

박 대표가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말했을 뿐인데 그렇게 반응했다.

그러다 결국 제작자 세미나에서 천재 프로젝트 운운하며 박 대표와 크게 충돌했다.

그리고 멀어졌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어설픈 인맥 믿고 날뛰더니, 쯧쯧! 투자자들이 바보야? 검증도 없이 돈을 집어넣게?”

어느 날, 정부가 주최하는 모임에 갔다가 이 실장의 소식을 들었다.

투자자들이 투자를 미루며 시간을 끌자 급해진 이 실장은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서 직접 제작을 시작했다.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제작 판에는 변수가 많다.

오전엔 맑아도 오후엔 소나기가 쏟아지고, 새벽에는 천둥 벼락과 우박이 내리는 곳이 제작 판이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른다.

“커피 마실 거지?”

커피 물이 다 끓자 박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네, 주세요.”

“찐하게 타 줘?”

“아무렇게나 주세요.”

아무렇게나.

지금 이 실장의 마음 상태가 딱 그렇다.

궁지에 몰려서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박 대표와 인연을 끊을 거처럼 대들더니, 위기에 처하니까 염치 불문하고 찾아와 하소연하고 있다.

뻔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했다.

‘오죽했으면 날 찾아왔을까.’

머리를 숙이고 멍하니 바닥만 보고 있는 이 실장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없으면?”

“저, 이번 프로젝트로 돈도, 인맥도, 신뢰도 다 잃었습니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입니다. 끝장을 봐야죠.”

“끝장?”

“음악 좀 손봐서 리메이크 앨범으로 다시 밀어 보려고요.”“리메이크? 앨범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10개월 됐습니다.”

“10개월 만에 리메이크 앨범이라…… 파격적이네.”

말은 파격적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발상이었다.

“밀어붙이는 거죠.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궁지에 몰리니까 몸부림을 치는 거였다.

박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도와줄 사람은 있고? 진행비도 없을 거 아니야.”“차 팔고 보증금 빼서 마지막 베팅을 해야죠. 어차피 벼랑 끝에 섰으니까요.”

“허…….”

박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막장까지 가겠다는 말이었다.

“빚도 있다면서?”

“어차피 그 빚 못 갚아요. 그러니까 승부를 보는 거죠.”

아무리 제작 판이 도박판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그 말에 박 대표까지 후달렸다.

“사실은 그래서 제가 대표님을 찾아온 거예요.”

“……?”

“저는 음악을 모르지만 대표님은 음악 전문가시잖아요, 전공도 하셨고요.”

이 실장의 말대로 박 대표는 제작자들 사이에서 음악 전문가로 통한다.

박 대표가 음악을 잘하는 것도 있지만 제작자들 대부분이 무식할 정도로 음악에 대해선 깡통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다수 제작자가 기획사에서 매니저를 하다가 독립해서 제작자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실장은 말을 하다 말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시디였다.

박 대표가 건네받았다.

“이거야?”

“네.”

박 대표는 시디 표지를 앞뒤로 돌려다가 시디를 꺼내서 플레이어에 밀어 넣었다.

“몇 번째가 타이틀이야?”

“두 번째요.”

박 대표는 두 번째 곡을 누르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이 실장은 음악을 듣는 박 대표의 표정을 살피다 툭 내뱉었다.

“다 해서 3천 줬습니다.”

작, 편곡비를 말하는 것이었다.

3천이나 들였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 같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 말에 박 대표가 시디를 돌려 봤다.

시디 뒷면에 눈에 익은 작곡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둑놈들.’

박 대표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작곡가들은 소위 ‘삘’이 오는 곡은 팔지 않는다.

히트 친다는 예감이 확실한 곡은 직접 제작하거나 잘나가는 유명 가수에게 넘긴다.

무명 가수에게 히트 칠 곡을 줄 이유가 없다.

지금 듣고 있는 이런 곡은 잘 만들었지만 히트 칠 확신은 없는 곡이다.

버리긴 애매하고 밀어붙이기에는 확신이 없어 비싼 돈을 받고 파는 것이다.

작곡가의 이름값으로 그만큼 받아먹는 것이다.

“어떠세요?”

음악이 끝나자 이 실장이 다시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음…….”

뭔가 애매한 느낌이었다.

확실하게 그루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멜로디가 감성을 터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구성을 멋있게 해서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공부 잘하는 음악가가 만든 맑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이 실장의 말대로 삘이 좀 약하긴 하네.”

평소 같으면 제작하느라 고생했다고 두드려 주고, 성공하라고 응원해 줘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그렇죠?”

박 대표의 말에 이 실장은 다시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

유명 작곡가에게 사기당했다는 생각에서였다.

피 같은 돈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 돈의 반의반만 줘도 내가 이것보다는 좋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박 대표는 이 상황에서 짓궂은 생각을 했다.

“리메이크는 어떻게 하려고? 방향은 잡았어?”“그걸 여쭤보려고 오늘 대표님을 찾아뵌 겁니다.”

이 실장은 고개를 들며 간절한 눈빛을 보였다.

금방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았다.

“음…….”

박 대표는 잠시 이 실장을 바라봤다.

앨범 망했다고 다짜고짜 찾아와서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모습이 깡패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란 걸 알지만, 철이 없어서 그렇다는 걸 알지만 부담감이 밀려왔다.

“리메이크는 그렇다 치고 홍보는?”“홍보는 도와줄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있어?”

“네, 제가 하도 죽는소리를 하니까 마지못해 도와주겠다는 관계자들이 좀 생겼습니다.”

이 실장이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썩은 미소였다.

“그나마 다행이네.”

박 대표는 이 실장이 나름 전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소리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이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성공했으니 그 방법을 지금 박 대표에게도 써먹고 있는 것 같았다.

“날짜만 정하면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유통사에서 동시다발로 같은 시간에 음원을 틀어 주기로 했습니다.”“그래? 그건 아주 좋은 일이네. 진즉에 그렇게 하지 그랬어?”

박 대표는 이 실장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엔 잘한다는 말만 믿고 맡겨 놨었는데, 알고 보니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서 평이 안 좋더라고요. 제가 직접 했었어야 하는데. 괜히 돈만 쏟아붓고…….”

이 실장은 상처가 깊은지 말끝을 흐렸다.

잠시 감정을 추스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까 대표님의 말씀이 많이 생각나더라고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직접 디테일을 챙기라고 하신 말씀이요.”

진즉에 박 대표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는 후회와 그래서 박 대표를 찾아왔다는 의미가 뒤섞여 있었다.

‘에구…….’

박 대표는 이 실장이 애물단지처럼 느껴졌다.

대들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자신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하지만 도울 부분이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음악적인 부분은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을 보니 밥도 못 챙겨 먹는 것 같았다.

“……밥 안 넘어갑니다.”

그럴 정신이 없다는 얘기다.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이럴수록 건강을 챙겨야지. 제작은 체력이라는 거 몰라?”

“…….”

“리메이크를 하든 음악을 다 갈아엎고 다시 하든.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

“자! 어서 일어나,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그 말에 이 실장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수철이 계단을 내려와 박 대표의 작업실 앞에 다다랐을 때 문이 열려 있었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섰다.

“쌤, 저 왔어요.”

느닷없는 수철의 등장에 박 대표가 이 실장을 끌고 나오다가 멈칫했다.

“어, 수철아.”

살짝 당황하며 수철과 이 실장을 번갈아 봤다.

‘서로 소개해야 하나?’

그럴 상황은 아닌 거 같았다.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전 괜찮아요, 다녀오세요.”“다혜랑 얘기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온 거지?”

“네, 헤헤.”

역시 박 대표는 척 보면 척이다.

“밥 먹고 와서 얘기해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네, 다녀오세요.”

* * *

“누구예요? 아주 잘생겼네요. 배우예요?”

밖으로 나오자 이 실장이 조금 전 본 수철에 관해서 물었다.

“배우는 아니고…….”

박 대표는 물음에 답하다 말고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이 실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잠시만 기다려.”

급하게 등을 돌려 다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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