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죽은 앨범 살리기(2)
탁탁탁.
박 대표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작업실 문을 확 열어젖혔다.
“수철아!”
* * *
수철은 박 대표의 책상에서 피규어 인형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기타리스트 피규어 인형을 집어 신기한 얼굴로 이리저리 돌려봤다.
그때,
―수철아!
나간 지 얼마 안 된 박 대표가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왔다.
숨찬 얼굴로 급하게 이름을 부르자, 수철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쌤. 왜 그러세요?”
박 대표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시디플레이어를 가리켰다.
“거기, 시디 두 번째 곡 틀어 봐.”
수철이 고개를 갸웃하며 시디플레이어의 곡 순서를 확인하고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수철이 다시 박 대표를 봤다.
“이 음악이 왜요?”
“이 음악이 말이야…….”
박 대표는 앨범에 관해 이 실장에게 들었던 얘기들을 수철에게 빠르게 전달했다.
그러면서 이 음악을 들려주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서 이 음악을 리메이크해서 다시 밀어 보려고 하는 거야.”“네,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수철은 남의 일 말하듯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곡이 죽은 느낌인데 뭐가 문젠지 모르고 있거든?”
“그렇군요.”
“그래서 네가 자세히 한번 들어 보고 뭐가 문젠지, 리메이크 방향은 어떻게 잡는 게 좋을지 코멘트 좀 해 주면 좋겠는데.”
“네, 그럴게요.”
수철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박 대표는 수철의 그런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실장의 무거운 분위기와 시큰둥한 수철의 이런 모습이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머리를 싸매고 죽을 듯이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는데, 누군가는 그냥 쉽게 툭 해도 될 정도로 별일 아니라는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신이 불공평하다고 얘기하는 거지.’
박 대표가 피식 웃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철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
“……?”
박 대표가 껌뻑거리자 수철도 같이 껌뻑거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식사하러 안 가세요?”
그 말에 박 대표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이 실장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깜빡했다.
“금방 먹고 올게.”
말을 하고 나가려다가 다시 멈춰 섰다.
이 실장 때문에 박 대표까지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
“다혜는 같이하기로 했어!”
“와! 잘됐네요!”
이제야 수철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열심히 하기로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네.”
“그리고 앨범은 다혜 중심으로 스케줄이 돌아갈 거야.”
“네, 좋아요.”
“그리고 이건…….”
박 대표는 돌아서서 책상 한편에 있는 A4 용지 뭉치를 집어서 수철에게 건넸다.
“프로젝트 기획안이야.”“빨리 만드셨네요?”
“너 닮아 가나 보지.”
“네?”
“하하, 이게 내 일 아니냐? 원래 초안은 빨리 만들고 상의하면서 계속 수정하는 거야.”
“아, 네.”
수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 대표가 급하게 몸을 틀었다.
“음악 들어 보고 있어! 금방 밥만 먹고 올게!”
“네, 다녀오세요.”
* * *
작업실을 나온 박 대표는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 실장,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이 실장은 아까와 달리 표정이 바뀌어서 돌아온 박 대표를 훑어봤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뛰어다니세요?”“별거 아니야, 뭘 좀 깜빡해서. 자, 어서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박 대표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르게 밝아져 있었다.
* * *
박 대표가 나가고 나자 수철은 기획안 초안을 유심히 읽어 봤다.
읽을수록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쌤은…….’
새삼 박 대표가 유능한 제작자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대단하셔.’
제작 배우겠다고 우긴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표에게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그건 곧 되갚아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 프로젝트의 전개가 기대됐다.
툭.
수철은 기획안을 내려놓고 아까 만지작거리던 피규어 인형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오똑 솟은 기타리스트의 코를 툭툭 치다가 박 대표가 말한 음악을 다시 틀었다.
“음……?”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음악을 듣던 수철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악을 정지시키고 인형을 내려놓았다.
잠시 작업실 안을 서성였다.
그러다 자리에 앉아서 헤드폰을 쓰고 다시 음악을 틀었다.
톡. 톡.
음악을 들으며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음악이 끝나자 헤드폰을 벗어 놓고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에 깔려 있는 작곡 프로그램을 열어서 빠르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탁탁탁. 탁탁탁탁.
* * *
금방 밥만 먹고 오겠다고 한 말을 잊었는지, 식사하는 동안 박 대표의 말이 길어졌다.
이 실장의 푸념이 식사 자리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에이, 밥맛 안 나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 같으면 이렇게 괴로워할 시간에 밥 먹고 힘내서 열심히 뛰어다니겠다.’
그런 생각에 박 대표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10개월이나 밀어서 안 되면 포기해야 하는 거 아냐?”
도와줄 생각이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서 따끔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이 실장의 푸념을 멈추고 싶었다.
“그동안 공들인 게 아까워서…….”
이 실장이 말끝을 흐렸다.
“아니, 무슨 초보 같은 말을!”
박 대표는 짬밥에 어울리지 않게 초보 같은 말을 하는 이 실장을 노려봤다.
하지만 박 대표도 알고 있다.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노련한 제작자들은 미리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는다.
안 될 앨범들은 빠르게 손절하는 게 그 방법의 하나다.
“지난 앨범 잡고 있는 게 죽은 새끼 끌고 다니는 어미 고래랑 비슷하다는 말 알아?”
“그게 무슨?”
“자신의 새끼가 죽은지도 모르고 등에 업고 다니는 어미 고래 같다는 말이야. 죽은 앨범 잡고 있는 제작자가 말이야.”
“…….”
“10개월 밀어서 안 됐으면 아프더라도 접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게 맞지. 이미 죽은 새끼 품고 있으면 뭐 하냐? 마음만 아프지.”“아시잖아요, 저한테 다음 기회라는 건 없다는 걸요.”
“…….”
이 실장의 솔직한 고백에 박 대표는 말문이 막혔다.
“대표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지만 더 이상 목돈도 없고, 시드머니도 없어요. 이거 안되면 저 정말 낙향해야 해요. 그리고 노래하는 애가 너무 착하고 열심히 해서……”“아주 초보 같은 얘기만 늘어놓는구먼, 에휴…….”
이 실장의 상황을 알면서도 박 대표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봐도 이 실장은 이 바닥에 어울리는 체질이 아니다.
박 대표처럼 음악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정하게 맺고 끊고를 잘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정이 많아서 우유부단할 때도 많다.
“저도 저지만 가수 녀석이 불쌍해 죽겠어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내 옆에 붙어 있다가 같이 망하게 돼서…….”
‘에휴, 혼자서 약아빠진 척은 다 하고 다니더니. 쯧쯧.’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여기서라도 손절하고 이 바닥을 떠나는 게 최선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가수를 생각하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 이 실장을 보면 입이 안 떨어진다.
리메이크 앨범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시골엔 누가 있어?”“어머니 혼자 계세요.”“네가 외동아들이야?”
“……네.”
“아이고…….”
박 대표는 갑자기 어머니가 떠올라 괜히 울컥할 뻔했다.
“인제 그만 얘기하고 어서 먹어.”
박 대표는 찌개를 한 그릇 떠서 건넸다.
“……대표님, 죄송해요.”
찌개를 한 수저 떠먹은 이 실장이 박 대표를 바라봤다.
“뭐가?”
“지난번에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대들었던 거요. 그때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그런 건 인제 그만 잊어버리고, 어서 먹어!”
박 대표는 반찬들을 이 실장 쪽으로 밀어 놓았다.
* * *
수철은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알아챘다.
보컬의 소리가 약해서 의도적으로 배경음악을 화려하게 했다는 것을.
그래서 고개를 갸웃했다.
수철의 생각은 반대였기 때문이다.
수줍은 듯한 보컬의 여린 소리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부분을 부각시킨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가사도 보이스의 감성과 잘 맞아떨어진다.
“음.”
보컬의 멜로디 라인을 손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보다 문제는 배경음악이었다.
배경음악에서 프로듀서의 불안함이 엿보였다.
불안함은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렷이 마주 봐서 그 실체를 깨달아야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불안함이 비로소 사라진다.
‘사운드를 쌓아서 역반응이 나온 거네. 많이 걷어 내야 하겠는걸.’
여린 보컬을 악기의 화려함으로 받치려는 의도인 것 같지만 역으로 묻어 버리고 있었다. 공간을 만들고 공명을 만들어서 파묻힌 보컬을 툭 튀어나오게 하는 것이 첫 번째 해결책이었다.
콤플렉스를 덮지 않고 장점으로 살리겠다는 뜻이다.
자꾸 덮기 시작하면 보컬은 주체성을 잃게 되고, 결국엔 트라우마가 생긴다.
보컬이 열심히 부르면서도 힘없게 느껴지는 걸 보면 이미 그런 압박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우선은.’
수철은 우선 음악을 그대로 카피해서 작곡 프로그램에 똑같이 복사본을 만들었다.
숙련된 전문가라도 한나절은 걸릴 일을 수철은 1시간도 안 돼서 뚝딱 해치웠다.
그러고 나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부터 걷어 냈다.
‘이거 뭐야? 연주자 맞아? 보컬과 베이스가 겹치잖아? 이 파트는 중복 음이 너무 많아.’
수철은 중얼거리며 중복 음이 많은 부분의 음표를 걷어 냈다.
‘이 파트는 리듬이 시선을 뺏어가면 안 되지.’
노래 파트에 현란한 드럼과 타악기도 가차 없이 걷어 냈다.
‘오케이, 이제 보컬 밸런스를 키우고 리버브를 넣으면…….’
이제야 노래가 좀 들리기 시작했다.
걷어 내기만 했는데도 음악이 많이 좋아졌다.
‘이제 시작해 볼까.’
수철은 수술 장갑을 손에 꼈다.
본격적으로 음악 수술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박 대표가 말한, 죽은 곡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다.
‘인공호흡부터 해야겠지?’
장비를 만져서 공간감을 조성했다.
그러니까 숨이 멈춰서 누워 있던 보컬이 번쩍 눈을 떴다.
수철이 보컬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이.’
수철을 모르는 사람이 이런 모습을 봤다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천재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
소리를 보기 때문이다.
수철도 예외가 아니다.
‘바본가? 괜히 멋 부려서 연결 고리가 틀어졌잖아? 에이, 그냥 다 빼자!’
수철은 계속해서 수술을 이어 갔다.
결국, 보컬만 놔두고 대부분의 악기를 걷어 냈다.
그게 빠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똑딱. 똑딱.
메트로놈에 맞춰 건반으로 베이스를 다시 녹음했다.
그리고 톤을 바꿔 오르간으로 리듬을 녹음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만 하던 드럼은 아예 다 빼 버렸다.
중간중간 보컬의 호흡이 끝나는 부분에는 바이올린으로 부드러운 선율을 집어넣어서 음악이 잘 연결되어 넘어가게 만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음악은 아까와 전혀 다른 곡이 되어 있었다.
보컬의 입체감이 뿜뿜하고 있었다.
음악이 눈을 떠서 자신을 수술하는 수철을 보며 방긋 웃는 것 같았다.
* * *
“다른 사람들은 뭐래?”
박 대표와 이 실장은 식사를 마치고 작업실로 향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누구요?”“같이 어울려 다니던 사람들 있잖아.”“……아무 말 못 들었습니다.”“BM엔터 김 대표랑, 투웨이의 민 차장도?”“네, 모두 등 돌렸습니다.”
“이런…….”
먹을 게 없어지니까 바로 관계를 끊은 거다.
‘비열한 자식들.’
박 대표가 이렇게 기가 찬데 이 실장의 마음은 오죽하랴.
투자를 받아 오고 잘나갈 때는 삼총사처럼 붙어 다니며 빨아먹더니.
‘더러운 놈들.’
마음 같아서는 그놈들뿐만 아니라 막냇동생 같은 이 실장도 정신 차리라고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다.
터벅터벅.
박 대표는 욱하는 기분을 느끼며 이 실장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작업실 밖으로 익숙한 음악이 새어 나왔다.
이 실장이 가져온 바로 그 음악이었다.
순간 둘은 멈춰 섰다.
그런데.
“……헉!”
음악이 완전 바뀌어 있었다.
보컬만 남아 있었다.
분위기는 완전히 다른 곡이었다.
박 대표는 이 실장을 돌아봤다.
이 실장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안이 벙벙해서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둘은 놀란 얼굴로 서로 마주 봤다.
쓰윽.
박 대표가 조용히 작업실 문을 열었다.
수철은 계속해서 음악 수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박 대표와 이 실장은 작업실 입구 벽에 붙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