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85화 (85/239)

#85화. 죽은 앨범 살리기(3)

박 대표와 이 실장은 벽에 붙어서 수철의 작업을 잠시 감상했다.

그러다 박 대표가 시계를 들여다봤다.

‘고작 1시간 좀 넘었는데…….’

수철은 그새 음악 분위기를 전부 바꿔 놓았다. 너무 많아서 난잡하던 사운드는 다 사라지고 보컬과 오르간, 콘트라베이스와 중간중간 바이올린 소리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아까와 달리 보컬이 살아 있었다.

공간감이 살아서 소리의 공명이 두드러져 있었다.

‘이제야 보컬 앨범 같네.’

박 대표는 수철의 의도를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수철은 오르간의 벨로시티(Velocity, 건반을 누르는 속도)를 한 번 더 매만졌다.

그리고 다시 들어 보려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뭐지?’

어디선가 미세하게 숨소리가 들렸다.

입구 복도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박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쌤, 거기서 뭐 하세요?”“어, 막 들어오는 길이야.”

눈이 마주치자 벽에서 몸을 세워 걸어 들어왔다.

“그런데 음악이 많이 바뀌었네?”

박 대표는 쿵쾅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조금 분위기만 잡아 봤어요.”

그 말에 박 대표의 뒤에 있던 이 실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동안 자신이 그렇게 떠들던 천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거 한 잔씩 마시면서 얘기하자.”

박 대표가 음료수를 컵에 담아 내놓자 모두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참, 아까 인사 못 했지? 여기는 지금 이 앨범을 제작한 제작자야.”

박 대표는 먼저 수철에게 이 실장을 소개했다.

그러자 수철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용수철입니다.

수철을 보는 이 실장은 줄곧 상기되어 있었다.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입술 끝이 떨리고 있었다.

“저는……. 이 실장이라고 해요. 이름은 이민식이고요. 진짜 천재를 여기서 만나네요.”

“네?”

그 말에 수철이 멈칫했다.

그러자 박 대표가 이 실장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리고 말을 돌렸다.

“음악을 이렇게 바꾼 이유가 있어?”

놀랍다니, 빠르다니 하는 말은 다 생략했다.

둘의 대화에서 그런 말은 이제 필요가 없다.

“음악이 주제가 없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 걷어 내고 주인공을 살려 봤어요.”

이 실장은 돈을 많이 들여서 최고의 세션맨들에게 반주를 부탁했다.

제작하는 사람으로선 당연한 선택이다.

돈 아끼다 앨범 망쳤다는 얘기를 들을 순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돈을 때려 박아서라도 앨범을 잘 만들고 싶은 게 제작자의 심정이자 속성이다.

그리고 제작자는 그걸로 능력을 평가받는다.

문제는 다들 잘난 뮤지션들이다 보니까 음악은 화려한데 중구난방 느낌이 있었다.

자기 앨범도 아니니 돈을 받은 만큼 깔끔하게만 연주해 주면 그만인 세션맨들이다.

반주가 이런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랬구나.”

수철의 말에 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박 대표의 귀에 음악이 그렇게 들렸다.

재주 부리는 반주를 다 걷어 내고 보컬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니까 공간감이 살아서 보컬의 소리가 마치 라이브 무대를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건 제가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원래 있었는데 악기에 묻혀 있었던 부분이에요.”

“그렇군.”

대답하는 박 대표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지나갔다.

자신은 음악을 들었을 때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수철의 말을 들으니 모두 이해가 된다.

이것이 차이다.

들으면 바로 알고, 들어도 한참 후에야 깨닫고.

“믹싱을 왜 이렇게 했을까요?”

수철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당연히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이것은 엔지니어의 문제가 아니다.

악기와 보컬 트랙 간의 작은 밸런스 차이가 듣는 사람의 반응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모르는 엔지니어는 없을 것이다.

“씨발, 돈 많이 들였는데…….”

그때 이 실장의 입에서 또다시 한탄이 새어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돈을 많이 들여서 믹싱과 마스터링을 최고의 녹음실에서 했다는 뜻이었다.

수철은 의아해하고 이 실장은 한탄하지만 분명 엔지니어들은 보컬의 입체감에 신경을 많이 썼을 거다.

‘문제는 엔지니어의 믹싱이 아니라 프로듀서의 의도였겠지.’

이 부분이 음악가와 제작자가 차이 나는 부분이다.

음악가는 모르지만 제작자는 쉽게 알 수 있다.

‘음악을 잘 모르는 이 실장은 분명 명성 있는 프로듀서를 섭외했을 테고, 그 프로듀서는 앨범의 흥행은 뒤로하고 자신의 명성을 쌓는 데 집중했겠지.’

음악을 들어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보컬의 입체감보다 음악의 화려함에 힘이 실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수철은 그게 거슬려서 악기를 모두 걷어 낸 것이다.

‘양아치 새끼.’

이 실장을 만만히 보고 가지고 놀았을 프로듀서의 얼굴이 떠올라 박 대표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분노와 함께 음악가들에게 당했을 이 실장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박 대표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실장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박 대표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수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고했어. 음악은 이렇게 가는 게 좋겠어. 보컬을 잘 살리고, 악기 녹음은 다시 하는 거로 해서.”

그런데 수철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두 가지 버전으로 가는 건 어때요?”

“두 가지?”

박 대표와 이 실장의 시선이 동시에 수철에게 꽂혔다.

“보컬을 살리느라 이렇게 만들어 봤지만, 제 생각엔 다르게 하면 사람들이 훨씬 더 좋아할 거 같아요.”

그 말에 이 실장의 눈이 번쩍 띄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숨죽이고 수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떻게 다르게 한다는 거야? 아이디어가 있어?”

박 대표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한번 만들어 볼까요?”

“지금?”

“네.”

“시간 괜찮아?”

“두 시간 정도는 괜찮아요.”

두 시간 안에 편곡을 마치겠다는 얘기였다.

악기 녹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음…….’

박 대표는 알고 있다.

이미 수철의 머릿속엔 음악이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음악 구성이 다 되어 있고 악기의 움직임까지 다 그려져 있을 것이다.

수철은 머릿속의 그것을 보고 베끼는 작업만 하면 된다.

그걸 모르는 이 실장은 처음 보는 광경에 눈알이 빙빙 돌 지경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자신의 죽은 앨범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된 얼굴로 숨죽이고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이때 박 대표가 이 실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생각에도 리메이크할 거면 두 가지 버전으로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새로운 앨범의 느낌도 나고 말이야. 외국에선 두 가지 버전으로 싱글 앨범도 자주 내잖아. 아무래도 지난 앨범과 차이를 주는 게 좋지. 그래야 홍보해 주는 사람도 마음도 편하고.”“전 무조건 대표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이 실장은 눈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이제 믿을 사람은 박 대표밖에 없다.

정확히는 수철이밖에 없다.

“해 볼까요?”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수철이 물었다.

“그래, 부탁할게.”

“네.”

수철이 다시 작업하려고 등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느닷없이 이 실장이 뒤에서 소리쳤다.

그 말에 수철이 등을 돌리며 박 대표를 쳐다봤다.

박 대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실장의 마음이 급한 상황이니까 이해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박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실장,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자.”

이 실장을 잡아끌었다.

수철의 작업을 방해하지 말고 나가자는 뜻이었다.

이 실장은 머뭇머뭇 박 대표를 따라나섰다.

* * *

“대표님,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그리고 저 용수철이라는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박 대표 담배에 불을 붙여 주던 이 실장이 물었다.

박 대표는 연기를 훅 한번 내뿜고는 쳐다봤다.

“정확히 뭐가 궁금한데?”“저 사람, 천재 맞죠?”

“맞아.”

이 실장이 흥분해서 묻자 박 대표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와! 저런 외모에 음악 천재라니, 그런데 어떻게?”“어떻게 A급 엔터에 안 있고 여기 있냐고?”

“네.”

“이 실장은 스카우트하는 사람이 오디션 프로그램도 안 봤어?”“오디션이요……?”

박 대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오디션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눈을 크게 떴다.

“헉! 그 용수철이 이 용수철?”

손가락을 들어서 작업실 쪽을 가리켰다.

이 실장의 놀란 표정을 보던 박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

“나 참, 그렇게 눈썰미가 없어서 어떻게 제작을 하겠다고…….”“와, 대박! 그런데 어떻게?”“어떻게 나랑 친하냐고?”

“네.”

“원래 친했어.”

“아니, 대표님은 천재랑 친하시면서 어떻게 내가 천재 프로젝트를 할 때…… 흡!”

이 실장은 흥분해서 쓸데없는 말까지 튀어나오자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박 대표가 그런 이 실장을 노려봤다.

“내가 하지 말라고 얼마나 말렸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대들더니.”“죄송합니다, 대표님.”

이 실장이 코에서 담배 연기를 뿜으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 * *

박 대표와 이 실장이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을 때 수철은 그 짧은 시간에 벌써 타악기를 끝내 놓고 있었다.

‘와―!’

이 실장의 입이 또다시 벌어졌다.

아무래도 계속 감탄하다가는 탈진이 올 거 같았다.

박 대표도 그걸 알기에 피식 웃으며 이 실장의 등을 툭 쳤다.

빰빠빠밤!

둥두두둥! 두둥!

두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음악이 변해 가는 모습을 박 대표와 이 실장은 숨죽이고 지켜봤다.

땅을 파고 골조를 세우고 콘크리트를 붓고.

수철은 마지 집을 짓듯이 음악을 하나하나 쌓아 나갔다.

그냥 집이 아니라 알프스산맥 언덕에 있는 하얗고 파란 집이었다.

“음…….”

박 대표는 수철이 마스터 건반으로 하나씩 악기를 더해 갈 때마다 눈을 반짝였고, 이 실장은 입맛을 다시다가 개 거품을 물다가를 반복했다.

이 실장의 눈에는 이건 음악 작업이 아니었다.

마술이었다.

지금 상황이 현실 같지 않아서 수철이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한번 들어 보실래요?”

어느새 편곡을 마무리 지은 수철이 뒤돌아봤다.

그리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웅, 우웅―

탁탁. 타다닥.

코즈믹하게 무언가를 긁는 듯한 굵은 디지털 사운드의 인트로와 함께 캐스터네츠의 리듬으로 음악이 시작됐다. 그리고 곧이어 드럼이 따라붙었다.

쿵! 칙. 팍! 칙.

박 대표는 리듬을 느끼면서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이 실장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음악을 들었다.

음악이 주는 다채로운 꿈틀거림에 이 실장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담백한 고소함.

수철이 음악에 새롭게 입힌 옷은 담백한 고소함이었다.

굳이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랬다.

독자들이 이 음악을 맛본다면 첫맛은 담백하고 끝 맛은 고소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 맛이 혀끝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어떠세요?”

음악이 끝나자 수철이 박 대표에게 물었다.

박 대표는 빙그레 웃으며 느낌을 말했다.

“잘난 척하던 재수 없던 녀석이 진짜로 멋진 녀석이 된 거 같아.”

“네? 하하!”

박 대표의 비유에 수철이 웃음을 보였다.

박 대표의 말대로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골칫덩어리였던 음악이 어느새 날개를 펄럭이며 바람을 타고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실장이 듣기엔 어때?”

박 대표가 미소를 머금은 채 이 실장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그런데 이 실장이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이 실장이 흥분한 얼굴로 박 대표를 쳐다봤다.

“대표님!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느닷없는 돌출 행동에 박 대표도 멀뚱히 쳐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어딜?”

“급하게 전화할 데가 있어서요!”

이 실장은 말을 하자마자 서둘러 작업실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 * *

작업실을 나온 이 실장은 계단을 뛰어올랐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양손을 옆구리에 대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모습이었다.

“햐―!”

그러다 참았던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떻게 악기를 한번 눌러 보지도 않고 그냥 막 찍어 나가는데 저런 음악이 만들어져? 미친 거 아냐?”

이 실장의 눈에는 경이로움을 넘어서 두렵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들어 보지도 않고 막 찍는데 악기의 밸런스까지 잡혀 있으니, 개거품을 무는 건 당연했다.

“천재야, 천재 맞아, 진짜 천재야.”

이 실장은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급하게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우야!”

―네. 실장님.

“이제 우리 됐어!”

―네? 뭐가요?

“이제 우리 음악 먹힐 거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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