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천년고도
“하하!”
수철이 웃으며 멤버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동안 멤버들이 어디를 다녔는지 알 것 같았다.
“요즘 한국말 몇 마디 배워서 써먹는 데에 재미를 붙였어.”
영준이 형이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멤버들을 바라봤다.
“덕분에 내가 팔자에도 없는 한국어 선생까지 하고 있다니까? 하하!”
“하하!”
그 말에 수철도 따라서 웃었다.
멤버들이 영준이 형을 귀찮게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제 출발할까?”
“네.”
“Let’s Go!”
모두 대형 렌터카에 몸을 실었다.
* * *
서울을 벗어나자 수철은 창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서울을 벗어나니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수철의 머리가 날렸다.
‘천년고도라고 들었는데.’
경주는 수철도 처음 가 보는 곳이다.
어떤 모습일지 기대됐다.
그런 곳에서 멤버들과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업됐다.
바람까지 상쾌했다.
먼 곳의 경치를 바라보는 수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 팬 생겨써요.”
알베르토가 앞 좌석에 몸을 붙이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샘도 따라서 몸을 붙였다.
“마자요. 이메일 알려 줘써효.”“와, 진짜? 축하해!”
수철이 둘을 향해 엄지를 세우고 손뼉을 부딪쳤다.
영준이 형이 빙그레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학교에서 공연하면서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이 생겼어.”
“와, 잘됐네요.”
“그래, 벌써 시디도 꽤 팔았어.”“하하, 오랜만에 굿 뉴스가 많네요.”“그렇지! 이메일도 알려 주고 사진도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공연이 너무 많다고 걱정하던 처음 우려와 달리 말이야.”“다행이네요. 듣기만 해도 제가 기분이 좋아져요.”
수철은 멤버들이 한국까지 왔는데 같이 공연하며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 주는 영준이 형이 고마웠다.
“한국이 마음에 든다고 더 있겠다는 얘기가 벌써 나온다니까.”
“그 정도예요?”
“그래, 알베르토는 아예 여기서 살고 싶대.”“하하. 그래서 한국말 열심히 배우는 거군요?”
“그런가? 하하.”
수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외국보다 한국의 관객들이 더 열정적이어서 멤버들이 좋아할 것을.
모두 한국을 좋아한다는 말에 수철의 기분이 마냥 좋아졌다.
경주로 가는 내내 멤버들은 짧은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그동안 공연하며 재밌었던 에피소드를 떠들어 댔다.
수철도 맞장구치며 리액션을 했다.
물끄러미 옆에서 보던 영준이 형이 툭 말했다.
“수철이 너, 영어가 좀 는 거 같네?”
“헤헤. 아니에요.”
“공부해?”
“조금요. 시간 날 때마다 형이 추천해 준 영상 보면서 조금씩 하고 있어요.”“그래,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말문이 트일 거야. 선생 필요하면 말해, 내가 소개해 줄게.”
“네.”
* * *
천년 고도.
수철이 처음 접한 경주는 말 그대로 딱 그런 곳이었다.
곳곳에 문화재와 유적들이 눈에 띄었고, 낮은 건물 사이로 잔디에 쌓인 무덤도 보였다.
바로 영준이 형의 설명이 시작됐다.
“저기 보이는 것이 천마총이라는 건데, 세계 문화유산이고, 삼국시대 신라 시기에…….”
수철은 영준이 형의 해박한 지식에 새삼 감탄했다.
멤버들도 설명을 들으며 신기한 눈으로 천마총을 바라봤다.
“수철이 너, 수학여행 때 경주 안 와봤어?”“네, 전 수학여행 안 갔어요.”“그렇구나. 사실은 나도 수학여행은 못 갔어.”“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내가 역사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예전에 여기에 공연 왔을 때 설명을 좀 들었었어. 이번에 멤버들 알려 주려고 인터넷도 좀 뒤져 봤고. 하하.”
역시 준비성이 좋은 영준이 형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경주 시내는 도시와 다르게 한적해 보였다.
기와집이 보였고 건물들도 낮았다.
거리도 조용했다.
영준이 형은 땅을 깊게 파는 게 법으로 금지되어서 건물이 다 낮은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여유롭고 한가하게 느껴졌다.
“와!”
시내를 가로질러 도착한 숙소는 아까와는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외국의 휴양지에서나 있을 법한 건물들이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멤버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때?”
영준이 형이 어깨를 붙이며 물었다.
“이런 곳이 있는지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정말 멋있네요.”“크하하, 내가 돈 좀 썼지.”
보문단지라 불리는 이곳은 관광리조트였다.
한쪽에는 오래된 유적지가, 또 다른 쪽에는 거대한 리조트가.
한 도시에 전혀 다른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와, 저기 호수도 있어!”
샘이 손가락을 뻗었다.
모두 입을 벌린 채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조트 뒤로 거대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한동안 호수를 구경하다가 숙소로 발을 돌렸다.
“와, 죽인다.”
숙소는 말 그대로 럭셔리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알베르토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침대로 점프했다.
샘과 데이비드도 따라서 점프하며 침대를 하나씩 차지했다.
제시는 창문을 열고 야외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제시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영준이 형은 멤버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불고기 좋아하지? 많이 먹어.”
첫날은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다가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맥주 몇 잔에 모두 곯아떨어졌다.
장거리 여행의 피로 탓이었다.
* * *
“여기가 내가 경주 올 때마다 들르는 맛집이야.”
아침부터 영준이 형이 자기가 좋아하는 맛집으로 멤버들을 이끌었다.
맴버들은 처음 보는 기와집을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문턱을 넘어갔다.
아직 앉아서 식사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멤버들이지만, 불평 없이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최고야!”
데이비드가 엄지를 세웠다.
한국 음식은 먹을 때마다 인생의 베스트 음식이 된다며, 다음 음식이 기대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다른 멤버들도 데비이드의 말에 동의했다.
수철은 나중에 한우를 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우를 먹을 때 멤버들의 모습이 기대됐다.
“여기 불국사는…….”
아침을 먹고 나서 영준이 형의 역사 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영준이 형은 이곳저곳 오래된 유적지를 안내하며 세심하게 가이드를 했다.
멤버들은 처음 보는 신기한 문화재에 눈을 반짝였고, 수철도 모르는 사실을 아는 것이 흥미로웠다.
* * *
유적지 탐방을 마치고 해가 지기 시작하자 저녁을 먹고 오래된 호프집에 모두 모여 앉았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다.
빡빡한 공연 일정 탓에 경주에서 고작 이틀밖에 보낼 수 없다.
“치얼스.”
“건배.”
“짠.”
멤버들은 아쉬워하며 맥주잔을 부딪쳤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던 영준이 형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참.”
“……?”
“수철이 너, 저작권 등록해야 하는데.”“저작권이요? 마스터링 나오면 하면 되죠.”
“어디서 하려고?”
“저작권 협회요.”
당연한 얘기를 왜 묻는지.
수철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아냐, 한국에서 하면 안 돼.”“안 돼요? 그럼 어디서 해요?”“내가 미리 얘기했어야 하는데 깜빡했어. 나도 처음에 유럽에서 앨범 낼 때 몰라서 헷갈렸던 부분인데, 이번에 발매되는 3곡은 영국에서 해야 해.”
수철은 잘 이해가 안 됐다.
작곡자가 한국 사람인데 왜 영국에다 등록해야 하는지.
“여기서도 하고 영국에서도 하면 되지 않아요?”“저작권은 중복 등록이 안 돼. 여기서 저작권 등록하면 영국에서 할 수가 없어.”“아……. 왜 음반사에서 알려 주지 않았을까요?”“하하. 음반사에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는 않지. 그건 작곡가가 알아서 해야 할 부분이야.”
“그렇군요.”
수철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영준이 형이 말해 주지 않았으면 낭패를 볼 뻔했다.
음악이 나오면 자동 등록이 되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봐. 만약 네가 한국에서 등록한다면 한국에서 다 관리를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해. 한국에서 외국의 돌아가는 상황을 다 알 수가 없잖아. 그래서 저작권은 영국에서 등록하고 거기서 관리하는 게 낫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네, 알겠어요. 그럼 전 어떻게 하면 되죠? 영국 음반사에 문의해 볼까요?”“그럴 필요는 없고 내가 도와줄게. 네가 에이전시가 있으면 알아서 해 주겠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잖아. 그러니까 영국에 내가 아는 분을 한 명 소개해 줄게.”“아는 분이라면 어떤?”“브라이언 김이라고 교포 2세야. 직업은 변호사고, 저작권 관련해서 한국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있어. 내 음반에 관한 저작권이나 법률적인 문제도 이분이 다 관리해 주거든.”“아, 그런 분이 계시군요. 그럼 저도 형이 알려 주시는 대로 따라서 할게요.”“그래, 그럼 이분에게 네 전화번호를 알려 줄 테니까 전화 오면 통화해 봐. 한국말도 잘하시니까 어려움이 없을 거야.”“네, 감사해요. 그런데 형.”
“응.”
“제시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작사는 제시가 다 했잖아요.”“제시는 걱정 마. 알아서 잘할 테니까.”
영준이 형은 말을 멈추고 제시에게 저작권 등록에 관해 물었다.
제시는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철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걱정 마, 수철. 아직 시간이 충분해. 음반이 출시되기 전까지만 하면 돼.”“땡큐, 알려 줘서 고마워.”
모두가 알고 있었는데 수철만 모르고 있었다.
이래서 회사가 필요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틀간의 일상 탈출을 마치고 모두 서울로 돌아왔다.
수철은 아쉬워하는 멤버들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멤버들은 다음 공연 일정을 위해 숙소로, 수철은 작업실로 돌아왔다.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이메일부터 확인했다.
영준이 형의 말대로 영국 음반사에서 이메일이 와 있었다.
“사운드 파이?’
이메일에는 영국 유명 마스터링 업체의 URL과 접속 아이디,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수철은 URL을 클릭하고 사이트로 들어가서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했다.
‘KAE Sound Mirror. Mastering Final Version’이라는 폴더가 보였다.
‘KAE Sound Mirror’는 음반사에서 팀 이름을 물어서 멤버들과 급하게 정한 이름이었다.
‘KAE’는 한국, 호주, 영국의 첫 자를 따서 붙인 거고, ‘Sound Mirror’는 매혹적인 소리가 우리에게 반사되어 당신에게로 간다는 추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제시가 정했다.
‘그럼 한번 들어 볼까.’
수철은 음원을 다운받고 헤드폰을 썼다.
세심하게 듣기에는 헤드폰이 좋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 * *
―여보세요.
“형, 마스터링 보낸 거 들어 보셨어요?”―그래, 방금 들었어.
“어떠세요?”
―좋았어. 나한테는 익숙한 사운드야.
수철은 마스터링 최종본을 듣고 나서 바로 영준이 형에게 보냈다.
영국에서 자주 마스터링을 해 본 영준이 형의 평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네가 듣기에는 어땠어?
“전 좀 웃겼어요.”
―웃겨? 아니, 왜?
“영국인들이 선호하는 사운드와 영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스타일이 비슷해서요.”―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도 첨에 그랬어. 한국인들의 정서에 비해 영국인들이 좀 건조하지. 그것이 사운드에도 나타나고.
“네, 맞아요.”
수철은 믹싱하기 전에 영국에서 나온 앨범들을 몇 장 들었었다.
그리고 대충 마스터링 결과물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나온 결과물이 너무 예상과 딱 맞아떨어졌다.
신기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영준이 형은 이번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스터링은 소리를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통일해 주는 작업이니까 결과적으로는 네가 프로듀싱을 잘했다는 얘기지.
“엔지니어가 믹싱을 잘해 주셨죠. 그리고 무엇보다 형이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를 잘해 주신 덕분이죠.”
수철은 공을 엔지니어와 영준이 형에게 돌렸다.
덕분에 영준이 형의 기분도 좋아졌다.
―하하, 그래.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
“다른 멤버들에게도 마스터링한 거 들려주세요.”―그래, 공연 끝나고 들려줄게.
“네, 그럼 공연 잘하시고 쫑파티 때 뵐게요.”―그래, 수고!
전화를 끊고 수철은 스피커를 켰다. 그리고 음악을 다시 한번 들었다.
한국과 영국에서 처음 음악을 만들었을 때, 그리고 연주했을 때, 그리고 며칠 전 녹음했던 시간들까지.
모두 하나의 필름으로 연결돼서 머릿속을 지나갔다.
* * *
‘누구지?’
다음 날, 작업실을 정리하는데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긴 번호였다.
“여보세요?”
―용수철 작곡가님이신가요?
“네, 제가 용수철인데요.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