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88화 (88/239)

#88화. 그늘진 창백한 얼굴

-안녕하세요, 전 변호사 브라이언 김이라고 합니다. 트럼펫 연주하시는 영준 님께 연락받고 전화드렸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수철의 저작권 등록을 도와주기 위해서 영준이 형의 소개로 영국에서 전화한 것이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브라이언 김은 바로 본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한국과 달라서 저작권법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법이 잘 제정되어 있는 반면에 분쟁이 많은 곳이기도 하죠.

“아, 그렇군요.”

수철은 처음 듣는 얘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법은 수철이 전혀 모르는 분야다.

브라이언 김의 말투에서 전문가다운 신뢰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하시는 게 유리합니다.

“음원 출시 전에만 등록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맞습니다. 등록은 출시 전에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준비가 되어 있다면 굳이 미룰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드물지만 누가 먼저 등록했느냐를 놓고 법적 분쟁을 벌이는 일도 발생하거든요.

“아, 네.”

수철은 유명 밴드가 저작권을 두고 오랫동안 다투고 있다는 얘기가 기억났다.

―물론 용수철 작곡가님께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겠지만 제가 법률 서비스를 하는 사람으로서 혹시 모를 상황까지 말씀드리는 겁니다. 표절이랑 상관이 없는데도 상대가 시비를 거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제가 뭐부터 하면 될까요?”―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시면 제가 작성해야 할 서류와 도움이 될 저작권 관련 자료들을 함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서류는 영문으로 되어 있지만 번역본과 함께 쉽게 작성하실 수 있도록 안내 샘플도 같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걸 보시면서 작성해서 보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문자로 이메일 주소 보내 드릴게요.”―네, 그리고 앨범에 들어가는 곡의 악보와 작곡가님 명함판 사진, 그리고 마스터링된 음원도 같이 보내 주세요.

“네, 서류 보낼 때 같이 보내겠습니다.”

영준이 형이 명함판 사진을 미리 찍어 놓으라고 알려 준 게 다행이었다.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메일이 도착했다.

수철은 바로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브라이언 김은 역시 전문가였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도 작성할 수 있게 설명이 잘되어 있었고, 보내온 자료에는 저작권 분쟁과 관련한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서둘러 서류를 작성하고 악보와 사진을 첨부해서 보냈다.

그리고 이번엔 수철이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로 감사함을 표하고 싶어서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아닙니다. 제가 감사해야죠. 저에게 일을 맡겨 주셨으니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하하,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번에 영국에서 발매되는 음악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시길 바랍니다.

브라이언 김은 유쾌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한국말도 또렷하게 잘해서 소통에 불편함이 없었다.

영준이 형이 믿고 일을 맡기는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외국에서 음반을 낼 계획인 수철에겐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셈이다.

* * *

―수철아, 그날 밥도 한 끼 못 하고 헤어져서 아쉬웠어.

김명석이 전화를 했다.

하린이의 마지막 레슨이 끝나고 나서 수철을 보지 못하는 게 섭섭하다며 저녁을 먹자고 했다.

수철도 김명석에게 감사할 일이 많아서 조만간 저녁을 대접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다음 주 시간 어떠세요?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이번 주는 시간이 안 돼? 난 빨리 보고 싶은데.

무슨 일인지 김명석은 시간을 서둘렀다.

마지막 레슨 때도 저녁 먹자는 걸 거절했었는데 더 이상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네, 그럼 저녁때 뵐게요.”

수철은 다른 약속을 뒤로 미루고 김명석을 만나러 갔다.

제시간에 도착했는데도 김명석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수철아. 매주 보다가 겨우 한 주 안 봤는데 어떻게 이렇게 반갑지? 아무래도 내가 널 좋아하나 봐, 하하.”“하하! 선생님, 저도 뵙고 싶었어요.”

수철은 오글거림을 참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김명석이 선택한 메뉴는 돈가스였다.

김명석이 돈가스를 좋아하는 걸 알기에 수철은 장소를 ‘명동 돈가스’로 정했다.

“어서 먹자.”

“네.”

음식이 나오자 둘은 대화를 멈추고 돈가스를 썰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철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김명석의 모습이 지난주와 사뭇 다르다.

반갑다며 연신 웃고 있지만 며칠 만에 만난 김명석은 어딘가 핏기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

김명석은 돈가스를 먹지도 않고 조각조각 계속 썰기만 하고 있었다.

분명 무슨 고민이 있는 모습이었다.

수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니야, 괜찮아.”

힘없이 씨익 웃었다.

“약속을 다음으로 미룰 걸 그랬나 봐요.”“아니야, 내가 서두른 건데 뭐. 그냥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서 피곤해서 그런 거야.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자.”

“네.”

아무래도 저녁은 핑계고 무슨 말을 하려고 서둘러 보자고 한 것 같은데 김명석은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수철도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돈가스를 몇 조각 주섬주섬 입에 넣던 김명석이 고개를 들었다.

“수철아, 우리 친하지?”“네, 친하죠.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왜 느닷없이 이런 걸 묻는지 수철은 의아했다.

그때 김명석이 핵심 키워드를 툭 내뱉었다.

“혹시 하린이 곡 써 주기로 했어?”

“……!”

순간 수철의 머릿속에 마지막 레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오늘 김명석의 분위기가 예전과 다른 이유가 그 말과 관련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네, 써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 당장 써 주겠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나중에 자연스레 그럴 상황이 생기면 써 주겠다는 뜻이었어요.”

“역시 그랬군.”

김명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철을 지긋이 바라봤다.

수철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수철은 김명석의 그런 시선이 불쾌했다.

그리고 식사 자리가 급격히 불편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사실 지난번에…….”

수철을 바라보던 김명석이 다시 입을 뗐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기 시작했다.

“음…….”

이야기를 듣다 보니 김명석의 얼굴에 핏기가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왜 이러는지도 이해됐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김명석을 이해하는 반면 최 팀장에 대한 반감은 더 커졌다.

* * *

하린이는 수철이 곡을 써 준다는 말에 신이 나서 최 팀장에게 자랑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최 팀장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혹시 이번 하린이의 데뷔 앨범에 수철의 곡을 넣을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시점이 좋지 않았다.

김명석이 만든 하린이의 타이틀 곡이 금별기획 내부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김명석 씨의 감각이 예전 같지가 않아.”

최고의 작곡가, 최고의 프로듀서로 대접하고 있는데 그런 대접에 비해 김명석의 결과물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하린이는 금별기획의 1호 가수다.

그리고 이번 앨범은 1호 가수의 데뷔 앨범이다.

모두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거 이러면 진행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겠는데? 음…….”

김명석에게 걸었던 기대에 비해 나온 결과물이 탐탁지 않자 금별기획의 몇몇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거, 이러다가 판을 엎어야 할 수도 있겠어.”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철이 하린이에게 곡을 써 줄 거라는 말은 최 팀장의 귀에 팍 꽂혔다.

용수철이 누구인가.

금별기획의 영입 1순위 아티스트다.

김명석이 지는 해라면 수철은 떠오르는 태양이다.

게다가 하린이는 수철의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역대급 성장을 보였다.

수철은 하린이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아무도 보여 주지 못한 엄청난 결과를 보여 줬다.

금별기획의 관심이 수철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다.

“김명석 선생보다는 용수철 선생과 하린이의 그림이 훨씬 보기 좋은데 말이야.”

작곡가와 가수 사이지만 누가 봐도 김명석보다는 수철과 하린이의 그림이 보기 좋다.

그래서 금별기획에서는 어떻게든 하린이와 수철을 연결하고 싶었다.

둘이 한 팀을 이뤄서 앨범을 한다면 더 이상의 조합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용수철 아티스트의 벽이 높습니다. 접근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린이가 신나서 자랑했던 말.

“용수철 선생님께서 저 나중에 곡 써 주기로 하셨어요.”

이 말은 수철이랑 친분을 쌓고 싶어서 안달이 난 최 팀장의 귀에는 달콤한 꿀처럼 들렸다.

“곡을 써 준다고?”

“네.”

순간 최 팀장의 입에서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뭔가 파고들 빈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 *

“이번 앨범에 들어갈 곡을 한번 써 보시는 게…….”

최 팀장은 레슨 기간에도 수철에게 하린이의 곡을 부탁한 적이 있다.

타이틀 곡은 김명석이 쓰지만, 앨범 중에 한 곡 정도는 수철이 쓰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레슨 선생으로서 하린이를 잘 알기 때문에 제안드리는 거라고 이유를 붙였다.

하지만 속내는 수철이 곡을 쓰면 김명석의 곡과 경쟁을 시켜서 더 호응이 좋은 곡을 타이틀 곡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호응이 좋으면 김명석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들은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이 바닥의 생리다.

하지만 수철은 단박에 거절했다.

그들이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든 간에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김명석이 하기로 한 앨범에 수철이 곡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수철은 욱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김명석은 수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다.

김명석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수철에게 최 팀장의 말은 짜증 그 자체였다.

최 팀장이 비열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수철의 반응에 최 팀장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용수철 선생님께서 하린이의 장단점을 잘 알고 계시니까 더 좋은 곡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최 팀장은 발 빠르게 사과했지만 이미 수철에겐 미운털이 박혔다.

‘어렵다, 어려워.’

그 후로 최 팀장은 수철에게 말을 꺼내는 게 조심스러웠다.

수철의 눈치를 자주 보게 됐다.

최 팀장에게 수철은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런데 이번엔 수철이 곡을 써 주겠다고 했다.

물론 하린이가 졸랐겠지만, 어쨌든 써 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써 주겠다는 건 지금 써 줄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어쨌든 허락은 한 거잖아. 혹시 그사이에 마음에 변화가 있었나?’

궁금하지만 수철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잘못했다간 관계가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명석과 수철이 기분 나쁘지 않게 이 상황을 잘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데뷔 앨범을 내고 바로 2집을 내야 하나? 아니지, 데뷔 앨범이 무조건 떠야지. 음…… 그러면 어떻게 한다.’

최 팀장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쨌든 수철의 진의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최 팀장은 김명석에게 이 얘기를 흘렸다.

김명석이 직접 수철에게 진의를 확인해 줄 테니까 말이다.

‘덤으로 김명석 선생의 반응도 보면 좋지 뭐.’

수철이 어려운 최 팀장은 이렇게 잔머리를 굴렸다.

* * *

“용수철 선생님께서 하린이 곡을 써 주시겠다고…….”

최 팀장은 이 말을 김명석과 대화 중에 슬쩍 끼워 넣었다.

그리고 이 말은 최 팀장의 예상대로 김명석의 뇌리에 꽂혔다.

“수철이가요?”

느닷없는 말에 김명석이 눈을 크게 떴다.

낯빛이 바뀌었다.

“네, 하린이한테 그렇게 들었어요.”

최 팀장은 대답하며 김명석의 표정을 살폈다.

‘수철이 그럴 리가 없는데?’

김명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수철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수철이 잔머리 굴리는 야비한 3류 작곡가도 아니고.’

김명석이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최 팀장이 나중에라는 단어를 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곡 써 준다는 말을 마치 지금 곡 써 준다는 말처럼 했다.

김명석이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음, 이건 아닌데.’

예민한 상황이다.

금별기획이 자신이 만든 타이틀 곡에 대해 시큰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왜 하필 수철이가?’

김명석은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최 팀장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아는 수철은 절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수철은 돈이나 인기 같은 것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엔 최 팀장의 농간이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갑자기 이 사람이 이런 말을 꺼낸 의도는 뭘까?’

김명석의 머릿속은 다시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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