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89화 (89/239)

#89화. 천재의 작곡법(1)

수철이 곡을 쓰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최 팀장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금별기획의 직원이 그 정도의 양아치는 아니니까.

‘그렇다면.’

김명석은 당장 수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팀장이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 건지 확인이 필요했다.

* * *

김명석은 수철과 통화하면서 약속을 서둘렀다.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만나고 나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구구절절 신세 한탄을 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대중음악계에선 명망 있고 자존심 강한 김명석이다.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것도 한참 어린 수철에게 그럴 순 없다.

갑자기 자신이 너무 못나 보였다.

수철에게 애착이 크고 친구가 되고 싶은 김명석인데.

그래서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음…….”

다시 정적이 흘렀다.

둘의 모습과 사람들이 바글대는 돈가스 맛집이 상반되었다.

수철과 김명석은 마치 적막한 산속에 단둘이 있는 것 같았다.

김명석이 오랜 망설임을 끝내고 입을 뗐다.

“수철아, 사실은…….”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수철과 친구가 되기로 한 이상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작동했다.

“넌 잘 모르겠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만든 음악과 앨범들이 썩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어. 솔직히 말하면 중박 정도 친 앨범 한 장에 나머지 3장은 완전히 망했어.”

“…….”

수철은 눈동자에서 힘을 뺀 채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은 김명석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래서 하락세니, 한물갔다니 하는 수군거림이 많이 들리고 있어. 예전 같았으면 픽 웃고 넘겼을 일인데, 지금은 내가 위축됐는지 귀에 크게 들어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많이 예민하다는 얘기지.”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놔서 그런지 김명석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차분했다.

“사실 내가 만든 하린이 타이틀 곡의 반응이 좋지 않아.”

“……?”

아직 앨범이 발매되지도 않았는데 타이틀 곡의 반응이 좋지 않다니?

수철이 갸웃하자 김명석이 설명을 덧붙였다.

“금별기획에서 미리 모니터링을 해 본 모양이야.”

“……!”

역시 대기업은 다르다.

아직 본격적으로 녹음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모니터링을 했다니.

“내가 몇 장 말아먹다 보니까 많이 약해졌는지, 반응이 좋지 않다는 말에 밤잠까지 설치게 되더라고. 흐…….”

김명석이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수철은 그의 심정이 이해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수철이 네가 하린이 곡을 써 주기로 했다는 말을 들으니까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더라고. 창피한 얘기지만 사실이야.”

말을 하던 김명석이 시선을 들어 수철을 바라봤다.

“그래서 수철이 너에게 직접 듣고 싶었어. 최 팀장의 말이 사실인지 말이야.”“사실이 아니에요.”

수철은 김명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꾸했다.

“사실이 아니야?”

“네.”

수철은 지난 상황을 설명했다.

왜 그런 말을 하게 됐는지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서, 하린이가 소원이라고 해서 나중에 써 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김명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 팀장, 이 개자식!”

입에서 욕이 툭 튀어나왔다.

한참 어린 녀석이 자신을 갖고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범을 확 엎어 버릴까 보다.’

욱하는 마음에 위험한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자기만 손해다.

곡을 쓰겠다고 금별기획에 줄 서는 작곡가는 차고 넘친다.

게다가 금별기획의 생각이 아니라 최 팀장 혼자서 잔머리를 굴린 게 분명하다.

금별이 그 정도로 싸구려 회사는 아니다.

‘호?’

김명석의 툭 튀어나온 욕에 수철은 흠칫 놀랐다.

김명석은 욕 같은 건 안 하고 사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얘기였다.

“수철아, 미안. 내가 너무 욱해서 그만…….”“아니에요, 선생님. 이해해요. 전 괜찮으니까 계속하세요.”“하하, 계속하긴…….”

계속 욕하라는 말에 김명석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수철은 최 팀장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하린이가 걱정됐다.

하린이는 좋은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데 최 팀장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하린이가 피해를 보지 않을까 우려됐다.

김명석이 수철을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오늘 너무 이상했지?”

이제야 흐려졌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아니에요, 선생님의 솔직함에 감탄했어요.”“하하, 녀석. 나이답지 않게.”

수철은 오늘 김명석의 행동이 모두 이해됐다.

하린이가 소원이라고 해서 말한 것뿐인데 그 말이 화근이 될 줄 몰랐다.

김명석이 며칠간 마음 졸였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졌다.

수철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이 들었다.

“……?”

의문이 해소돼서 얼굴이 밝아졌던 김명석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표정도 다시 심각해졌다.

‘뭐지?’

침묵이 길어지자 수철이 물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김명석이 몸을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야.”

“……?”

수철이 계속 쳐다보자 이유를 말했다.

“아니, 이해가 안 돼서 말이야.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최 팀장이 왜 했는지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최 팀장이 그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잖아.”

수철도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했는지 추측하는 것만으로도 질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설마 절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수철의 질문에 김명석이 순간 당황했다.

마치 역습이라도 당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

“솔직히 신경이 쓰였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널 의심했던 것은 아니야.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 줄 알잖아.”“네, 헤헤. 그냥 해 본 소리예요.”

난색을 보이는 김명석을 보며 수철은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조금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솔직하게 털어놔 주는 모습이 더 고마웠다.

한참 어린 자신에게 그러기는 분명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내친김에 김명석의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런데 선생님, 뭘 걱정하세요?”

“그게 무슨 말?”

“선생님은 자기가 만든 음악에 자신이 없으세요?”

“……!”

“전 그 곡이 정말 좋았어요. 하린이한테도 잘 어울리고요. 그러니까 힘내세요.”

김명석이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음악에 관해서는 금별기획보다 수철을 더 신뢰한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물론이죠, 제가 보기엔 다 잘될 거 같은데 왜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드디어 처음으로 김명석의 입에서 배시시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곡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하린이와 잘 맞는다.

지금 하린이의 역량이면 충분히 유명해질 수 있다.

단지 금별기획의 기대가 너무 큰 것이 문제다.

“여기 돈가스 진짜 맛있네.”

이제야 김명석이 남은 돈가스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집어넣었다.

“어떻게 이런 맛집을 찾았어? 넌 이런 데도 재주가 있구나.”

원래의 김명석으로 돌아왔다.

며칠 자신을 괴롭혔던 오해가 말끔히 해소됐다.

“오늘 음식값은 내가 낼게.”

마지막 돈가스를 오물오물 씹어서 넘긴 김명석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면서 계산서를 집었다.

영문도 모르고 자신을 만나러 온 수철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안 돼요, 오늘은 제가 살 거예요.”

수철이 윽박지르듯이 대꾸하며 계산서를 다시 뺏어왔다.

순간 김명석이 멈칫했다.

“알았어, 그럼 다음 저녁은 내가 살게.”

“또 먹자고요?”

순간 수철의 진심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그 말에 김명석이 다시 한번 멈칫했다.

“또라니? 이제 나를 그만 보겠다는 말이야?”“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요.”

수철은 당황했다.

그러자 김명석이 빙그레 웃었다.

말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걱정 마, 당장 먹자고 조르지는 않을 테니까.”

“…….”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으니까 다음번엔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한번 먹어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

“네.”

* * *

저녁을 먹고 나와서 김명석과 잠시 걸었다.

“금별에서 진행하는 드라마가 이제 곧 촬영에 들어갈 거라는 말 들었지?”“네, 소식 들었어요.”“이제 곡 작업 시작하겠네?”

내심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정식으로 요청이 오면 시작하려고요.”“음악 만드는 건 내가 특별히 할 말이 없고, 한 가지 팁을 준다면 음악 감독이 좀 피곤할 수도 있어.”

“피곤하다니요?”

“그분 나도 아는 분인데, 작업 방식이 옛날 방식이거든.”

꼰대라는 말이었다.

“불합리한 것을 요구하면 참지 마. 물론 네가 참을 사람도 아니지만.”

작은 충고를 끝으로 김명석과 헤어졌다.

* * *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창밖을 보며 기지개를 켜는데 전화가 진동했다.

―용수철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영화감독 필립 윤이었다.

‘백자의 눈물’ 시나리오를 보내 주고 나서는 촬영에만 매진하느라 그런지 연락이 뜸했었다.

음악 감독이 가끔 진행 소식을 알려 주는 게 전부였다.

“네, 감독님. 전 잘 지냈어요. 감독님은 아주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수철은 필립 윤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수철과 통하는 게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네, 그동안 촬영 스케줄이 좀 빡빡했어요. 그러다 보니 연락도 자주 못 드렸네요.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강행군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촬영이 많이 진행돼서 이제 막바지예요.

예산이 넉넉지 않아서 고생한다고 얼핏 들었는데 쉬지 않고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역시 대단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반 작업도 곧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제 음악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수철은 필립 윤이 처음 시나리오를 보내왔을 때 이미 머릿속으로 분위기를 구상해 놨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전통악기인 퉁소 소리가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도자기공과 백자가 서로 교감하는 모습이 퉁소와 보이스가 멜로디를 주고받으며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퉁소의 멜로디 라인은 클래식하게 잡고, 대신 다른 소리들은 현대적 스타일로 구성하는 게 좋겠어.’

작품이 칸으로 갈 것이기 때문에 외국인도 염두에 뒀다.

한국의 고전적인 소리는 이미 영화 곳곳에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서양 악기를 섞어서 퓨전 스타일로 만드는 것이 외국인이 받아들이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퉁소만 그렇게 스케치하고 보컬 라인은 비워 뒀다.

영상을 보고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진행 상황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필립 윤은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과 앞으로의 스케줄을 말하면서 후반 작업은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스튜디오를 잡다 보니까 선생님의 작업실과 멀지 않은 곳이더라고요. 자주 뵙게 될 거 같습니다. 하하.”“잘됐네요. 자주 뵈면 저도 좋죠.”“이틀 후에 스튜디오에 계약하러 갈 예정인데 그때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용수철 선생님의 얼굴이 그립습니다. 하하.”“하하! 네, 저도 좋아요.”“알겠습니다. 그럼 이틀 후에 뵙기로 하고 우선 촬영한 영상 중에 일부분을 좀 보내 드리겠습니다. 음악 구상하시는 데 참고하시라고요.”

한 번 보고 느낌을 잡아 보라는 의미였다.

“네, 알겠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이틀 후에 만나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필립 윤은 전화를 끊자마자 영상을 보내왔다.

영상엔 ‘백자의 눈물’의 핵심적인 부분들이 담겨 있었다.

음악이 없다 보니까 생동감과 입체감은 떨어졌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알 수 있었다.

* * *

수철은 의뢰받은 신인 가수의 편곡을 마무리해서 넘기고 일찌감치 일과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온종일 머릿속에 여운이 남아 있던 필립 윤의 영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음…….”

수철은 영상을 보다가 하나의 장면에 집중했다.

도자기공이 발로 물레를 밟으면서 백자의 옆면에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는 장면.

백자의 몸에 예리하게 무늬를 새겨 넣는 장면.

수철이 집중한 것은 백자가 아니었다.

백자를 보는 도자기공의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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