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천재의 작곡법(3)
―선생님도 한번 오셔야 하는 곳이니까 오늘 거기서 뵈면 어떨까요?
필립 윤이 스튜디오에서 만나자며 아침 일찍부터 연락을 해 왔다.
후반 작업이 진행되는 곳의 위치를 미리 알아 두는 게 좋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네, 좋아요.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점심 이전에 오시면 좋을 거 같아요. 끝나고 같이 점심 먹으면서 얘기도 나누고요. 참고로 전 아침부터 그곳에 계속 있을 겁니다.”“네, 저도 시간 맞춰서 갈게요.”―위치는 문자로 알려 드릴게요.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수철은 컴퓨터를 켜서 작곡 프로그램을 열었다.
어제 만든 음악을 밖으로 꺼내 놓기 위해서다.
머릿속에서 숙성시켰으니 이제 꺼내서 시각화하고 청각화할 단계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우선 모니터링하기 좋게만.’
지금 작업이 최종본은 아니기에 모니터링하기 좋게 디테일보다는 뼈대 위주로 소리를 입혔다.
아직 영화는 후반 작업도 시작 안 했다.
영화 편집이 모두 끝나야 최종본을 마무리할 수 있다.
그래도 수철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영화의 핵심 장면들을 다 녹여 넣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변화는 있을 수 있으나 큰 흐름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세한 소리의 디테일은 건너뛰고 모니터링하기 좋게만 사운드를 잡았다.
‘빠르기만 한번 체크해 보고.’
수철은 머릿속에 그려 놓았던 악보들을 모두 작곡 프로그램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빠르기를 체크하고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간단한 준비를 한 후 스튜디오로 향했다.
* * *
“어서 오세요, 용수철 선생님.”
수철이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필립 윤은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세 번째 만남 만에 포옹하는 사이가 됐다.
필립 윤은 마치 헤어졌던 가족이라도 만난 듯 꽉 껴안으며 수철을 격하게 맞이했다.
“반가워요. 감독님.”
수철도 같이 포옹하며 인사했다.
“용수철 선생님은 더 멋있어진 거 같아요.”
필립 윤은 양손으로 어깨를 잡고 수철의 얼굴을 훑어봤다.
평소 같으면 수철이 질색할 분위기지만 왠지 수철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만큼 친근하다는 뜻이었다.
필립 윤은 수철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웃으며 한마디 했다.
“선생님이야 원래 외모는 타고나셨고,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시크한 눈빛은 배우 저리 가라죠. 아무래도 다음 작품은 용수철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섭외해야겠어요. 그러면 주인공도 하시고, 음악 감독도 하시고. 와, 이거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 되겠어요. 촬영비도 줄이고요. 하하!”
필립 윤이 특유의 농담을 던지며 껄껄 웃었다.
“…….”
수철이 특별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쳐다보자 필립 윤은 웃으며 스튜디오 한편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우선 커피부터 한 잔 마실까요?”
“네.”
수철은 대답하고 필립 윤이 커피를 타는 동안 잠시 스튜디오를 둘러봤다.
스튜디오는 수철이 앨범을 녹음했던 녹음실과 비슷했다.
다른 점은 영상 편집을 하는 곳이라 그런지 처음 보는 장비가 많았다.
그리고 녹음실에 비해서 조금 시끄러웠다.
“보통은 편집 기사님이 초벌 편집을 하시고 감독이 최종으로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저는 초벌부터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필립 윤이 커피잔을 내밀며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말했다.
처음부터 디테일을 챙긴다는 뜻이었다.
같이 편집하는 기사에게는 피곤한 얘기다.
그만큼 주문 사항이 많기 때문이다.
“말씀드렸다시피 영화음악은 최종 단계에서 믹싱할 겁니다. 이 부분은 음악 감독님이 오시면 자세히 설명해 드릴 겁니다. 그리고 아실지 모르겠지만 최종 편집된 영상이라도 음악이 입혀지면 감정의 흐름과 편집의 호흡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에 따라서 영상을 재편집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간혹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수철도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스토리의 핵심 장면을 모두 음악에 녹여 놨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음악의 틀이 바뀔 이유는 없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필립 윤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셔서 음악 감독님과 자주 얘기 나눴으면 합니다. 편집 단계에서부터 미리 음악의 위치나 길이 등을 논의하는 게 좋으니까요.”
“네, 알겠어요.”
수철은 작업실과 스튜디오가 가까워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립 윤은 미안한 눈치로 얘기를 했지만, 수철은 번거롭다기보다는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분야를 알아가는 즐거움이랄까.
그리고 음악의 디테일은 수철도 무척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선생님께서도 잘 아실 테니 저나 음악 감독과 충분히 얘기를 나누고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필립 윤은 마치 수철이 이미 음악을 만들어 놓은 걸 알기라도 하듯이 얘기했다.
“네, 참고할게요.”
이미 주제곡을 다 만들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먼저 들려주고 나서 대화를 나눠야 할 거 같았다.
“제가 추천한 영화는 보셨나요?”
“네, 다 봤어요.”
필립 윤이 추천한 영화는 사운드 디자인이 잘되어 있었다.
수철이 아직 영화음악에 대한 경험이 없기에 참고하라는 의미에서 음악을 잘 만든 작품만 추천했다.
‘뭘 기대하시는 거지?’
필립 윤의 의도와 달리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수철은 고개를 갸웃했다.
필립 윤이 추천한 작품들은 음악도 뛰어났지만, 그보다는 사운드 효과가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소리를 통해 현장감과 입체감을 잘 살린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수철이 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음악 감독의 몫이다.
물론 소리의 영역은 수철의 천재성이 두드러지는 파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부분은 촬영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음악 감독이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립 윤이 부탁한 것은 주제곡을 포함한 OST.
수철이 사운드 효과까지 관여했다가는 누군가의 권한을 빼앗아 오는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음악 감독님과 자주 만나서 얘기하라고 말씀하신 건가?’
필립 윤은 수철의 탁월함을 알기에 사운드 전반에 걸쳐 코멘트를 해 주길 바라는 눈치지만, 수철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의견을 물어오면 성실히 답변할 것이다.
필립 윤의 작품이 잘되길 바라니까.
어쨌든 필립 윤이 기대치가 큰 것은 알지만 수철은 영화 OST, 그중에서도 주제곡만 잘 만들면 된다.
나머지는 주제곡의 선율을 변주시켜 사용하던지, 선율을 솔로 악기로 연주하던지 방법은 많다.
핵심은 주제곡이다.
“이제 용수철 선생님께 공이 넘어갔습니다.”
빙그레 웃던 필립 윤이 장난치듯 툭 내뱉었다.
“공이요?”
“이제 선생님께 영화의 운명이 달렸다는 말입니다.”
느닷없는 필립 윤의 말에 수철이 부담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하하, 부담을 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음악이 없으면 영화가 완성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감독이 그러더라고요, 음악이 들어가야 비로소 영화가 눈을 뜬다고요.”
“아, 네.”
괜히 불편할 뻔했다.
어찌 됐건 수철은 필립 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많은 비중을 음악이 차지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정확히는 음악이 아니라 소리였다.
많은 영화가 소리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리만 있어도 영화가 이해될 정도였다.
“인사하세요, 여기는 편집을 도와주실 장 실장님이에요.”“안녕하세요, 용수철입니다.”
수철은 필립 윤의 소개로 엔지니어와 인사를 나눴다.
수철이 앨범을 녹음하면서 만났던 엔지니어와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무언가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영상 편집을 하므로 그런 것 같았다.
* * *
“CG(Computer Graphics)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회사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식사하러 자리를 옮긴 식당에서 필립 윤은 수철이 모르는 얘기를 꺼냈다.
“자본이 확충되지 않아서 스폰하는 회사가 펀딩을 제안했거든요. 그래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 네.”
대답은 했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필립 윤이 설명을 덧붙였다.
“제 말은 후반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 그렇군요.”
저예산 영화들은 후반 작업에 고생을 많이 한다는 박 대표의 말이 떠올랐다.
후반 작업할 때는 항상 예산이 부족해서 돈이 생길 때마다 진행하는 감독도 많다고 했다.
“오늘 음악 감독님이 다른 일정 때문에 못 오셨는데, 제가 대신 말씀드리면…….”
필립 윤은 식사하는 내내 사운드 관련 부분을 많이 얘기했다.
대부분이 음악 감독의 일이어서 굳이 알 필요는 없었지만, 소리와 관련된 작업이어서 수철은 흥미롭게 들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리 관련한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 감독이 아니라 음악영화의 감독으로서 말이다.
“현장 녹음 상태가 안 좋아서 동시녹음을 못 한 대사부터 먼저 녹음할 거예요.”
현장 노이즈가 심해서 촬영과 동시에 대사를 녹음하지 못한 부분은 스튜디오에 배우가 와서 후시녹음을 한다는 얘기였다.
“앰비언스(ambience), 폴리(foley), 이펙트(effect)같은 효과 부분도 이어서 진행할 거고요.”
앰비언스는 자연 속의 소리나 주변에서 나는 소리 등 현장의 공간감을 살리는 소리를 말한다.
이런 소리는 따로 녹음한다.
폴리는 눈을 밟거나 지푸라기를 비비는 등의 인위적으로 나는 소리인데, 이런 소리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펙터는 비행기가 날아가거나 포탄이 터지는 등의 소리는 현장이나 녹음실에서 녹음할 수 없기에 가상의 사운드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출품 날짜가 정해져 있어서 마냥 여유를 부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결국 필립 윤의 얘기는 후반 작업은 시간이 길어질 수 있으니 천천히 주제곡을 만들어도 된다는 얘기였다.
충분히 생각해서 음악에 힘을 실어 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만큼 수철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수철은 필립 윤의 얘기를 들으면서 뭔가 특이점을 발견했다.
‘많이 닮았어.’
필립 윤과 영화 속 도자기공의 모습이 많이 닮아 있었다.
특히 둘의 눈빛이 많이 닮아 있었다.
마치 영화 속 개석이 눈앞에 앉아서 얘기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일부러 그런 배우를 뽑은 건가? 아니면 촬영하면서 닮아 간 건가?’
궁금증을 갖고 필립 윤을 쳐다보는데,
“선생님?”
필립 윤이 말을 멈추고 수철을 불렀다.
“네?”
수철이 눈동자가 흐트러진 채 대답했다.
필립 윤이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그 말에 수철의 초점이 다시 잡혔다.
“아,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제 얘기가 집중력을 떨어트렸군요.”“아니에요. 전 단지.”
“단지?”
“감독님과 영화 속 주인공의 눈빛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요?”
수철의 말에 필립 윤의 입이 벌어지며 눈이 커졌다.
“오, 그거 듣기 좋은 얘기군요. 영화가 잘빠졌다는 얘기잖아요.”
미안해하는 수철과 달리 필립 윤은 좋아서 광대뼈가 올라갔다.
엄청난 칭찬이라도 들은 듯 기뻐했다.
“하하, 역시 선생님은 예리한 눈을 가지셨군요. 음악도 정말 기대됩니다.”
“저 감독님.”
“네, 말씀하세요.”
“사실은 주제곡 다 만들었어요.”
“네? 뭐라고요?”
대답과 동시에 필립 윤의 시선이 수철의 눈동자에 고정됐다.
그 상태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진짭니까? 주제곡을 벌써 만들었다는 말이?”
필립 윤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네.”
필립 윤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잠깐만요, 정리 좀 할게요. 대체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떻게 벌써 만드셨다는 거예요? 영상도 어제 보내 드렸잖아요?”“보내 주신 영상과 시나리오 참고하면서 만들었어요.”“그럼 어제 만들었다는 말씀이세요? 어제 하루 만에요?”
“네.”
“이런!”
필립 윤이 몸을 세우며 자신의 무릎을 내려쳤다.
“……?”
수철은 필립 윤의 과도한 액션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필립 윤이 갑자기 멋쩍게 웃었다.
“하하, 제가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까먹고 있었네요.”
“…….”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이건 심하다.
필립 윤의 웃음엔 계속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충격, 멋쩍음, 난감함, 경이로움.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시죠!”
“네? 어딜?”
“선생님 작업실이요, 어서 들어 봐야겠어요.”“스튜디오 들어가셔야 하잖아요? 음악은 나중에 들으시면 되는데.”“지금 스튜디오가 급한 게 아닙니다. 지금 저, 목 타는 거 안 보이세요? 어서 앞장서세요!”
필립 윤은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서 다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