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난입(1)
수철이 작업실에 도착했을 때, 다혜는 이미 테이블에 노트를 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쌤. 저 왔어요.”
“그래. 어서 와.”
“다혜야 안녕.”
“안녕.”
수철은 반갑게 인사하는데 다혜는 퉁명스럽게 인사했다.
‘뭐지? 왜 저기압?’
힐끗 쳐다보는데 다혜가 한마디 했다.
“넌 작업실도 가까우면서 나보다 늦는 건 뭐야?”
제시간에 맞춰서 왔는데도 괜한 시비다.
“5분이나 일찍 왔어.”“꼭 시간에 맞춰서 와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버려. 오늘이 가장 중요한 첫 회의잖아. 넌 제작자로서 마인드가 부족한 거 같아.”
“허.”
수철은 어이가 없어서 박 대표를 쳐다봤다.
박 대표는 웃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수철이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노트는 뭐야?”
“노트가 뭐긴 뭐야? 노트하는 거지.”
계속 찬바람이 불었다.
“메모지랑 볼펜 필요하면 얘기해. 빌려줄게. 그리고 앞으로 같은 제작자로서 회의에 임하는 예의를 지켜 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수철은 특별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알겠다고 했다.
박 대표는 웃음을 참느라고 뒤돌아서 있었다.
등이 킥킥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다혜는 프로젝트를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제작자가 되어 있었다.
“각자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주문해.”
박 대표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주문을 받았다.
다혜는 아이스커피를, 수철은 녹차를 주문했다.
마주 앉아 있는데 왠지 서먹했다.
“수철아 잔 좀 가져가.”
“네.”
대답하고 잔을 가져가는데 박 대표가 어깨를 붙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차 팔았대.”
“차요?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다혜가 날카로운 이유를 알았다.
“음악에 집중하려고 팔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갑자기 다혜가 뒤를 돌아봤다.
뭔가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박 대표는 얼른 아이스커피 잔을 집어 내밀었다.
“마셔 봐. 얼음 많이 넣어서 시원할 거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그럼 시작해 볼까?”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몇 분 하다가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라기보단 박 대표의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자리다.
“초안을 잡아 본 거니까 이거 보면서 얘기하자.”
박 대표가 미리 만들어 놓은 앨범 기획안을 내밀었다.
“오늘은 첫 회의이니만큼 앨범의 방향과 이 앨범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목적을 먼저 짚고 나서 전체를 쭉 한번 훑어보자.”
“네.”
“제작에서 기획이 90%야. 기획하면서 일정과 예산 등을 샅샅이 잡는 거야. 기획안이 곧 지도가 되는 거지. 제작을 오래 한 사람은 제작 얘기만 나와도 머릿속에 기획안이 바로 구성돼. 순서, 예산, 인원, 시기, 일정 등이 자자작 머릿속에 떠오르지.”“쌤도 그러시겠네요?”
“물론이지.”
끄덕이며 기획안의 첫 장을 넘겼다.
“한 장 넘겨서 기획 의도. 앨범을 시작하는 명분을 묻는 거야. 보통 경험이 많지 않은 제작자는 이 부분을 간과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시험지 답 채워 넣듯이 툭 채워 넣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이 바로 가장 중요한 초심이야. 앨범이 끝나고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그 순간까지 이 초심을 유지해야 해. 매 순간 기획 의도를 기억하고 있어야 배가 산으로 가지 않아.”
박 대표는 물까지 마셔 가며 기획 의도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이 부분을 놓치고 진행하다 보면 나중엔 무슨 음악을 하려고 했는지, 무슨 목적으로 앨범을 시작했는지 기억도 안 나게 돼. 그러면 제작자는 갈수록 우왕좌왕하게 되고, 나중엔 홍보 방향도 못 잡고 갈팡질팡하게 돼. 실제로 그렇게 흔들려서 녹음하다 말고 사라지는 제작자도 있으니까.”
박 대표는 진지한 분위기로 설명을 이어갔다.
수철과 다혜는 집중했다.
“제작을 하다 보면 주위에서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이 생기거든. 음악이 어떻고, 가수가 어떻고, 홍보가 어떻고, 어느 기획사 누가 어떻고. 그런 상황에서 뚜렷한 제작 의도가 없으면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흔들리게 돼. 귀가 얇아지는 거지. 그럼 나중에 뭐 하려고 했는지도 까먹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돼.”
박 대표가 설명을 멈추고 수철과 다혜를 번갈아 봤다.
“너희에게 이번 프로젝트의 기획 의도가 뭐지?”
박 대표의 시선이 다혜에게 멈추자 다혜는 수철을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그래, 말해 봐.”
“음…… 저는 제작에 대해서 배우는 게 목적이죠.”“제작은 왜 배우려고 하지?”“왜 배우냐면……. 제가 만든 곡을 직접 발매하려고요.”
박 대표의 계속되는 질문에 다혜가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박 대표가 빙그레 웃었다.
“오케이, 좋은 답변이야. 그럼 수철은?”
수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전 제작 전 과정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요.”
“이유는?”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직접 해 보고 싶어요.”
“그래. 좋았어.”
박 대표가 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답변이었다는 뜻이다.
박 대표가 다시 몸을 세웠다.
“그럼 내가 생각하는 이번 프로젝트의 기획 의도를 말해 볼게. 이번 앨범은 보통의 앨범과 다른 특이점이 있지. 뭘까?”
“…….”
둘은 선뜻 대답 못 하고 박 대표의 입만 쳐다봤다.
“바로 이번 앨범의 목적이 흥행이 아니라는 거야. 너희가 말했다시피 제작 과정을 배우고 경험하는 게 목적이지.”
그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진행하다 보면 생략하는 부분이 생길 거야. 그렇다고 빼놓고 넘어간다는 얘기는 아니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디테일을 다 챙길 거야. 이번은 흥행이 목적이 아니지만, 다음 앨범은 흥행이 목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박 대표는 계속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난 작곡가라면 누구든지 꼭 앨범 제작을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돈이 없다면 알바를 해서라도 한 번은 꼭 해 보는 게 좋아. 제작비는 얼마든지 줄일 수가 있으니까.”
다혜가 공감하는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에는 홍보비를 빼면 사실 얼마 들지 않잖아. 악기는 집에서 다 찍고, 보컬만 녹음실에서 녹음하면 되니까. 아니면 집에서 아예 홈 레코딩을 할 수도 있지. 물론 앨범의 퀄리티(Quality)는 차이 날 수 있겠지만.”
이번엔 수철이 끄덕였다.
“어쨌든 자신의 작품을 하는 작곡가가 평생 가수를 위한 작품만 만든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기획사의 시스템을 따라다니는 것도 어느 순간 염증을 느끼게 될 거고. 트렌드 쫓아다니고, 가수 쫓아다니는 건 생명력이 짧아. 금방 밀려나게 돼. 잘하는 후배들이 금방 치고 올라올 테니까, 트렌드라는 게 그런 거지.”
박 대표가 다혜에게 시선을 맞췄다.
수철은 해당 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작자는 자신만의 개성을 갖는 게 중요해. 그러려면 작품을 스스로 발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게 필요하고.”
박 대표가 말에 힘을 주었다.
“작곡자는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거야. 가수를 위한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위해 가수를 선택하는 거지. 영화감독이 배우를 선택하듯이 말이야.”
다혜는 박 대표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얼굴에 드러났다.
반면에 수철은 무덤덤했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제작에 대해 궁금했던 부분들을 모두 경험해 봐.”
“네.”
“다시 말하지만, 제작은 음악과 달라. 음악이 판타지면 제작은 현실이야. 그만큼 힘들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많다는 뜻이야. 사실 기획사들이 하는 그런 일은 음악가가 할 일이 아니야. 마인드도 다르고, 접근법도 달라. 기획사는 기획사의 역할이 있고, 음악가는 음악가의 역할이 있어. 이 부분은 항상 염두에 두는 게 좋아.”
“네, 명심할게요.”
다혜가 입술에 힘을 주며 끄덕였다.
박 대표는 은연중에 다혜에게 집중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수철은 이미 그 길을 가고 있기에 박 대표가 굳이 덧붙일 이유가 없었다.
“작곡가의 미래가 불투명해서 불안하다고 하는데, 창작자는 원래 불안과 맞서는 게 운명인 사람들이야. 불안이 두려워서 피할 거면 시작하지 않는 게 좋아.”
“네.”
“한번은 넘어야 할 벽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해. 네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고 싶으면 말이야.”
“네, 알겠어요.”
의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표가 다시 몸을 세웠다.
“서론이 길었네. 자, 한 장 더 넘겨 봐.”
서론이 길었다고 하지만 박 대표는 제작에 앞서 마음가짐을 확실히 심어 주고 싶었다.
그래야 제작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은 테니까.
“제작비 관련 부분은 이따가 점심 먹고 짚어 보기로 하고…….”
박 대표는 계속해서 기획 초안을 넘기며 개념들을 잡아 나갔다.
문화 소비 시장 흐름이나 음반 소비 시장 분석 같은 것까지 개념을 설명하고 기획사가 어떻게 하는지도 알려 줬다.
“참고로 어떤 회사들은 연령별, 장르별 음반 소비자 특성 분석, 음반 구매 현황 분석, 경쟁 뮤지션 분석까지 하면서 예민하게 접근하는데 난 이런 건 하지 않아. 우리한테도 필요 없는 부분이라서 뺐어.”
개념만 짚을 뿐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제작 스텝은 우리가 직접 다 할 거고, 뮤지션 프로필은 필요 없고, 수록곡 소개는 다음 미팅 때 어떤 곡을 쓸 것이지 얘기하도록 하고. 음악 분위기나 장르 등등도 앨범 컨셉 때 얘기하고.”
박 대표는 기획안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정리하자면 제작비가 들어가는 예산 부분과 어떤 곡을 쓰고 어떤 가수를 붙일 것인지 등 굵직한 부분을 많이 얘기하게 될 거야.”
“네.”
다혜가 대답하자 박 대표가 눈을 마주쳤다.
“학교에서는 이런 거 안 알려 주지?”
“전혀요.”
다혜가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빙그레 웃던 박 대표가 배를 만지며 벽에 붙은 시계를 봤다.
“점심 먹고 할까?”
“네.”
다혜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주문할까요?”
“아니, 오늘은 나가서 먹자.”
“피자 안 먹고요?”
“건강 챙겨야지. 제작은 체력이야.”
“오!”
입술을 오므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오? 뭐?”
“보기 좋다고요. 바람직한 변화예요. 오래 살려면…… 흡!”
말이 헛나왔다.
급하게 입을 막으며 눈치를 봤다.
박 대표가 눈을 흘겼다.
“녀석이. 또?”
“죄송요. 그런데 쌤.”
“뭐?”
“녀석이라고 하지 말고 윤 제작자라고 불러 주세요.”“허!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불러 드리죠, 윤 제작자님. 점심은 더치페이입니다.
“더치페이요? 그럼, 점심 먹고 윤 제작자로 부르시는 거로.”
“늦었어.”
“수철은요?”
“용 제작자는 내가 살 생각입니다, 윤 제작자님.”
“아니, 이런.”
* * *
소문난 설렁탕집에서 밥을 말고 김치를 얹어 가며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박 대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지이이잉.
냅킨으로 손과 입을 닦으면서 전화기를 꺼냈다.
이 실장이다.
밝지 않은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이 실장. 나 식사 중이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얼른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 실장이 잡고 늘어졌다.
―대표님, 작업실이세요?
“아니, 밖이야.”
―작업실은 언제 들어가실 거예요?
“밥 먹고 갈 거야. 왜?”―아니에요. 식사 맛있게 드세요.
툭.
전화가 끊어졌다.
‘뭐지?’
박 대표는 어이없는 얼굴로 전화기를 쳐다봤다.
* * *
“아이스커피?”
“네.”
“저도요.”
점심을 먹고 작업실로 돌아온 셋은 커피를 한 잔씩 앞에 두고 다시 회의를 이어갔다.
“초안 다시 꺼내 봐.”
수철과 다혜는 다시 테이블에 기획 초안을 올려놓았다.
“몇 번 반복해서 머릿속에 개념이 잡히면 그때부터는 너희가 먼저 궁금한 걸 질문하도록 해. 그러면서 초안을 직접 업데이트시켜 나가. 계속 수정 보완해야 한다는 말이야. 지금 초안은 그냥 뼈대일 뿐이니까.”
“네.”
“자, 그럼. 두 번째 페이지부터 다시 보자.”
* * *
같은 시각.
익숙한 모습의 남자가 손에 잔뜩 박스와 봉지를 든 채 건물에 들어섰다.
“다 왔어, 여기야.”
“네.”
뒤를 돌아보며 얘기하자 뒤에서 원피스를 입은 앳된 모습의 소녀가 대답했다.
“자, 내려가자.”
남자가 박스와 봉지를 들고 뒤뚱거리며 계단을 내려가자 소녀가 뒤를 따랐다.
복도를 지나 문 앞에 다다른 남자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 * *
똑똑.
박 대표가 설명을 이어가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갸웃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제가 나가 볼게요.”
수철이 먼저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느닷없이 이 실장이 큰 소리로 인사하며 들이닥쳤다.
박스와 봉지를 잔뜩 든 채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네, 안녕하세요.”
수철도 꾸벅 인사했다.
그러자 이 실장이 반가운 얼굴로 아는 척을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직접 문까지 열어 주시다니, 이거 정말 영광입니다.”
수철을 격하게 반기며 추켜세웠다.
수철은 당황해서 뒤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