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난입(2)
그때 수철의 등 뒤에서 박 대표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 이 실장이 이 시간에 여길 왜?”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이 실장은 대꾸하지 않고 성큼성큼 박 대표에게 다가갔다.
“지우야, 인사드려. 이분이 내가 말한 디데이뮤직 대표님이셔. 내가 정말 존경하고 나에겐 영웅 같은 분이지. 친형님처럼 믿고 따르는 분이야.”
‘믿고 따라? 존경? 영웅? 친형님?’
박 대표의 표정은 황당 그 자체였다.
이번엔 이 실장의 손끝이 수철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의 문을 열어 주신 이분은 천재 음악가셔. 코스프레 말고 진짜 천재.”
그 말에 다혜를 포함한 셋은 컥 소리를 냈다.
사람들의 표정과 상관없이 지우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지우입니다.”
또박또박 인사하는 말투에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풋풋함이 묻어 있었다.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니 이 실장이 인사법을 가르쳤다는 것도 엿보였다.
“네, 안녕하세요.”
박 대표와 수철은 마지못해 뻘쭘하게 같이 인사했다.
다혜도 덩달아서 고개를 숙였다.
지우가 인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이 실장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잘 지내셨죠?”
박 대표가 기가 찬 얼굴로 봤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박 대표의 표정과 상관없이 이 실장은 자신의 말을 했다.
“지나가다 생각나서 잠시 들렸어요. 대표님을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예의도 표할 겸해서요.”
“컥!”
이 실장의 뻔뻔함에 박 대표는 기가 막혔다.
손에 들린 것을 보면 누가 봐도 지나가다 들른 모습이 아니다.
작정하고 들이닥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잔뜩 들고 있던 박스와 봉지들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피자, 치킨, 햄버거, 도넛, 아이스크림 등과 가지각색의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드시면서 하시라고 사 왔어요. 음료수는 탄산음료가 아닌 에너지 드링크로 가져왔어요. 음악가 선생님들의 건강을 염려해서요.”
음료수 하나도 신경 쓰고 골랐다는 것을 강조했다.
산타클로스가 선물이라도 주러 온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가져온 음식들을 쫙 펼쳐 놓았다.
박 대표는 할 말을 잃었다.
‘남 건강 챙기지 말고 자기 건강이나 신경 쓰세요. 며칠 전까지 밥도 못 먹고 다니더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와, 정말 많네요.”
다혜의 말처럼 이 실장이 가지고 온 음식들은 ‘드시면서 하세요.’ 수준이 아니었다. 집중해서 먹어도 몇 시간은 먹을 양이었다.
보이는 대로 다 쓸어 담은 것 같았다.
황당하게 보고 있던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지나가긴 뭘 지나가? 이 실장이 여길 지나갈 일이 뭐 있다고.”
느닷없이 나타나 회의를 방해하는 이 실장이 못마땅했다.
“사무실을 잠가 놓든지 해야지.”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 실장은 고개를 돌려 지우를 봤다.
“지우야, 음악가분들 창작하시라고 하고 우린 인제 그만 가자.”
자기 할 일을 다 했으니까 돌아가겠다는 거였다.
박 대표는 그 모습이 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박 대표의 표정과 상관없이 지우가 다시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네, 반가웠어요.”
지우의 인사에 셋은 어정쩡한 자세로 같이 고개를 숙였다.
지우의 인사가 끝나자 이 실장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 이만 방해하지 않고 사라지겠습니다. 그럼 모두 수고하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더니 주먹을 쥐었다.
“파이팅!”
‘뭔 파이팅? 쟤가 정신 줄 놨나?’
박 대표는 이 실장의 쇼를 보며 어이없어했다.
다혜만 가볍게 주먹을 쥐어서 같이 파이팅을 외쳤다.
‘설마, 이게 끝? 진짜 그냥 가는 거야?’
박 대표는 이 실장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의심을 품기 무섭게 이 실장이 몸을 붙여 왔다.
“대표님, 저는 그럼 요기 사거리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있겠습니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표시에 박 대표는 황당해서 빤히 쳐다봤다.
이 실장은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빵긋 웃었다.
“허…….”
박 대표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느닷없이 난입해서 사람들의 생각은 묻지도 않고 자기 계획만 실행하려고 하는지.
이런 스타일이란 건 알지만, 너무 황당했다.
이 실장은 이런 박 대표를 잘 안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부담 갖지 마시고 시간 나면 잠깐 들리세요.”
부담 갖고 꼭 오라는 얘기였다.
어린 지우가 앞에서 보고 있어서 과격한 말은 못 하지만, 박 대표의 표정엔 이미 감정이 다 드러나 있었다.
코로 공기가 팍팍 새어 나왔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대꾸했다.
“오래 걸릴 거야.”
가장 교양 있는 말로 이 실장의 무지막지함에 반격했다.
하지만 이 실장은 다음 멘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 오늘 무지 한가합니다. 어쩌면 이따 또 들를지도 몰라요.”
얼른 안 나타나면 다시 쳐들어오겠다는 말이었다.
이 실장은 박 대표를 잘 안다.
그래서 수철과 다혜가 있는 현장에 어린 지우까지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오늘 회의를 한다는 것은 지난번 수철과 박 대표의 대화에서 엿들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찾아왔다.
물론 목적은 리메이크 앨범에 적극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박 대표는 더 귀찮아지지 않으려면 오늘 이 실장과 커피를 마셔야 할 운명이다.
‘너, 자꾸 이럴 거야? 도가 지나치잖아.’
박 대표는 다른 사람을 의식해 눈으로 말했다.
그러자,
‘대표님, 같이 좀 먹고 삽시다. 좀 도와주세요.’
이 실장도 눈으로 말했다.
그런데 왠지 둘의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
부탁하는 사람은 이 실장인데 더 당당했다.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 * *
“다시 두 번째 페이지 봐 봐.”
이 실장이 사라지자 박 대표는 다시 회의를 이어 나갔다.
이 실장이 기다리든 말든 신경 안 쓰고 해야 할 일을 다 할 생각이었다.
이 실장이 가져온 음식은 다혜만 먹고 있었다.
박 대표는 말을 이어갔다.
“거기 보이는 제작비부터 먼저 짚어 보자. 제작비는 기획안 짤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 예산이 있어야 제작을 할 수 있으니까. 너희도 이 부분이 가장 궁금할 거야.”
박 대표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비는 크게 순 제작비와 홍보비로 나눠 놨어.”
대충 만든 기획 초안이라고 했지만, 전체적으로 촘촘하게 내용이 구성되어 있었다.
“우선 순 제작비부터 살펴보면, 이 중에서 작곡비, 작사비, 편곡비는 너희에게 해당 사항 없지. 그리고.”
“작사는요?”
박 대표가 넘어가려고 하는데 다혜가 물었다.
“다음 회의 때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이번은 너희가 직접 가사를 써 봐.”
“가사를요?”
다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기에 이번이 좋은 기회야. 가사는 직접 써 보는 게 좋아. 나중에 전문 작사가에게 맡기더라도 말이야. 그리고 난 너희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이번 앨범을 제작하는 만큼 할 수 있는 경험은 다 하고,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길 바라. 기회가 자주 있는 게 아니니까.”
“네, 알겠어요.”
다혜가 대답하자 박 대표가 눈을 맞췄다.
“가사 쓰는 거 너무 걱정하지 마. 즐거운 경험이라고 생각해. 이 부분은 다음번에 컨셉과 장르 얘기하면서 다시 한번 얘기하도록 하자.”
“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세션비. 이 부분도 우리가 직접 해결할 거야. 제작비를 줄이는 의미도 있고, 내가 만든 곡은 연주도 직접 다 한다, 이 마인드로 접근하는 게 좋아. 이번엔 말이야. 그리고 드럼, 베이스나 디지털사운드 같은 것은 컴퓨터로 소화하면 되고.”
“네.”
수철과 다혜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전문 세션맨을 쓸 수도 있어. 관악기 편곡을 했으면 말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셋이서 악기는 다 소화한다. 이 마인드로.”
“네, 알겠어요.”
박 대표가 얘기하다 말고 씨익 웃었다.
“제작비 줄어드는 소리가 팍팍 들리지 않아? 이래서 뮤지션이 제작하면 이점이 많아.”“그런 거 같아요. 헤헤.”
수철도 동의했다.
“오케이, 그리고 아래에 녹음실 사용료랑 엔지니어 비용은 당연히 지출해야 하고, 마스터링 비용도 지출해야지. 제작비를 아끼려면 여기 작업실에서 녹음하고 믹싱할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전문 녹음실에서 하는 거로 생각해.”
“네.”
“그리고 뮤직비디오는 안 할 거니까 건너뛰고. 그러면 순 제작비 파트는 다 훑어본 거고…… 아래 홍보비도 일단 통과, 홍보비는 천차만별이라서 하루 날 잡아서 내가 쭉 설명해 줄게.”
“네.”
박 대표는 종이를 넘겨보다 홍보비에 대해서 간략하게 개념만 잡았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홍보비는 이렇게 생각하면 돼. 남은 예산에 맞춰서 한다. 예산이 100만 원이다 그러면 100만 원에 맞춰서 하는 거지.”“100만 원이면 어떤 홍보를 할 수 있어요?”
다혜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음…… 100만 원이면 보도 자료 뿌리고, 잡지에 사진 내보내고 그 정도? 인터넷 홍보도 좀 할 수 있고. 알고 보면 소액으로도 할 수 있는 홍보도 꽤 있어. 문제는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거지. 그래서 보통은 언론과 TV 매체에 집중하는 거야. 기획사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다 있지.”
“그렇군요.”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표는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래 진행비는 말 그대로 진행하면서 드는 돈이야. 사람들 만나고, 이동하고, 밥 먹고 하는데 드는 경비 같은 거지. 우리도 각자 얼마씩 내서 진행비를 만들 거야.”
“얼마씩이요?”
“많이는 아니더라도 몇십만 원 정도씩은 내야겠지. 우리도 밥 먹고 사람 만나고 해야 하니까. 자세한 금액은 진행하면서 잡아 보자.”
“네.”
박 대표는 이 실장이 기다린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를 다 했다.
오히려 더 자세히 설명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박 대표가 말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회의 때 계속 이어서 하자.”“네, 수고하셨어요. 쌤.”
“감사해요. 쌤.”
“오케이, 그럼 다음 미팅은 언제로 할까?”“전 아무 때나 괜찮아요. 이제 어디 돌아다닐 일도 없고, 쌤과 수철이 정하면 전 거기에 맞출게요.”
차를 팔아서 이제 한가하다는 얘기였다.
박 대표가 수철을 봤다.
“수철이 넌?”
“저도 아무 때나 괜찮아요. 쌤이 편하신 시간에 맞출게요.”“오케이. 그러면 하루 쉬고 모레 계속하자.”
“네.”
말을 마치고 박 대표는 시간을 확인했다.
얼추 두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이 실장이 기다리다 가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박 대표는 알고 있다.
절대 말없이 돌아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도 카페에 있을 것이 뻔했다.
‘그래도 혹시?’
혹시 모르니까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역시였다.
―대표님! 드디어 끝나셨군요? 뭐 드실 거예요? 주문해 놓을게요.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쩌렁쩌렁 울려왔다.
“쩝. 캬라멜 마끼아또.”
귀를 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용수철 천재, 아니, 그 선생님은 뭐 드실 건지 물어봐 주세요.
“뭐?”
수철과 같이 오라는 얘기였다.
그 말에 박 대표가 인상을 구겼다.
또 남 생각 안 하고 막 밀어붙인다.
‘이런.’
욱해서 한마디 하려다가 멈췄다.
한편으로는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벼랑 끝에 몰리면 매너나 교양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오죽했으면 어린 가수까지 데리고 나타났을까.’
웃고 있지만, 이 실장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같은 제작자로서 잘 안다.
박 대표는 수철을 돌아봤다.
“같이 갈래?”
“어딜요?”
“커피 마시러.”
“……같이 가야 하나요?”
수철이 난처한 얼굴로 봤다.
박 대표는 이 실장을 잘 안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사 가도 주민센터를 뒤져서 찾아올 녀석이다.
“같이 안 가면 만날 때까지 계속 찾아올 거야.”
그 말에 수철이 체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갈게요.”
박 대표도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마실래?”
“녹차라떼요.”
박 대표는 이 실장에게 녹차라떼를 주문하고 전화를 끊었다.
“쌤, 모레 봬요. 수철아, 모레 봐!”
작업실을 앞에서 다혜와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그리고 둘은 이 실장이 기다리는 카페로 향했다.
둘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뒷모습은 마치 적에게 성을 함락당한 성주들 같았다.
* * *
“대표님! 여깁니다!”
굳이 손들고 소리칠 필요 없는 작은 카페에서 이 실장은 손을 번쩍 들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늦는다고 욕하고 있었을 텐데.
이 실장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쩝.’
별 대꾸 없이 다가가려는데.
몇 걸음도 안 되는 자리에서 굳이 문 앞까지 뛰어나와 환영했다.
‘젠장.’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