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95화 (95/239)

#95화. 난입(3)

이 실장은 이산가족이 상봉이라도 한 듯 박 대표와 수철을 번갈아 봤다.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런 애물단지.’

박 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다행히 아까 같이 왔던 소녀 가수는 안 보였다.

이제 편하게 말해도 되는 분위기였다.

“아까 같이 왔던 애가 지난번 앨범에서 노래한 그 가수지?”

가짜 천재 프로젝트를 말한 것이었다.

“네, 대표님.”

이 실장은 부끄러움도 없이 힘있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실장의 관심은 수철에게 가 있었다.

“같이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

수철은 이 실장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격하게 반기는 것이 불편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이 실장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이 실장은 박 대표가 옆에서 어이없이 쳐다보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이 실장은 박 대표와 수철을 물고 늘어질 작정이었다.

정확히는 박 대표보다 수철이 중요하다.

그래서 박 대표와 대화하면서도 수철에게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선생님의 편곡을 듣고 저와 가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말에 수철이 박 대표를 봤다.

박 대표는 황당한 얼굴로 이 실장을 보고 있었다.

‘이런 팔불출.’

수철에게 기획사 매니저들이나 하는 말투를 쓰다니.

박 대표가 얼굴을 찡그렸다.

“선생님께서 마무리까지 한번 도와주시면 정말 평생…….”

“그만해.”

쓸데없는 말이 길어지자 박 대표가 끊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 실장은 박 대표와 눈이 마주치자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박 대표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폈다.

“이 실장 상황은 충분히 아니까,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해. 자꾸 그러면 진짜 그냥 확 가 버릴 테니까.”

“죄송합니다.”

박 대표가 강하게 얘기하자 이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이 실장이 자꾸 그러니까 나까지 부끄럽잖아.”

“…….”

박 대표의 핀잔에 이 실장은 대꾸를 못 했다. 박 대표는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프로듀싱까지 해 달라는 얘기지?”

이 실장이 찾아온 핵심을 물었다.

“네, 대표님.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제 능력으로는 부족합니다.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이 실장은 저자세로 얘기했다.

박 대표도 이미 예상하고 온 자리라 길게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음…….”

고개를 돌려 수철을 봤다.

수철의 생각을 묻는 것이다.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표가 오케이 하면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박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수철의 마음이 고마웠다.

다시 이 실장을 봤다.

“수철이 프로듀서 역할만 해 주면 되는 거야?”“대표님도 같이해 주시면.”

죄송한지 말끝을 흐렸다.

“참. 이 실장. 대단하다, 대단해.”

새삼 이 실장의 염치 없음에 박 대표가 혀를 찼다.

“그래, 도와줄 거면 확실히 도와주는 게 낫지.”“감사합니다, 대표님. 이 은혜는.”

“또!”

이 실장의 말이 길어지려고 하자 박 대표가 다시 미간을 좁혔다.

이 실장은 민망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박 대표는 고개를 젓다가 다시 인상을 펴고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돼?”

이 실장은 물을 한잔 들이켠 후 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녹음실은 대표님도 잘 아시는 붐스튜디오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녹음 일정은…….”

박 대표와 수철은 묵묵히 이 실장의 설명을 들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이 실장은 나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열심히 준비한 흔적도 보였다.

녹음만 잘 끝내면 되는 상황이었다.

설명을 듣던 박 대표가 물었다.

“그래서 녹음은 이틀 후부터 가능하다고?”

“네.”

박 대표가 수철을 봤다.

“이틀 후면, 낮에 회의하고 저녁때 녹음하면 될 거 같은데?”“네, 저도 좋아요.”

수철이 오케이 하자 다시 이 실장을 봤다.

“그렇게 할 수 있겠어? 저녁에 녹음 진행하는 거로?”“네, 가능합니다. 모든 게 스탠바이되어 있습니다.”

“자신감은 참.”

핀잔 투로 말했지만, 위축되어 있거나 비굴하게 나오는 것보다는 보기 좋았다.

과하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제작자는 자신감이 있어야지.

그래야 어려움이 닥쳐도 뚫고 나갈 수 있다.

“연주자들은?”

“섭외해 놨습니다.”

“믿을 만해? 어려우면 내가 도와줄게.”“아닙니다, 이 정도는 제가 해야죠.”“지금 이 상황에 내 일, 네 일이 어딨어? 막 들이밀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박 대표는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핀잔을 줬지만, 이 실장이 저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실장은 지난번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했던 연주자들에게 친분을 들이밀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세션비를 절반으로 깎았다.

지난 앨범이 실패한 것엔 연주자들의 책임도 있다는 뉘앙스를 깔았다.

물론 직접 말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얘기를 듣는 연주자들은 그렇게 느꼈다.

‘지난 앨범이 망한 이유 중에 너희의 연주 탓도 있으니, 도와주지 않으면 세션이 별로여서 앨범이 망했다고 떠들고 다닐 거야.’

연주자들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연주 실력이 한참이나 부족하지 않은 이상 세션 때문에 앨범이 망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괜히 그런 말이 돌면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

이 바닥은 좁다.

잘못하면 밥줄 끊긴다.

그래서 썩은 표정을 지으며 하겠다고 한 상황이다.

‘아니꼽고 더러워서.’

잘나가는 연주자들은 세션을 안 했으면 안 했지 세션비를 깎지는 않는다.

한번 그런 소문이 퍼지면 너도 나도 세션비를 깎으려고 들 것이기 때문이다.

몸값을 올리기는 어렵지만 떨어트리기는 쉽다.

이 실장은 돈을 아끼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연주자들은 기분 좋게 세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바이올린은 리얼 악기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가 아는 유명 연주자가 몇 명 있거든요.”

세션 얘기를 하던 이 실장이 수철에게 물었다.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안 그래도 될 거 같아요. 바이올린의 톤을 쓴 거지, 바이올린 특유의 생생한 연주가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네, 알겠습니다.”

“돈 아끼셔야죠.”

수철이 한마디 덧붙이며 빙그레 웃자 이 실장은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박 대표가 물끄러미 보다 끼어들었다.

“어쿠스틱 기타도 수철이, 네가 쳐 주면 좋을 거 같은데.”

박 대표는 수철에게 자꾸 뭘 주문하는 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도와주기로 한 이상 적극적으로 나섰다.

수철에겐 그만큼 보상을 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 대표의 마음을 아는 수철도 흔쾌히 오케이 했다.

“네, 녹음 나오는 거 봐서 필요하면 쳐 볼게요.”

그 말에 이 실장은 감격의 눈빛으로 수철과 박 대표를 번갈아 봤다.

박 대표는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난 뒤에서 지켜볼 테니 수철이 네가 진행해 봐. 편곡도 네가 다 한 거니까.”“네, 그렇게 할게요. 제가 놓치는 거 있으면 쌤이 잡아 주세요.”

“그래.”

박 대표가 다시 이 실장을 봤다.

“이 실장.”

“네.”

“모레 저녁 7시부터 진행하는 거로 잡아 봐.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시작하자고. 녹음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알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맞추겠습니다.”

이 실장의 의도대로 대화가 마무리되자, 이 실장은 보상을 하고 싶다고 했다.

“공짜로 하는 건 너무 염치가 없잖아요. 상식적으로 그건 아니죠.”

뒤늦게 상식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박 대표는 거절했고, 수철도 따라서 거절했다.

“돈이 부담되시면 어떻게? 해외여행이라도 보내 드릴까요?”

이 실장은 미안함에 계속 사례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거듭되는 이 실장의 제안이 오히려 민폐로 느껴졌다.

수철을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됐어, 나중에 밥이나 한 끼 사.”“밥은 평생 사겠습니다.”

박 대표는 더 이상 말을 꺼내기가 무서워졌다.

그건 수철도 마찬가지였다.

계속되는 호의에 수철은 손사래까지 치며 거절했다.

결국, 보다 못한 박 대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제 그만 가자.”

이 실장은 찾아온 목적을 달성하자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대표님, 그럼 이틀 후에 녹음실에서 뵙겠습니다.”“그래, 조심히 들어가.”“용수철 선생님도 그날 만나요.”“네, 안녕히 가세요.”

카페를 나와서 이 실장이랑 헤어진 후 둘은 말없이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가다 수철이 박 대표에게 고개를 돌렸다.

“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돼요?”

“뭐?”

박 대표도 수철을 봤다.

“쌤이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쌤이 좋아하시는 스타일이 아닌 거 같아서요.”

수철은 이 실장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의문이었다.

하지만 박 대표가 불편할까 봐 묻지 못했다.

지금은 프로듀서까지 하게 된 상황이다.

이제는 물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앞을 보며 멍하니 걷던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냥 철없는 동생 같아. 염치없고 무식해 보이지만 착한 구석이 많은 녀석이야. 정이 많아서 손해 볼 때도 많고…….”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이었다.

“이번에 잘 안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시골에 어머니 혼자 계시거든. 이 실장이 외동아들이야.”

박 대표는 더 말하지 않았다.

더 말하지 않아도 박 대표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 *

“우리 앨범이 3인 3색 컨셉이니까 장르는 각자 선택하면 돼. 하지만,”

이틀 후,

다시 회의가 진행됐다.

지난번은 개념을 잡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면 이번에는 밀도 있게 하나씩 짚어 나갔다.

앨범 컨셉에 대해 얘기가 이어졌다.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장르를 선택하는 게 좋아. 그래야 빠른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수철과 다혜가 끄덕였다.

박 대표가 다혜를 봤다.

“다혜는 어떤 장르로 만들 생각이야?”“저는 셀린 디온(Celine Dion)같은 팝 스타일로 해 보려고요. 그게 가장 편할 거 같아요.”“좋은 선택이네. 수철이는?”“저는 특별히 정한 장르는 없어요. 여러 장르가 섞일 것 같은데 아마도 일렉트로닉 분위기가 날 것 같아요.”“생각하는 곡 스타일이 있다는 얘기네?”

“네.”

이때 다혜가 얼굴을 내밀었다.

“쌤은 어떤 스타일로 하실 거예요?”“나는 밝은 분위기의 보사노바풍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야. 흥겨운 곡이 하나 있는 게 좋지 않겠어?”“와! 저 보사노바 완전 좋아하는데! 쌤 음악 진짜 기대돼요.”

다혜가 눈을 반짝였다.

“난 너희 음악이 기대된다. 컨셉이 3인 3색이긴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안 겹치냐? 앨범 색깔이 정말 도드라지겠어. 하하.”

박 대표는 신기하다며 웃었다.

“그중에도 수철이 음악이 제일 튀겠어요.”

다혜가 수철을 보며 말했다.

“그건 음악이 나와 봐야 알지.”

수철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박 대표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난 김에 얘기하자면, 타이틀 곡은 투표로 정할 거야.”“투표요? 우리끼리 다수결?”“아니, 모르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선택하게 할 거야. 한 20명 정도. 연령층 다양하게 해서.”“오, 그런 방법이 있군요.”

“다들 그렇게 해.”

수철과 다혜는 신기한 눈으로 박 대표를 바라봤다.

박 대표는 다시 기획안을 뒤적였다.

“그럼 장르는 각자 알아서 그렇게 하고, 전체적인 앨범 컨셉을 짚어 보면…….”

박 대표는 계속해서 3인 3색 프로젝트 컨셉을 집중적으로 얘기했다.

작은 디테일까지 챙기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회의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네, 수고하셨습니다.”“다음 회의는 시간 조절해서 나중에 알려 줄게.”

“네.”

박 대표가 가방을 챙기는 다혜를 봤다.

“다혜야, 너도 같이 가자. 한 번쯤 가 볼 필요가 있는 녹음실이야.”“네, 말 안 했으면 섭섭할 뻔했어요.”

셋은 밖으로 나와 저녁을 먹은 후 녹음실로 향했다.

* * *

“여기가 유명한 가수들이 녹음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야.”

녹음실 입구에 들어서자, 박 대표는 잘 아는 듯이 얘기했다.

박 대표의 말을 증명하듯 복도 한편에는 유명 가수의 앨범들이 쭉 전시되어 있었다.

TV에 나왔던 가수는 모두 있는 것 같았다.

복도를 따라 쭉 들어가는데 이 실장이랑 함께 왔던 소녀 가수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지우가 인사하자 박 대표도 같이 인사하며 물었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반가워요. 실장님은 어딨어요?”“컨트롤 룸에서 얘기 중이세요.”

지우가 안쪽을 가리켰다.

수철과 박 대표는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컨트롤 룸에 들어서자 이 실장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대표님! 일찍 오셨네요. 용수철 선생님도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수철은 인사하고 나서 컨트롤 룸을 둘러봤다.

한국 최고의 녹음실이라는 말에 걸맞게 각종 비싼 장비가 보였다.

넓은 공간과 그들만의 특유한 분위기.

그동안 수철이 가 본 녹음실보다 한 단계 위였다.

무엇보다 엔지니어의 실력이 최상급이라고 했다.

“대표님도 여기 잘 아시죠?”“녹음한 적은 없지만 소문은 듣고 있지.”

이 실장의 물음에 박 대표도 녹음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여기 엔지니어님이 A급입니다.”“알고 있어, 가요 쪽은 잘한다고.”“네, 우리나라에서 탑입니다.”

이 실장이 엄지를 세웠다.

“돈도 없으면서 굳이 이런 데서 녹음할 이유가 있어?”“아무리 어려워도 녹음은 최고에서 해야죠. 대박 친 곳에서 해야 기운을 받아서 저도 대박 치지 않겠어요?”

며칠 전과 분위기가 다르게 해맑았다.

박 대표는 퀄리티를 따지지만 이 실장은 네임 밸류를 따졌다.

이것이 음악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다.

같은 제작자라도 이런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대표님.”

이 실장은 무슨 은밀한 얘기라도 있는지, 박 대표에게 어깨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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