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96화 (96/239)

#96화. 플랜 B(1)

“플랜 B입니다.”

“플랜 B?”

“이번 리메이크 앨범의 작전명입니다.”

박 대표가 피식 웃었다.

“뭘 거창하게 작전명까지.”“이번 앨범에 임하는 제 각오입니다.”“그래, 제작은 재밌게 하는 게 좋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대충 장단을 맞춰 줬다.

이 실장은 계속 말을 붙였다.

“플랜 B로 성공한 프로젝트가 많다고 들었습니다.”“플랜 A로 성공한 프로젝트가 더 많지 않을까?”

“전 아니잖아요.”

“…….”

“플랜 B의 운명이 오늘 달렸습니다.”

“…….”

“그래서.”

이 실장의 말이 또 길어지려고 하자 박 대표가 끊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적당히 해.”

눈을 한번 흘기고 말을 이었다.

“도와주려고 온 사람에게 그렇게 자꾸 부담 주면 어떻게 해?”“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닌데.”

“쩝.”

“어깨가 굳으신 거 같은데 어떻게, 제가 마사지라도?”

느닷없이 박 대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박 대표는 피하며 손을 밀어냈다.

“됐어, 난 괜찮으니까. 이 실장 어깨나 신경 써.”

“……네.”

뻘쭘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박 대표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 실장은 제작자지, 매니저 아니잖아? 그런데 왜 자꾸 매니저처럼 그래? 행동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박 대표가 또 핀잔을 줬다.

하지만 이 실장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근본이 매니저잖습니까.”

“허!”

박 대표는 기가 찼다.

“순진한 거야? 순수한 거야? 남들은 숨기고 싶어서 안달인데.”“제가 대표님 앞에서 숨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속인다고 속일 수 있는 분도 아니잖아요.”

“…….”

이 실장은 최근 몇 주 동안 궁지에 몰리자 예전 매니저 근성이 툭툭 튀어나왔다.

박 대표는 이 실장의 이런 모습이 불편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제작자는 위기관리 능력이 중요한데.’

그래야 성공할 수 있는데.

이 실장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보기 안 좋다.

특히 수철과 같이 있을 땐 낯부끄러울 정도다.

오늘은 녹음을 진행하는 예민한 시간이라 그러지 말라고 미리 핀잔을 준 것이다.

더군다나 수철이 프로듀서니까.

“이 실장.”

“네.”

“이 실장은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좋으니까요.”

“만만한 거겠지.”

“사랑합니다.”

“사랑하지 마.”

“충성하겠습니다. 대표님.”“충성하지 마, 제발 부탁이야.”

* * *

수철과 박 대표, 다혜, 그리고 이 실장과 지우는 복도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셨다.

예정보다 일찍 온 터라 아직 연주자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음료수를 마시며 지우의 노래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나중에 보컬 녹음할 때 여기 수철 선생님만 믿고 따라가면 돼.”“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실장의 말에 지우가 수철을 보며 꾸벅했다.

수철은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아서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얼마 후, 엔지니어가 다가왔다.

유명 엔지니어답게 전문가 포스가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박 대표와는 사무적으로 인사하고 수철에게는 좀 더 친근하게 인사했다.

수철을 아는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시간이 되자 악기를 멘 세션맨들이 속속 도착했다.

세션맨들은 인사를 나눈 후, 복도로 나가 커피를 타서 소파에 앉았다.

그들은 녹음실이 익숙해 보였다. 커피를 마시며 멤버들이 다 모일 때까지 잡담을 나눴다.

“용수철 선생님,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오늘 연주하실 분들 소개해 드릴게요.”

멤버들이 다 도착하자 이 실장이 다가왔다.

수철이 이 실장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 그냥 수철이라고 불러 주세요. 호칭이 너무 불편해요.”“그래도 어떻게…….”“부탁드려요. 편하게 불러 주세요.”

“그래도 될까요?”

“네.”

“그럼 수철 씨라고 부를게요.”

“네.”

수철은 이 실장과 함께 소파에 모여 있는 세션맨들에게 다가갔다.

박 대표는 수철에게 진행을 맡긴 터라 일찌감치 뒤로 빠져 있었다.

“오늘 녹음을 진행하실 용수철 프로듀서님입니다. 일일 프로듀서시죠.”

이 실장의 소개에 몇몇은 가볍게 눈인사를 했고,

‘저렇게 어린 사람이 프로듀서야?’

몇몇은 시큰둥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개중에는 수철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저 사람 말이야…….”

수철이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자 뒤에서 수군댔다.

그러고 나서는 한 번씩 수철을 더 쳐다봤다.

“시작할까요?”

커피를 다 마신 세션맨들이 컨트롤 룸으로 들어와 악기를 풀었다.

수철은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손에 쥐었다.

“한번 맞춰 보고 가면 좋겠어요.”

녹음을 시작하기 전에 음악을 맞춰 보자는 얘기였다.

그 말에 이 실장이 연주자들을 돌아봤다.

연주자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음악 다 들어 보고 왔는데. 그냥 바로 가도 되는데.”

대놓고 거절은 못 하고 구시렁거렸다.

한번 녹음한 적이 있는 음악이고, 바뀐 편곡도 들어 보고 왔으니까 바로 녹음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스케줄이 바쁜 세션맨들이다.

빨리 끝내고 다음 녹음실로 넘어가야 하는데, 한번 맞춰 보자는 말은 이들의 심기를 거슬렀다.

‘왜 그러지?’

반면 수철은 이런 세션맨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됐다.

음악을 한번 점검하고 가자는데 돈 받고 세션하는 사람들이 대놓고 불편함을 보이다니.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이 실장이 나섰다.

“그렇게 해 주세요. 몇 분 안 걸리잖아요.”

그 말에 세션맨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섰다.

“할 거면 얼른 하시죠.”

마지못해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악기를 집어 들었다.

“이리 오시죠.”

엔지니어의 안내로 녹음실 한편에 있는 합주 공간으로 이동했다.

“서두르지 말고 세세하게 잘 부탁합니다.”

이 실장은 노파심에 나이 많은 세션맨을 잡고 한 번 더 부탁했다.

“걱정 마세요. 저희가 대충하는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압니다.”

“단지 저희도 다음 스케줄로 넘어가려면 시간을 맞춰야 하니까. 그런 거예요. 실장님, 저희 아시잖아요.”

“네, 믿습니다.”

이들은 팀으로 움직이는 세션맨들 이었다.

이 실장이 세션비를 반값으로 줄이면서 부탁하다 보니 이들도 대놓고 다음 일정을 얘기하며 서두르고 있었다.

이 실장이 을처럼 보였다.

“여기서 하시면 돼요.”

복도를 돌자 합주실이 나타났다. 엔지니어가 문을 열어 주자 세션맨들이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보시면 돼요.”

방 안에 들어가자 수철은 악보를 나눠 줬다.

세션맨들은 악보를 받아 보면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합주를 시작했다.

원. 투. 쓰리. 포!

탁탁 타닥!

두웅. 두둥!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며 빠르게 합주를 했다.

전문가답게 한 방에 사운드를 짝짝 붙였다.

음악이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딱딱 맞아서 돌아갔다.

빈틈이 없었다.

‘음…….’

하지만 수철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악만 딱딱 맞아서 돌아갈 뿐 맛이 없었다.

기분 좋게 귀를 자극하는 맛이.

‘이를 어쩐다?’

잘나가는 세션맨 특유의 고급스러운 연주.

하지만 흔하디흔한 음악.

빈틈없이 연주하고 있지만, 그냥 유명 가수의 앨범에서 들을 수 있는 닳고 닳은 진행.

수철이 듣기엔 딱 그랬다.

‘음악을 다 듣고 왔다더니.’

수철이 만든 음악을 들었다면서 음악을 살리지 않았다.

스타일이 있는 건 알겠지만 편곡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이 실장의 간절함 따윈 이들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음…….’

수철의 고민이 깊어졌다.

자칫하면 다시 지난번과 같은 음악이 될 위기에 처했다.

합주가 끝나자 이들은 묻지도 않고 바로 악기를 챙겼다.

수철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어요. 녹음 시작하시죠.”

세션맨들은 대꾸도 없이 악기와 악보를 챙겨서 합주실을 나섰다.

어디서 족보도 없는 새파란 녀석이 나타나서 프로듀서랍시고 기강을 잡으려는 거야? 하는 표정이었다.

수철도 딱히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합주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렇다고 뭔가 요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들은 경력이 오래된 잘나가는 세션맨들이고, 수철은 잠시 유명해진 풋내기 뮤지션이다.

이들이 보기에 수철은 까마득한 후배다.

잘못하다간 마찰이 생길 게 뻔했다.

하지만 수철은 이해가 안 됐다.

‘전문 세션맨이라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대충하는 건지…….’

음악을 잘한다는 느낌도 없고, 적당히 공부해서 시험만 잘 보는 학생들 같았다.

요령만 넘칠 뿐 창의성이 없었다.

“끝났어요?”

“네.”

컨트롤 룸에 들어서자 이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이 실장이 안쓰럽게 보였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바로 시작할게요.”

수철은 시작을 알리고 엔지니어 옆에 앉았다.

세션맨들은 각자의 악기를 들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는 A급 녹음실답게 큼직했다.

빅 밴드가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넓었다.

세션맨들은 익숙한 듯 자리를 잡고 앉아서 빠르게 세팅을 점검했다.

“음…….”

수철은 부스 유리창으로 보이는 분주한 세션맨들을 보며 오늘 프로듀싱을 어떻게 진행할지 생각했다.

세팅을 모두 마치자 세션맨들은 엔지니어에게 준비됐다는 사인을 보냈다.

엔지니어가 수철을 봤다.

수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시죠.”

수철이 큐 사인을 주자, 엔지니어가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그럼 시작할게요. 메트로놈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녹음이 시작됐다.

―똑. 딱. 똑. 딱.

탁탁 타닥.

두웅. 두둥.

세션맨들은 마치 복사기로 복사한 듯 아까와 똑같이 연주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박자와 템포도 메트로놈에 딱딱 맞아떨어졌다.

‘기계 같네.’

너무 정확해서 기계가 연주하는 것 같았다.

듣던 대로 짠 내 나는 세션맨들이었다.

문제는 인간미가 빠져서 감흥이 없다는 거였다.

‘이를 어쩐다.’

수철의 얼굴에 근심이 드러났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의자를 톡톡 두드렸다.

“수철이 머리 아프겠어.”

팔짱을 낀 채 뒤에 서 있는 박 대표가 중얼거렸다.

박 대표도 수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실장의 간절함을 생각하면 성의 없는 연주자들에게 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뒤에 서 있어서 수철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수철의 머리가 복잡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빠―바. 바―밤!

쿵쿵. 두르르둥. 챙!

연주를 끝낸 세션맨들이 유리창을 통해 수철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수철은 잠시 생각하다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한번 들어 볼게요.”

“네.”

엔지니어가 방금 녹음 받은 연주를 다시 틀었다.

수철은 굳이 다시 듣고 싶지 않았지만 세션맨들이 들어 보고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우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음악을 다 듣고 나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을 잘하는 우리가 듣기에 괜찮으니까 너도 오케이 하는 게 어떻겠냐는 시그널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수철이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잘하셨는데요.”

수철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건방지다는 코웃음이 세션맨들의 얼굴을 스쳐 갔다.

‘잘하셨는데?’

자신들의 연주를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놈이.

수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이내믹 신경 쓰셔서 다시 한번 부탁드릴게요.”

말을 하고 옆의 엔지니어를 봤다.

“다시 받을게요.”

“네.”

엔지니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지만 수철이 프로듀서인 만큼 수철의 지시를 따랐다.

세션맨들도 프로듀서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다.

다시 헤드폰을 썼다.

“준비되셨나요?”

엔지니어가 묻자 세션맨들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엔지니어가 녹음 버튼을 누르자 다시 연주가 시작됐다.

‘음…….’

이번에도 생동감이 없었다.

아까보다 더 세게 치고, 많이 칠 뿐.

프레이즈(Phrase, 한 단락의 멜로디 라인)도 가요에 자주 나오는 식상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레이즈가 식상하고, 기타의 리듬이 살지 않는다. 드럼과 베이스는 너무 기계적이다.’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지적까지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유치하다.

연주가 끝나자 다시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제가 편곡한 거 들으셨다고 하셨잖아요. 거기에 맞춰서 한 번 더 부탁드려요.”

세션맨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수철이 만든 음악을 떠올리며 맞춰서 연주했다.

하지만 수철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션맨들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음악대로 치지 않고 비슷하게 흉내만 내고 있었다.

그래서 음악이 살지 않았다.

잘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요구했다.

“섹션이 바뀌는 부분이 매끄럽지 않은데, 그 부분 신경 써서 다시 한번 가 볼게요.”

수철은 프로듀서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음악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 실장에겐 운명이 걸려 있는 곡이고, 게다가 박 대표까지 나서서 도와주고 있다.

대충대충 할 수는 없다.

“다시 한번 가 볼게요.”

녹음이 반복될수록 세션맨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짜증 나네.’

누군가 중얼거리는 입 모양이 유리창을 통해 보였다.

수철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