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Album ‘Abyss’
“호불호가 극과 극으로 나뉩니다.”
“극과 극?”
해리가 팀장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네, 연령대에 따라 좋아하는 곡이 선명하게 나뉩니다. 결과가 너무 이례적이어서 결과지를 받아 보고 저희도 놀랐습니다.”
“어느 정도길래?”
“9:1 수준입니다.”
“9:1? 그런 경우도 있나? 정말 이례적이군.”
연령층별 결과가 선명하다는 얘기는 타겟층을 정확히 조준하여 마케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결과다.
하지만 반대로 확장력을 넓히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얘기다.
큰 성과를 이루려면 전 연령층에서 골고루 호감을 표시해야 한다.
지나치게 한쪽에 편향되어 있으면 자칫 마니아층에 머무는 앨범이 될 수도 있다.
“음.”
해리의 염려를 눈치챈 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인 반응은 매우 좋았습니다.”
해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네. 대박 조짐이 보입니다.”“대박? 그 정도야?”
“네, 분위기가 매우 좋습니다.”“굿 뉴스이긴 하지만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야. 특히 우리 팀에서는 말이야.”“주의하겠습니다.”
해리는 잠시 수염을 매만지다가 말을 이었다.
“90%를 차지한 곡이 무슨 곡인가? 그 곡이 타이틀 곡이 되어야겠군.”“그런데 그게 또 쉽지가 않습니다.”
“쉽지 않다니?”
“이런 결과는 저도 처음이라서……. 2차 분석 결과가 나오면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사원이 2차 분석 결과지를 가져오자 팀장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한 부씩 나눠 줬다.
해리는 안경을 꺼내 결과지를 훑어보고는 다시 안경을 벗어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며 팀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본격적인 팀장의 설명이 시작됐다.
“이번에 실시한 모니터링 방식과 결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팀장은 참석자들을 쭉 둘러본 후 해리에게 시선을 맞췄다.
“이번 앨범은 정통 재즈 앨범이 아니기에 모니터링 집단을 재즈 마니아가 아닌 층까지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2차로 재즈에 흥미를 두지 않는 직업군과 학생들에게까지 모니터링을 실시했습니다.”
“결과는?”
“아주 긍정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홍보 방향은 재즈에 국한하지 않고 새미 재즈를 즐기는 집단과 팝 음악을 즐기는 집단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게 좋다는 의견입니다.”“플랫폼을 늘리자는 얘기군.”“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연령층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반해 다른 흥미로운 결과도 있습니다.”
“말해 봐.”
해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다리를 꼬았다.
“보시다시피 연령과 상관없이 재즈를 선호하는 집단에서는 ‘Film music without film’ 이 압도적이었고, 그렇지 않은 일반 집단에서는 ‘Sleepless In Island’가 높게 나왔습니다.”“흥미롭군. 전체 평균치는?”
“동일합니다.”
“동일?”
“네, 신기할 정도로 42대 42, 똑같이 나왔습니다. 나머지 16은 ‘Two People In London’이 차지했습니다.”“그래서 타이틀 곡 선정이 어렵다는 얘기였군.”“맞습니다. 이런 결과 또한 이례적입니다.”“이례적인 게 많군. 계속해 보게.”
해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시 수염을 쓰다듬었다.
“연령별 분석표를 보시면 ‘Film music without film’은 30대, 40대에 집중된 반면, ‘Sleepless In Island’는 20대에 집중됐습니다.”“20대에 집중된 원인은?”“재즈의 형식을 띠면서도 재즈답지 않은 몽환적인 분위기 연출과 가사가 주는 판타지스러움이 크게 어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젊은 층에 부는 판타지 열풍이 한몫한 거네?”“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니터링 결과지를 분석해 보면 이들 연령층의 대부분이 팝과 락을 선호하는 사람들입니다.”“홍보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다는 얘기군.”“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니터링 결과에 관한 팀장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잠재적 구매 고객 분석과 경쟁이 예상되는 뮤지션까지, 거기에다가 초기 반응에 맞춰 2차 홍보 접근법까지 세밀하게 프레젠테이션했다.
괜히 세계적인 음반 회사가 아니었다.
“음…….”
하지만 설명을 들을수록 타이틀 곡 선정은 더 어려워졌다.
두 곡이 박빙이었기 때문이다.
해리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작곡자의 코멘트는 전혀 없었나?”“회사가 ‘Film music without film’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그 음악에 좀 더 힘을 실었다고 했습니다.”“그럼 타이틀 곡은 우리가 투표로 결정해야겠군.”
“그렇습니다.”
“오케이, 잠시 커피 브레이크를 갖고 계속하세.”
해리는 복도로 나와 음료수를 들고 서성였다.
타이틀 곡은 앨범의 성패를 가른다. 잘못 선정했을 경우 비난이 쏟아진다.
어깨가 무겁다.
* * *
다시 회의가 시작됐다.
그런데 조금 전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까는 보고를 받는 자리였다면 지금은 해리가 주도권을 쥐고 진행했다.
그만큼 타이틀 곡 선정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투표하기 전에 먼저 지난 사례를 말해 봐. 이런 경우 어디에 중점을 두고 결정해야 하지?”“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시장의 트랜드이고, 두 번째는 곡의 확장력. 마지막으로 가사의 생명력입니다.”
해리가 묻자 팀장은 미리 답변을 준비하기라도 한 듯 또박또박 대답했다.
해리가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지금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영상매체. 즉, 트렌드를 이끄는 매체에 편승하기 좋은 음악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음악 자체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강력한 힘이 있는지도 판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사가 사회 이슈와 맞아떨어진다면 여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소비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 힘을 싣습니다.”“그렇지. 잘 말했어.”
막힘없이 또박또박 말하는 팀장을 보며 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Film music without film’과 ‘Sleepless In Island’, 두 가사를 비교해서 설명해 보겠나?”
“네.”
해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팀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Film music without film’은 앞을 못 보는 소년이 산속으로 트래킹(Tracking)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산속에서 처음 마주하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소년은 자신이 상상하는 모습을 눈앞에 그리죠. 그리고…….”
팀장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설명을 들은 해리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메시지가 뭐지?”
“소년이 느끼는 자연은 눈 뜬 우리가 보는 자연보다 더 아름답다입니다.”“때론 볼 수 없어서 더 아름답다. 그런 뜻이지?”“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팀장은 해리의 간결한 표현에 격하게 공감했다.
해리는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난 이 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작곡가가 앨범 제목을 ‘ABYSS’라고 붙인 것에 크게 공감했어. 우리 마음속에 심연, 가장 깊은 곳에서 보는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와닿더라고.”
해리의 말에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끄덕였다.
해리는 그 모습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처음 음악을 들었을 때, 난 음악이 가사를 확 감싼다는 느낌이 들었어. 음악이 가사를 품는다고 할까? 그런 강한 인상을 받았어.”“네, 저도 그랬어요.”
해리의 말에 몇몇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가 다시 몸을 돌려 팀장을 봤다.
“계속해 보게.”
“네.”
팀장은 다시 다음 가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환상의 섬을 찾아다니는 남녀의 이야기가 담긴 ‘Sleepless In Island’는 장르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합니다. 스릴러, 미스터리에 판타지까지. 거기에다가 지구 온난화 메시지도 담겨 있어서…….”
팀장은 막힘없이 술술 설명을 해 나갔다.
철저히 준비한 모습이었다.
설명을 마치고 다시 해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판단할 수 없다’입니다.”
“판단할 수 없다?”
“네, 모니터링 결과까지 우열을 가리기 힘드니까 우선 투표로 타이틀 곡을 정하고, 그다음에 순차적으로 홍보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그래. 듣고 보니 그렇겠군.”
팀장의 말에 해리도 공감했다.
영국은 확실히 가사에 비중을 많이 둔다.
물론 음악이 중요하지만, 가사도 그에 못지않다.
세계적인 가사가 영국에서 많이 나온 게 바로 이런 이유다.
“제 프레젠테이션은 여기까지입니다.”
팀장이 설명을 마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깔끔한 설명을 들은 해리가 웃음을 보였다.
“굿, 아주 좋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지?”“……한가지 더요?”
칭찬을 받고 입이 벌어지던 팀장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잘 생각해 봐. 내가 지난 미팅에서 강조한 기억이 있어.”“……아! 작곡가의 성향!”
팀장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작곡가의 매인 성향이 잘 드러난 곡에 힘을 실어야 합니다.”
“이유는?”
“당장은 흥행이 미흡하더라도 나중에 작곡가가 유명세를 타면 지금 곡도 같이 따라서 관심을 끌게 되고 그건 곧 수익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해리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작곡가 용수철에 대한 자료가 충분치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거 말고는요.”“오디션 프로그램?”
“네.”
“흥미롭군, 이런 작곡가가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니. 어쨌든 작곡가의 메인 성향은 알 수가 없다는 얘기네?”“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든 음악을 들어 보면 매우 놀랍습니다.”
“어떤데?”
“특정 장르를 규정짓긴 힘들지만, 굉장히 공격적인 시도를 많이 합니다.”
“공격적인 시도?”
“네, 뭔가 종합 예술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어떤 음악인지 궁금하군.”“회의 후에 들려드리겠습니다.”“그래, 그럼 작곡자의 성향은 그 정도로 하고.”
해리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제 투표를 시작해 볼까?”
“네.”
해리가 말하기 무섭게 투표가 시작됐다.
투표랄 것도 없이 곡명을 부르면 손을 드는 다수결 방식이었다.
긴 설명에 비해 투표는 순식간에 끝났다.
“타이틀 곡은 ‘Film music without film’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결과는 6 대 5로 박빙이었다.
젊은 사원들은 ‘Sleepless In Island’를 선택했지만, 해리를 비롯한 간부들은 ‘Film music without film’을 선택했다.
노련한 간부들답게 연령대별 구매력에 중점을 둔 결과였다.
ECM의 주 고객은 30, 40대이다.
* * *
“처음 들었을 때는 음악이 뭔가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게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두 번째 들었을 때 오히려 처음 듣는 것처럼 신선하고 상쾌한 느낌이었어요.”
“의외네요.”
임원중 한사람이 ‘ABYSS’에 대한 평을 내놓자, 해리가 신기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임원이 입을 열었다.
“저도 신선한 느낌에 동의해요. 그리고 저는 음악을 들으면서 어릴 때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어떤 생각이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바람 부는 날이면 언덕에 올라가서 재밌는 이야기를 해 주셨거든요. 이 앨범이 딱 그랬어요. 언덕 위에서 이야기를 듣는 그런 기분이었어요.”“힐링이 되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맞아요. 그래서 지금도 매일 듣고 있어요.”“중독성도 있다는 얘기고요.”
해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평가를 내놓는 게 흥미로웠다.
정작 해리가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들과 느낌이 달랐다.
‘알 수 없는데 알고 싶음.’
그런 느낌이었다.
분명 자신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리도 매일 듣고 있다.
수철의 앨범엔 중독성이 있다는 얘기다.
음반사 임원이 발매도 되지 않은 음악을 매일 듣고 있다는 것도 희귀한 일이다.
“돌아 보니까 어땠어?”
해리는 해외사업부 동아시아 담당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철의 앨범과 동아시아를 연결 지어 묻는 것이었다.
해리의 기대 섞인 물음에 비해 담당자의 답변은 냉랭했다.
“변화가 없습니다.”
“그렇군.”
해리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래서 홍보 계획은?”“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기본 유통만 잡고 있습니다.”“다른 나라를 다 합쳐도 일본만큼의 매출이 안 나오니까?”“그렇습니다. 단일 국가로는 미국 다음으로 큰 시장이니까요.”
담당자의 말에 해리가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동아시아 시장이 나아지지 않고 있군. 한국은 어때?”“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은 특별한 접근법이 없습니다.”“그렇군, 거기도 시장 상황이 열악하군.”
해리의 표정이 무거워지자 동아시아 담당자가 새로운 가능성을 내놨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눈여겨볼 부분은 있습니다.”
“말해 봐.”
“최근 들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 재즈 페스티벌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직은 완전한 재즈 페스티벌의 형태를 띄진 못하지만, 미래를 기대해 볼 만합니다.”“아티스트들이 페스티벌에서 활동하게 되면 상황이 호전될 수도 있다는 얘기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접근법이 없다는 얘기고?”
해리가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그럼 우선은 유럽에 집중하고, 시장이 움직이는 것을 봐서 미국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야겠군.”“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
“이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식?”
“작곡자가 숨겨진 천재랍니다.”
“천재?”
“네,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데, 천재라서 여기저기서 군침을 흘리고 있다고 합니다.”
‘음, 그래서 그랬었나?’
처음 음악을 들었을 때 자신을 끌어당겼던 힘이 생각났다.
그때 임원중 한 명이 무릎을 탁 쳤다.
“맞아요, 말하기 뭐해서 안 했지만 나도 들을수록 현대판 베토벤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말에 옆의 임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분명 예사롭지 않은 작곡가라고 생각했어요. 앨범 제목 그대로 음악에 ABYSS가 느껴졌어요.”
모두 각각의 표현으로 음악에 드러나는 천재성에 동의했다.
이 모습을 보던 동아시아 담당자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 앨범이 공식적인 첫 앨범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해리의 눈빛이 심오해졌다.
“그랬었군. 그래서 경력과 자료가 드러나지 않은 거였군. 흥미로운 사실이야, 첫 앨범이 한국이 아니라 영국이라니.”
해리는 몸을 세워 의자를 당겨 앉았다.
“예산 조율해서 아시아 지역 홍보에 좀 더 힘을 실을 방법을 모색해 봐.”
“네.”
“온, 오프 매장 확대하고, 각 플랫폼마다 신보 발매 이벤트를 진행해서 아티스트를 최대한 노출하고.”
“알겠습니다.”
해리는 담당자에게 주문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는걸.”
오랜 경험에서 오는 직감.
그 직감으로 뭔가 냄새를 맡았다.
대박의 냄새를.
해리는 턱을 괸 채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