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01화 (101/239)

#101화. 개념을 잡다

아침부터 지우의 보컬 녹음이 시작됐다.

“몸에 힘을 빼고 다시 불러 볼래?”

수철은 지우의 여린 보이스 특성을 고려해 짧은 시간에 최상의 소리를 끄집어내려고 했다. 가장 맑은 물을 모으듯이 가장 좋은 소리들만 걷어 내려고 집중했다.

하지만 지우는 긴장을 한 탓인지 오전 내내 컨디션 난조를 보였다.

“음.”

여린 보이스의 특성상 장시간 녹음은 불가능했다.

수철은 녹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먹고 하는 게 어떨까요?”

수철의 요청에 사람들은 녹음실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길을 걷던 이 실장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공연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돼요. 목이 저렇게 약해서 말이에요.”

이 실장은 지우의 보이스 성향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우의 성대가 약해서 장시간 공연을 하기엔 무리라는 생각이었다.

행사로 돈을 벌어야 하는 이 실장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보이스가 여리다고 해서 꼭 장시간 공연이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지우는 계속 성장 중이잖아요.”

여린 보이스가 성장하면서 허스키 보이스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경험 많은 보컬 트레이너들은 여린 목소리를 호소력과 연결시키곤 한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나오는 짙은 허스키가 호소력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호소력은 보컬에게 엄청난 강점이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눈물을 짜내기에 발라드에선 호소력을 흥행의 척도로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린 보이스가 거기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린 지우에게는 먼 얘기일 수 있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조바심을 내다가는 그건 오히려 지우에게 독이 될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감을 잃으면 영원히 노래를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지우는 갈수록 보이스에 힘이 붙으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무조건 지우를 믿고 응원할 때이다.

수철은 표정이 좋지 않은 이 실장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녹음과 공연은 다르니까요. 그리고 지우가 열의가 있어서 충분히 잘 해낼 거예요.”

“그럴까요?”

“네, 갈수록 보이스도 탄탄해질 거예요.”“수철 씨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안심이 되네요.”

이 실장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 * *

“자, 다시 가 볼까?”

점심을 먹고 힘을 충전해서 다시 보컬 녹음을 시작했다.

“지우야, 컨디션 어때?”

“좋아요.”

오전 녹음은 컨디션 난조로 실패했지만, 오후 녹음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점심을 먹고 힘이 붙어서인지 양질의 보이스가 녹음 트랙에 잘 들어왔다.

덕분에 오후 녹음은 빠르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우려했던 것보다 소리가 잘 들어오자, 무거웠던 녹음실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특히 이 실장이 기뻐했다.

“오전과 오후가 이렇게 다르다니, 역시 노래는 밥심으로 하는 거네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컬 트랙만 정리하고 오늘 녹음은 마칠게요.”

수철은 내일 빠르게 믹싱을 진행할 수 있게 미리 보컬 트랙을 정리했다.

* * *

“어쿠스틱 기타 리듬이 좀 더 찰랑찰랑한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요.”

“네, 해볼게요.”

다음 날 바로 믹싱이 진행됐다.

수철은 머릿속에 구상했던 음악 색깔을 구체화해 나갔다.

“이번엔 북소리에 리버브(Reverb, 잔향)를 조금 걸어 주시고요.”

“네.”

수철과 엔지니어는 몇 번의 녹음 만에 서로 손발이 착착 맞았다.

수철은 필요한 요구만 간단하게 하고 큰 흐름은 건들지 않았다.

“이번엔 C섹션 도입부 보컬 3마디를 카피해서 아래 트랙에 붙여 주세요. 볼륨은 줄여 주시고, 거기도 리버브를 걸어 주세요.”“코러스 효과를 주는 건가요?”

“네, 맞아요.”

믹싱에서도 수철의 아이디어는 빛났다.

시간이 갈수록 입체감은 더 선명해지고 다채로워졌다.

“대단해.”

더 이상 발전할 게 없을 것 같았던 음악은 계속 발전해서 이제는 세련미까지 갖췄다.

수철의 의도에 따라 빠르게 손을 놀리는 엔지니어의 눈이 반짝였다.

입가엔 미소를 머금었다.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발 떨어져서 음악이 진화하는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관계자가 아니라 구경꾼들 같았다.

“좋습니다. 굿이에요.”

이 실장은 수철이 물을 때마다 엄지를 세우며 좋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부분은 페이드 아웃(fade out)시켜 주세요.”

“네.”

수철의 요청에 맞춰 엔지니어는 마우스로 마지막 부분의 소리를 점점 줄여 나갔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이런 믹싱은 처음이에요.”

“네? 그게 무슨?”

수철이 갸웃하며 물었다.

엔지니어는 빙그레 웃었다.

“딱 필요한 것만 녹음해서 편집할 것이 없어요. 버릴 것도 없고요. 금방 끝나겠어요.”

엔지니어의 말처럼 믹싱은 반나절도 안 돼서 모두 끝났다.

더하려고 해도 더 할 게 없었다.

음악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잘빠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리메이크가 아니라 완전 새로운 곡인데? 죽었던 곡이 다시 살아났어.”

박 대표는 지난 앨범과 오늘의 믹싱을 그렇게 비교했다.

“커피나 한잔하시죠?”

믹싱이 일찍 끝난 탓에 소파에 모여 잡담을 떨었다.

한참 예민할 믹싱 시간이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날카롭고 날 선 대화들은 사라지고 웃음꽃이 피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이 모두가 수철이 딱 필요한 것만 녹음한 탓이었다.

“점심이나 먹고 헤어질까요?”

이 실장의 말에 잡담을 떨던 사람들은 우르르 점심을 먹으러 몰려 나갔다.

“처음 악기 녹음할 때부터 이미 믹싱까지 다 된 거 같아요.”

쌈에 고기를 싸던 엔지니어는 모처럼 남아도는 시간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좀 아쉬운데…… 디저트까지 먹고 헤어질까요?”

일찍 끝났으니 디저트까지 먹고 가자는 이 실장에게 끌려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길을 걷던 이 실장이 어깨를 붙여 왔다.

“수철 씨, 믹싱할 때 있잖아요?”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설명해 주는데 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전문 용어는 잘 몰라서요.”“어떤 부분이 궁금하신데요?”“무슨 생각을 하며 믹싱을 하길래 저렇게 음악에 광(光)이 살아나는지 궁금해요.”“믹싱의 의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디에 중심을 두고 믹싱을 하는지요?”“네, 제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좀 해 줘요. 수철 씨는 왠지 그게 가능할 거 같은데요.”

수철은 잠시 생각하다 이 실장의 눈높이에 맞춰 얘기를 시작했다.

“믹싱을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그림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림이요?”

“네, 녹음이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거라면 믹싱은 그 그림을 사람들이 보기 좋게 액자를 만들고 벽에 붙이는 거예요. 그림과 음악이 다른 점은 물감으로 그렸냐, 소리로 그렸냐의 차이일 뿐이죠.”

“아…….”

이 실장은 이제야 이해가 가는지 길게 탄성을 내며 끄덕였다.

“그럼 마스터링은요?”“마스터링은 벽에 붙인 액자를 수건으로 한번 깨끗하게 닦아 주는 거죠. 그러면 보기도 좋고 기분도 좋잖아요. 소리도 그렇게 한번 닦아 주고 나면 듣기도 좋고 기분도 좋아지거든요. 헤헤.”

수철은 자신의 표현이 간지러운지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런 거였군요.”

이 실장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계속 말을 붙였다.

“그렇게 말해 주니까 머릿속에 개념이 확 잡히네요. 그동안 사람들은 왜 그렇게 어렵게만 말했는지……. 아마 그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었나 봐요.”

“…….”

“암튼 쉽게 설명해 줘서 감사해요. 덕분에 답답함이 해소됐어요. 정말 고마워요.”

이 실장은 눈을 마주치며 진심으로 고맙다는 눈빛을 보였다.

수철은 이 실장이 믹싱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자, 이번 음악의 믹싱 의도를 말했다.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가사와 지우의 목소리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가사가 순수한 소녀의 감성을 얘기하는 거니까요.”“맞아요, 저도 그 부분을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 실장도 공감하며 끄덕였다.

“네, 그래서 그 부분을 잘 살리려고 했어요. 반주는 튀지 않게 지우의 목소리를 받치게끔만 구성했고, 그러면서도 입체감을 실어야 하기에, 다양한 악기들이 각자 제 역할을 하게끔 했죠.”

“아…….”

이 실장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림으로 말하면 반주는 가사를 부르는 지우의 배경으로 쓴 거예요. 악기는 물감처럼 각각의 색깔을 섞은 거고요.”

“아, 그렇군요.”

이 실장은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해가 빠른 거 같았다.

수철이 눈을 맞추며 물었다.

“혹시 콘트라베이스가 나오는 부분에서 머릿속에 손가락이 그려지지 않으셨나요?”

그 말에 이 실장이 격하게 동의했다.

“네, 맞아요. 연주자가 콘트라베이스를 손에 잡고 현을 튕기는 것 같았어요.”

수철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섬세하게 현을 터치하는 소리를 준 것도 지우의 목소리가 여리지만 섬세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예요.”

“아, 그렇군요.”

“그리고 바람 소리가 등장해서 이리저리 움직인 것도 보이스를 도드라지게 하려는 목적이었고요.”

그 말에 이 실장은 아까 들었던 음악이 떠올랐다.

수철의 설명을 들으니 음악이 좀 더 생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설명을 들으니까 음악이 좀 더 새롭게 느껴져요. 그리고 음악과 그림은 연관성이 참 많은 거 같아요. 같은 예술이라서 그런가 봐요.”“네, 많은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고 생각해요.”

수철도 이 실장의 말에 공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악기 소리로 산, 하늘, 구름, 언덕 같은 배경을 만들면, 그 배경 앞으로 지우가 뛰어나와서 신나게 노는 거죠. 가녀린 소녀가 다양한 악기와 뒤섞여 해맑게 웃으며 뛰어놀다 보면, 해가 질 때쯤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이 등장해서 소녀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는 거죠.”

수철이 전체 그림을 묘사해 주자 이 실장은 감탄하며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소리 없는 아우성 같았다.

그리고 수철이 묘사한 그림은 이 실장의 머릿속에 그대로 각인되었다.

이 실장은 대꾸 없이 존경스러운 눈으로 수철을 바라봤다.

그러다 잠시 후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예전에 박 대표님이 소리로 기승전결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셨을 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비웃었어요. 대표님이 음악을 잘하는 걸 알면서도 잘난 척하는 것 같아서 반감이 들었거든요. 그때 생각하면 너무 창피하네요.”

“…….”

“그리고 솔직히 믹싱도 오늘처럼 지켜본 건 처음이에요. 봐도 모르니까 그냥 맡겨 놓고, 믹싱 끝나면 가서 한번 들어 보는 게 전부였거든요.”

이 실장은 느닷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푸념을 했다.

왜 갑자기 자기 고백을 하는지 의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실장이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음악 과정에 대한 개념이 잡히니까 덩달아 다른 것까지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수철은 말없이 깊은 미소를 보였다.

깨달음은 언제나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바닐라 먹을 사람?”

“저요!”

“초코 먹을 사람?”

“저요! 저요!”

달달한 초코 아이스크림이 입에 듬뿍 들어가자 이 실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입가에 묻은 검은 아이스크림을 문지르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 * *

음악은 프로듀싱, 믹싱, 마스터링의 세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 완성된다. 간혹 믹싱으로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세 과정을 거친다. 프로듀싱에서는 악기 소스를 받아서 모으고, 믹싱에서는 편집하며 밸런스를 잡고, 마스터링에서는 음량 확보와 음색을 조정한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반갑습니다, 대표님. 잘 지내셨죠?”

마스터링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사장이 직접 나와 박 대표를 반갑게 맞이했다.

“지난번 앨범 끝나고 처음 뵈니까 2년 정도 됐군요.”“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이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네요. 하하.”

박 대표의 말에 사장은 너스레를 떨었다.

둘은 꽤 오래된 친분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난 앨범의 성과에 관한 얘기도 나눴다.

“자,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서로 인사를 나누고는 사장이 스튜디오 안으로 안내했다오늘 마스터링은 사장이 진행한다.

다른 엔지니어도 있지만, 박 대표의 요청에 따라 사장이 직접 하기로 했다.

―오늘 마스터링 할 분은 말이야…….

스튜디오에 들어서기 전 박 대표는 오늘 마스터링을 할 엔지니어가 대한민국 최고라고 칭찬했다.

마스터링한 OST가 외국에서 크게 히트 친 덕분에 세계 유명 음악 잡지에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실렸다고 했다.

스튜디오 한편에 놓인 유명 영화제의 상패가 박 대표의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번 음악은 대표님 스타일이 아니던데요?”

작업에 앞서 장비를 만지던 사장이 물었다.

“네, 제가 만든 음악은 아닙니다. 전 녹음에만 관여하고 있죠.”“그럼 제작만 하시는 건가요?”“그것도 아닙니다. 여기 이 실장이 제작하는 건데, 제가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 말에 사장은 이 실장을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음악 듣고 엄청 놀랐습니다. 멜로디 라인은 가요 같은데, 편곡과 악기 구성은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구성이더군요. 신선함을 넘어 충격이었어요. 해외 팝 시장에 내놔도 충분히 먹힐 거 같던데요?”

그 말에 이 실장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심 봉사가 번쩍 눈을 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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