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행복한 라이프
수철이 음악을 만든 유명 자동차 회사의 광고.
H사의 신상품 ‘유니버셜’이 빠른 시간에 역대급 판매고를 기록했다.
회사에서 마케팅팀에 특별 보너스를 지급할 정도로 인기가 폭발했다.
자동차를 잘 만들어서 인기를 끌었겠지만, 여기에 광고 음악도 한몫을 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광고 음악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습니다. 소비자들이 음악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볼 정도라고 합니다.”
담당자인 민 과장이 광고사에서 들은 얘기를 전해 왔다.
음악 구매를 하고 싶어서 문의도 빗발친다고 했다.
광고사에서는 앨범으로 발매할 생각이 없냐는 제안도 해 왔다.
프로모션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아니요, 그럴 생각은 없어요.”
수철은 단박에 거절했다.
수철에게 광고 음악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궁금해하는 소비자나, 물어 온 광고사에는 미안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수철은 TV를 보지 않기에 광고를 볼 일이 없지만, 어느 날 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대형 전광판에 나오는 광고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봤다.
위이이잉― 촤앙― 우웅―
늘씬하게 잘빠진 몸매의 자동차가 불빛이 반짝이는 한강 위를 달려갈 때 멀리서 들려오는 거칠고 장엄한 기타 소리.
그 소리는 자동차의 매끈한 옆모습이 지나가는 순간, 시원한 바이올린 소리로 바뀐다.
그리고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고음의 멜로디 속주는 자동차의 스피드감을 더해 준다.
자동차의 뒷모습이 사라지면서 화면 아래에 나타나는 글자.
[음악, SC11]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등을 돌렸다.
SC11은 음악을 만든 사람의 이름, 바로 수철이다.
SC는 수철의 이니셜이고, 11은 수철이 태어난 달이다.
오디션 방송이 나가고 얼마 후 만든 광고 음악이라 수철은 이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했다. 그래서 광고사에서 대안을 제시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예명이 자동차 시리즈 이름이랑 비슷하네요. 하하.”
SC11이라는 이름이 자동차 제목이랑 비슷하다며 광고사에서 좋아했다.
하지만 수철에겐 그닥 좋은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이름 덕분에 사람들은 광고 음악을 만든 사람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 뮤지션일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민 과장님이 강력 추천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자동차에 실린 광고 음악이 주목을 받자, 흐름을 타고 같은 그룹의 계열사인 보험사에서 연락해온 것이다.
―광고사에서도 선생님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해서 내친김에 바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이번 광고는 자동차 광고를 맡은 광고사와는 다른 광고사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민 과장이 강력히 추천하자 보험사 담당자가 그 말을 광고사에 전하고 광고사도 그 음악을 알고 있는지라 선뜻 만나겠다고 한 것이다.
―괜찮으시면 저희 본사로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담당자는 보험사 본사로 방문하길 요청했다.
그곳의 마케팅 사업부에서 광고사와 같이 미팅을 진행한다고 했다.
담당자는 광고주가 음악을 요청하면 작곡가는 당연히 승낙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얘기했다.
돈이 되는 광고 음악을 거절한 작곡가는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곳 생태계의 습성이다.
하지만 수철은 계속 광고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다.
혼자서 앨범을 발매해도 될 정도로 돈을 충분히 모았고, 편곡 작업만으로도 생활이 넉넉한 상황이다.
물론 광고 음악이 가장 많은 돈을 받기는 하지만 그만큼 신경 쓰이고 번거롭다.
무엇보다 돈 버는 것에 발목 잡히는 게 싫었다.
‘음. 어떻게 할까?’
수철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그런 딱딱한 회사 건물에 들어가는 것이 싫고, 낯선 사람들과 모여서 미팅하는 자리에 가는 것도 불편하지만, 민 과장이 지금까지 배려해 준 게 마음에 걸렸다.
수철을 믿어 주고 최상의 작업료를 준 사람이다.
‘음.’
음악을 만드는 건 어려울 것이 없다. 별도의 시간을 만들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고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틀 후에 가겠습니다.”
회사로 방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틀 후,
‘여긴가?’
왕복 8차로 도로변에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높은 건물 앞에 다다랐다.
보험사 이니셜이 박힌 로고가 보였다.
잠시 머뭇하며 빌딩을 올려다보다가 회전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누군가 수철을 한눈에 알아보고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SC11 님, 아니, 용수철 음악가님.”
가까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내밀었다.
“본명을 불러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시죠? 저는 마케팅팀 대리 임석준입니다.”
임 대리는 인상 좋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민 과장에게 들어서 수철의 본명을 알고 있었다.
계약서를 작성하기에 본명은 노출될 수밖에 없다.
수철도 같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본명을 부르시는 게 편합니다. 그런데 저는 명함이 없는데 괜찮나요?”“괜찮습니다. 제가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니까요. 자, 가시죠.”
임 대리는 친절하게 수철을 엘리베이터 앞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가시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커다란 미팅룸으로 들어가니 분위기가 사뭇 다른 몇 명이 앉아 있었다.
광고사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보험사 직원과 다르게 복장이 자유로웠다.
“이번 광고의 모델은 사극에서 왕비로 유명해진 유설향 씨입니다. 인자한 미소로 이미지가 좋으신 분이죠.”
수철은 그 배우가 누군지 모른다.
인자한 미소라고 하니 느낌이 좋은 배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 단발이고요, 그리고 광고의 컨셉은…….”
광고사 과장이라고 밝힌 사내는 광고의 컨셉에 대해서 쭉 설명했다.
6개월간만 노출되고, 인자한 미소의 여배우가 아이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한다는 내용이었다.
[행복한 라이프, 우리가 전합니다.]
이것이 카피 문구였다.
“여기 자료들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과장은 광고와 관련한 자료들을 내밀었다.
자료에는 사진 컷으로 광고가 찍혀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은 모니터링을 위해서 대신 찍은 광고사 직원이라고 했다.
“지난번 ‘유니버셜’ 광고 때 특별한 가이드라인 없이 작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진행하시면 됩니다.”
알아서 만들어 달라고 했다.
1차적으로 작곡가의 자유로운 창작력에 기대를 걸고, 모니터링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때 2차로 준비된 가이드라인을 들이밀겠다는 뜻이었다.
광고사의 이런 생리는 박 대표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음악은 각기 다른 3가지 버전으로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선별해 영상에 붙일 겁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음악에 대한 편집은 저희가 자율적으로 진행할 겁니다. 계약서에도 그렇게 명시될 겁니다.”
“네.”
* * *
수철은 돌아오는 버스에 앉아서 받은 자료를 뒤적였다.
광고 컨셉에 피아노가 어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라이프, 우리가 전합니다.’라는 카피 문구가 ‘행복한 라이프, 피아노가 전합니다.’로 보였다.
다른 악기를 뺀 오직 피아노 현의 울림으로만 선율을 만드는 게 어울려 보였다.
따뜻한 피아노의 선율이 주는 행복.
수철은 버스 창밖으로 비치는 노을을 보며 피아노 선율을 그려봤다.
* * *
작업실에 돌아오자마자 수철은 버스 안에서 구상한 피아노를 연주했다.
행복한 라이프에 어울리는 행복한 피아노 연주.
‘꽤 괜찮은 거 같은데.’
광고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광고사가 어떻게 평가할지는 미지수였다.
수철은 계속해서 각기 다른 3가지 버전으로 연주를 해 봤다.
그리고 잠시 차를 마시며 자신의 연주를 머릿속으로 모니터링을 해 봤다.
그러다 프로그램을 켜고 본격적으로 연주를 녹음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지 피드백 부탁드려요.
광고사가 생각하는 방향과 분위기가 맞는지 피드백을 받기 위해 녹음한 피아노 연주를 보냈다.
* * *
이메일을 확인하고도 답변이 없더니 며칠 뒤 대뜸 전화가 왔다.
―호불호가 갈려서 선택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첫 번째 곡을 이번 광고에 음악으로 쓰고, 나머지 두 곡은 해외에 나가는 광고에 쓰기로 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방향이 맞는지 피드백을 요청한다고 샘플을 보낸 건데.
그것도 전부가 아니고 편집해서 일부분만 보낸 건데.
수철은 당황스러웠다.
한 곡도 아닌 세 곡을 다 쓰겠다니.
여기에 광고사 과장은 한술 더 떴다.
―작곡비는 50% 인상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
3곡이래 봤자 고작 30분 정도 걸린 건데 작곡비를 더 올려 주겠다니?
―3가지 버전이 각각 클래식, 재즈, 뉴에이지 팝 스타일 맞나요?
수철은 장르에 상관없이 행복한 라이프에 대한 느낌을 각각 3가지 형태로 표현했다. 그런데 담당자는 장르를 나눠서 물었다.
하지만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네, 장르를 따지자면 그렇게 볼 수 있어요.”
수철이 대답하자 과장은 바로 말을 붙였다.
―피아노 선율이 주는 따뜻한 행복감이 놀라웠습니다. 선율이 딱 저희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만족했습니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샘플로 보낸 3곡을 모두 사용하고 작곡비까지 올려 준다니.
수철은 의구심에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네, 저희도 본사에서도 모두 만족합니다.
회사와 광고사 관계자들이 미팅하며 음악을 들었는데 모두 만족했다고 했다.
광고에 실을 음악을 선택하느라 설전까지 벌였다고 했다.
그래서 연락이 늦었던 것이었다.
―선발되지 못한 곡은 너무 아쉬워서 회사 홈페이지나 소개 영상에 싣자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시아와 유럽에 각각 나머지 두 개의 음악을 싣고 한국과 미국에는 최종 선택한 음악을 싣자고 결정했습니다.
수철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분 띵띵거린 게 전부인데?’
수철의 생각으론 뼈대만 보낸 건데 전 세계로 내보낸다니.
수철은 미안한 마음에 정한 금액만 받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50% 인상은 결정 난 것이니까 부담 없이 받으셔도 됩니다.
과장은 반대로 수철이 돈을 더 올려 달라고 할까 봐 걱정한 모양이었다.
수철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네, 그렇게 말씀하시면 편하게 받을게요. 그리고 음악은 그랜드 피아노로 다시 녹음해서 보내 드릴게요.”―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하나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이요?”
―보내 주신 피아노 연주를 들어 보니 모두 주제가 다른 거 같은데, 혹시 하나의 주제당 하나씩을 더 추가해서 보내 주실 수 있나요?
“6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네, 피아노 소품으로 보면 한 작품당 하나의 변주곡을 추가하는 형태 말입니다. 너무 빨리 작업을 하셔서 혹시 가능할까 여쭤본 건데 지나친 부탁일까요?
선택의 폭을 넓히겠다는 거다.
6개의 버전을 요구하다니.
“음…….”
보통의 경우로 보면 지나친 부탁이 맞다.
하지만 세 곡을 모두 광고에 내보내겠다고 하고, 무엇보다 하나씩 변주곡을 추가하는 건 수철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흔쾌히 승낙했다.
“그럼 같은 주제를 변주시킨 클래식 1개, 재즈 1개, 뉴에이지 팝 스타일 1개를 추가해서 보내 드리면 되는 거죠?”―네. 맞습니다. 그리고 연주를 편집하지 마시고 전체로 보내 주세요.
“전체요?”
―네, 전체로 보내 주시면 저희가 편집해서 쓰겠습니다. 선생님이 편집해서 보내셔도 저희가 다시 편집하니까요.
“알겠어요. 그럼 몇 분 정도를 연주해서 보내 드릴까요?”―곡이 정해진 길이가 없는 거죠?
“네.”
―그럼 짧은 피아노 소품 정도의 길이에 맞춰주시면 어떨까요?
“짧은 소품이라고 해도 길이가 다양한데요.”―5분 정도면 어떨까요?
1분 정도면 충분한데 5분이라니, 과한 요구지만 어차피 그냥 느낌만 잡아도 5분은 되니까 오케이 했다.
“네, 그럼 5분 길이에 맞춰서 보내 드릴게요.”―알겠습니다. 언제까지 시간을 드리면 될까요?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곳에서 녹음해야 하니까, 내일 오후에 보내 드릴게요.”―내일 오후요? 와우―!
전화기 너머로 탄성이 들려왔다.
“……?”
―확인차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네, 말씀하세요.”
―지난번 3곡과 내일 보낼 3곡 모두 기존에 발매된 적이 없는 음악이지요?
“네.”
―그러니까 컨셉에 맞춰 즉흥으로 연주하신 거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후에 나올 음악을 기대하겠습니다.
수철은 전화를 끊고 담당자가 얘기한 대로 3가지 버전을 한 번씩 변주해 보았다.
연주해 보니 어쩌면 광고사에서는 변주된 버전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자의 요청 탓에 연주가 좀 더 다이내믹해졌기 때문이다.
수철은 다음 날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녹음실을 찾아서 6개의 연주를 녹음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편집하지 않고 점심 무렵에 음악을 담당자에게 전송했다.
* * *
이번에도 연락이 온 것은 며칠 뒤였다.
광고사 과장이 아니라, 보험사 임 대리였다.
―광고사에서 영상 촬영을 다 마쳤고, 가편집한 상태에서 음악을 붙여 봤습니다. 저희와 광고사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나중에 최종 편집본이 나오면 그때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어떤 버전을 선택했고, 어떻게 편집했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음악만 보내면 다 알아서 하는 상황이었다.
수철도 나쁠 건 없다.
그게 편하다.
―오늘 전화드린 것은 광고 때문이 아니고…….
임 대리는 느닷없이 다른 얘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