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VVIP(1)
―저희가 이번에 아주 소중한 고객님들을 모시고 VVIP의 밤을 엽니다.
VVIP라니.
수철에겐 낯선 단어였다.
“VVIP가 뭐예요?”
―소수의 상류층 고객을 칭하는 말입니다. VIP보다 한 단계 높다는 뜻이죠.
“…….”
―보험사의 특성상 저희에게 무척 소중한 분들이십니다.
수철은 임 대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VVIP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왜 그런 업무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음악 때문에 전화하신 게 아니라면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아, 네.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날 파티에 연주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연주요?”
―네, VVIP 고객님들이 선생님의 연주를 궁금해하시거든요.
“제 연주요?”
이건 또 무슨 소리?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그분들이 제 연주를 어떻게 아세요?”―그게 그분들이 촬영 현장을 방문하셨다가 우연히 선생님이 만든 음악을 듣게 됐습니다.
수철은 임 대리의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직원도 아니고 고객들이 유명 배우의 촬영 현장을 방문하다니?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이 어떻든 그건 수철이 상관할 바 아니다.
“제가 연주도 하지만 전문 연주가는 아니거든요. 필요하시면 좋은 연주가분을 소개해 드릴 수는 있어요.”―아니요, 선생님이 오셔야 합니다.
임 대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단호해서 당황스러웠다.
“아니, 왜 그렇게 강압적으로 말씀을 하세요?”―죄송합니다, 제가 급하다 보니까 말의 뉘앙스가 그랬습니다. 사과드릴게요. 부디 오셔서 연주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대단한 고객님의 요청이니 꼭 성사시켜야 할 과제라는 느낌이었다.
간곡하다는 말까지 붙이니 대놓고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음…….”
그때 시간이 비어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할 이유도 없었다. 내키지 않았다. VVIP라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한다는 것이 일단 불편했고, 게다가 연주는 그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호주 공연을 마지막으로 연주를 하지 않았다.
제시와 멤버들이 한국에 왔을 때조차 같이 공연을 안 했다.
이 실장의 앨범 녹음을 한 건 세션이었고, 광고 음악을 한 것은 작곡의 영역이었다.
수철이 대답하지 않고 망설이자 임 대리는 다시 적극적으로 부탁했다.
―출연료는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꼭 오셔서 연주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날짜가 언제인가요?”―날짜는 5일 후, 수요일 저녁 5시이고요. 장소는…….
장소는 H그룹이 소유한 특급 호텔의 꼭대기 층을 통째로 사용한다고 했다.
만찬을 겸한 파티였고, 피아노도 최상으로 세팅된다고 했다.
―음악을 들은 고객분들께서 피아니스트가 궁금하다고 특별히 초청을 요청했습니다.
임 대리의 얘기를 듣는 수철은 전혀 다른 세상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광고 촬영 현장을 방문하고, 특급 호텔의 꼭대기 층을 통째로 쓰며 만찬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니.
게다가 궁금한 아티스트가 있으면 회사가 발 벗고 나서서 섭외하고.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지 상상이 안 됐다.
“제가 하는 일이 있어서 먼저 상의를 해 보고 말씀드릴게요.”―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임 대리는 마지막까지 간절함을 보였다.
‘대기업이라는 회사가 그렇게 허술한 곳은 아닐 텐데.’
아직 완성도 안 된 광고의 음악이 함부로 노출된 것도 이해가 안 됐고, VVIP라는 사람들이 어떻길래 말 한마디에 임 대리가 이렇게까지 집착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수철은 전화를 끊고 박 대표에게 전화했다. 그날 연주를 하려면 적어도 3시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프로젝트 회의의 시간 조율이 필요했다.
* * *
“괜찮을까요?”
―편하게 해. 우리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시작한 거잖아.
“고마워요, 쌤.”
―고맙긴, 나도 그렇게 할 건데. 뭐.
수철은 편하게 시간을 조율해도 괜찮다는 박 대표의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끊자마자 바로 다시 전화가 진동했다.
자동차 광고 음악을 할 때 담당자였던 민 과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수철은 반갑게 받았다.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잘 지내시죠?
“네, 전 잘 지내요. 과장님도 잘 지내시죠?”―네, 저도 열심히 회사 다니고 있습니다. 하하.
민 과장은 크게 한번 웃더니 전화한 용건을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H보험 임 대리 연락을 받으셨죠?
“네.”
―임 대리가 이번에…….
자세한 얘기는 오히려 민 과장에게 들을 수 있었다.
임 대리가 이번 VVIP 행사의 진행을 맡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고객의 요구에 잘 맞춰 최선을 다하는 중이라고 했다.
수철의 연주 섭외를 지시한 것도 이사직을 맡고 있는 임원이라고 했다.
고객의 말 한마디에 예민한 부서라서 꼭 성사시켜야 할 과제라고 했다.
수철이 물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분들도 많은데, 왜 그분들이 저의 연주를 들으려고 하실까요?”
수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그건 아마 뉘앙스가 좀 와전되었을 거예요.
“와전이요?”
―네, 아마 VVIP 고객분들은 ‘연주자가 누군지 궁금하군요.’ 이 정도 뉘앙스로 말씀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그분들 기분 맞춘다고 이사님이 나서서 임 대리에게 특명을 내린 거죠. 아직 임 대리가 경험이 많지 않아서 얘기가 그렇게 확대된 겁니다.
어쩐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임 대리가 이번 행사를 잘 치러야 하거든요. 일종의 테스트라서요.
“테스트요?”
―선생님은 음악가라서 잘 모르시지만, 저희 조직에서는 그런 게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짬밥이 차면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거죠.
수철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테스트는 뭐고, 그게 연주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지.
―자칫하면 임 대리가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너그럽게 한번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민 과장은 아직 사회생활이 많지 않은 임 대리와는 대화의 전개가 달랐다.
그래서 임 대리가 노련한 민 과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같았다.
“과장님, VVIP라는 분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수철은 진심 그것이 궁금했다.
―저희랑 그쪽 회사랑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같은 계열사일 뿐, 업무 방식도 전혀 다르고요. 저희에겐 그런 VVIP가 없거든요.
“아, 죄송해요. 제가 괜히 여쭤봤네요.”―아닙니다. 궁금하실 만하죠. 일단은 제가 아는 선에서만 말씀드릴게요.
“네.”
―그분들은 겉으로만 보면 보통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나이 드신 어르신들일 뿐이지 대단하신 분들이라는 게 별로 표가 안 나요.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재력가들이십니다.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그러니까 당연히 회사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고객분들이시죠. 그리고 이분들은…….
특히 이 VVIP들은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음악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대중음악이 아니라, 클래식이지만.
여하튼 수철의 연주에 관심을 보인 것도 그런 이유라고 했다.
―이분들은 대단한 재력가답게 실제로 문화 재단에 기부도 많이 하십니다. 어려운 예술가들 후원 사업에도 돈을 많이 쓰시고요. 특히 뛰어난 클래식 음악가들은 성공할 때까지 밀어주십니다.
민 과장의 말을 듣고 보면 수철이 처음에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 사람들은 음악가에게 천사 같은 존재들이었다.
생활이 힘든 예술가들에게 후원과 기부라니.
―아마 만나 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절대 거들먹거리거나 갑질하시는 분들이 아니세요. 인상 좋은 이웃집 아저씨나 할아버지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민 과장은 수철이 가졌던 이미지를 바꿔 놓았다.
수철은 괜한 선입견으로 오해를 한 것이 오히려 미안해졌다.
―가끔 논쟁을 펼치시기도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점잖은 분들이세요. 아, 그리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엄청나십니다. 웬만한 평론가들 저리 가라 수준입니다. 촬영 현장에 구경 갔다가 선생님 음악을 듣고는 단박에 반응을 보이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유명 여배우 구경 갔다가 음악에 꽂히신 거죠. 하하.
여전히 촬영 현장에서 음악을 들었다는 거는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든 VVIP라고 불리는 이분들이 수철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대단하게 생각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이사가 임 대리에게 특명을 내렸고, 임 대리는 안절부절못하며 수철에게 부탁한 상황이었다.
“네, 그럼 해 볼게요.”
민 과장이 부탁하고, 박 대표도 편하게 하라고 했고, 무엇보다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VVIP 아저씨들이 수철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 대리가 이제 한숨 돌리겠군요.
“그런데 몇 분 정도 오시는 거예요?”―정확히는 모르지만 20분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20분 정도인데 호텔 한 개 층을 다 쓰고, 최고급 피아노로 공연을 하는 거예요?”―그 정도의 가치가 있으신 분들이니까요.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한 번 회사에서 그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자리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마 다른 프로그램을 들으시면 더 놀라실걸요? 하하.
민 과장은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날 파티에서는…….
유명한 여배우가 사회를 보고, 국내에서 개봉도 안 한 외국 영화를 상영한다고 했다. 그리고 유명 뮤지컬 배우들이 공연을 펼치고, 그다음으로 클래식 5인조 현악단 공연과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성악이 이어진다고 했다. 그야말로 최고들이 모여서 벌이는 초호화 잔치였다.
‘괜히 한다고 했나?’
이질감이 들 정도였다.
―우리랑 다른 세상에 사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하하.
민 과장의 웃음은 실소에 가까웠다.
최고의 장소에서, 최고의 음식에, 최고의 사람들이 진행하는 최고의 프로그램.
회사에서 최고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리에 수철이 초대되었다.
원하는 대로 출연료를 주겠다던 임 대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럼 임 대리에게 전화드리라고 하겠습니다.
민 과장과 긴 통화를 끝냈다.
* * *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바로 임 대리에게 전화가 왔다.
수철이 하겠다고 하자 임 대리는 민 과장에게 듣지 못했던 상세한 진행까지 설명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수철이 물었다.
“그럼 세 곡만 하면 돼요?”―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께서 앙코르를 요청하시면 한두 곡 정도 더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 대리는 연주를 무슨 덤으로 과일 얹어 주듯이 말하고 있다.
세 곡도 부담되는데 한두 곡을 더 하라니.
수철이 못을 박았다.
“앙코르 없이 세 곡만 할게요. 만약 분위기가 어쩔 수 없으면 한 곡 정도만 더 붙일게요.”
수철이 단호하게 얘기하자 임 대리도 반대할 순 없었다.
―네, 네, 그렇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앙코르를 하시게 되면 출연료는 더 올려 드리겠습니다.
수철은 불편했다.
모든 걸 돈으로 얘기하다니.
VVIP라는 대단하신 분들의 행사를 치르다 보니 모든 게 돈으로 보이나 보다.
“돈은 괜찮아요. 곡 수만 조절할게요.”―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연주하실 곡에 곡명을 부치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브로슈어(Brochure)를 만들 거라서 그럽니다.
“음.”
수철은 잠시 생각하다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행복한 라이프의 6가지 버전? 6가지 색깔?”
임 대리는 수철이 뭔가 고고한 제목을 내놓길 기대했는데 성의 없이 툭 말하자 실망한 느낌이었다.
―일단 그렇게 가제로 적어 놓겠습니다. 생각하시고 좀 더 나은 제목이 떠오르시면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럼 좋은 연주 부탁드리고, 사람들과 좋은 만남도 가지시길 바랍니다.
좋은 연주는 오케이.
하지만 좋은 만남은 생각이 없다.
“저는 제가 연주할 시간에 맞춰서 가고 싶은데, 그럼 몇 시까지 가면 되나요? 5시에 맞춰서 갈 필요가 없지 않나요?”―아닙니다, 그 시간에 오셔야 합니다. 저희가 그 시간까지만 단독으로 엘리베이터를 통제하고 경호도 하니까요.
“경호요?”
―고객님들께서 노출을 꺼리셔서 그렇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젠 호기심이 생길 정도였다.
‘인상 좋은 이웃집 아저씨, 할아버지 같다고 민 과장님이 그랬는데.’
* * *
5일 후,
작업실 앞에 승용차가 도착했다.
세계적인 연주자도 아닌데 태우러 왔다.
수철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이 펑크 나지 않게 신경 쓰는 거였다.
수철이 거부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임 대리는 정통 클래식 피아니스트 같은 정장 스타일을 원했지만, 수철은 거부했다.
연주하는 것도 불편한데 하나하나 요구 사항이 다 불편했다.
임 대리가 안타까워서 연주하겠다고 했지만, 더 이상의 요구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시간에 맞춰서 가는 것을 빼고는 모두 거부했다.
그래도 임 대리는 수철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와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상황이었다.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의 사람들이 별도의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오직 최고층만 연결하는 엘리베이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