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VVIP(2)
수철이 도착했을 땐 클래식 음악가들은 이미 와 있었다.
정장 차림의 연회복이었고, 연미복을 입은 사람도 보였다.
그들은 이런 분위기가 익숙해 보였다.
한편에는 뮤지컬 배우들도 보였다. 이들 또한 파티에 초대된 연예인 같았다.
진행 요원이 수철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이날 파티는 자리 배치가 특이했다. 별도의 출연자 대기실이 있는 게 아니고, 무대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VVIP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둥근 테이블이 있고, 우측으로는 출연자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VVIP들의 요청으로 이렇게 하는 거였다.
공연이 끝나면,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공연과 음악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까지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다.
출연자들은 공연을 위해 초대된 아티스트이자, VVIP 파티에 초대된 게스트였다.
출연자들 테이블은 VVIP 테이블에 비해 조명이 어두웠다.
서로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작은 무드 등에 의지해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가까이 붙지 않으면 서로 대화하는 것도 불편했다. 그래서 친한 사이가 아니면 대화하지도 않는 듯했다.
반면 VVIP들이 앉아 있는 크고 둥그런 테이블은 분위기가 달랐다.
7개의 테이블에 20명 남짓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큰 공간에 비해 테이블 수가 적어서 그런지 테이블 사이에 나무와 예술적인 조형물이 놓여 있었고, 천장에서 내려온 핀 조명이 이를 비추고 있었다.
인원수는 출연자들이나 VVIP들이나 비슷했다.
“편안하게 좋은 시간 즐기십시오.”“고마워요, 문 이사.”
오늘의 주인공은 VVIP들이다. 모든 프로그램이 이들에게 맞춰져 있다. 이들의 품격에 맞춰져 있다. 회사에서는 세심한 디테일을 챙기며 도우미들의 동선 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VVIP들의 분위기는 달랐다.
회사가 연출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
말과 행동이 자유로웠고, 심지어 복장조차도 그랬다.
정장이나 연회복이 아닌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물론 멋들어진 흰 수염에 젊은 모델이나 입을 만한 타이트한 복장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VVIP들은 중년의 아저씨와 젊은 할아버지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그렇게 보였다.
“음식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되자 음식이 서빙되기 시작했다.
출연자들과 VVIP의 식사가 같은지는 알 수 없지만,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먹을 수 있는 코스 음식이 서빙되었다.
오늘은 출연자들도 대우를 받는 자리였다.
식사가 시작되자 전체 조명이 어두워지고 테이블에 무드 등을 밝히면서 영화가 시작됐다.
영화는 노년의 사랑을 주제로 한 프랑스 영화였다.
젊은 출연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80분 남짓한 영화가 끝나자 바로 공연이 시작됐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유명한 아나운서의 사회로 본격적인 공연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현악 5중주를 모시겠습니다.”
먼저 현악 5중주가 나섰다. 바이올린 둘, 비올라 둘, 첼로 하나.
그들은 진지한 자세로 연주에 임했다.
VVIP들은 디저트를 즐기며 편안한 시선으로 무대를 지켜봤다.
그런데 들었던 것과 분위기가 좀 달랐다.
한두 테이블을 제외한 나머지 테이블은 공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공연과 상관없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비싼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공연 관람이라기보단 공연자들이 그들의 대화 분위기에 맞추는 것 같았다.
VVIP들은 이런 음악 분위기가 익숙한 듯 보였고, 클래식 음악가들도 이런 모습이 당연한 듯 자신이 맡은 악기를 묵묵히 소화했다.
짝짝.
현악 5중주의 공연이 끝나자 곧이어 피아노와 유명 소프라노의 무대가 이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한둘씩 비스듬하게 몸을 틀고 무대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지난번 LA 필하모닉과 공연한…….”
테이블에선 소프라노에 관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안경을 고쳐 쓰며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사람도 있었다.
짝짝.
노래가 끝나자 박수 소리는 좀 전보다 커졌다. 하지만 특별하게 앙코르 요청은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뮤지컬 공연이 시작됐다. 조명은 연주 때와는 다르게 화려했고, 배우들도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짝짝짝.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뮤지컬은 원래 2시간 분량이지만 핵심만 압축해서 30분에 마무리되었다.
수철의 무대는 마지막이었다.
보험사의 신상품 광고를 홍보할 목적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마지막 무대였다. 수철은 왜 일찍 오라고 한 건지 불만이 있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공연을 보면서 해소됐다.
“다음은 이번 H보험사의 광고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신 용수철 님의 피아노 연주가…….”
역시 그런 이유였다.
수철은 무대로 나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늘 연주는 ‘해피라이프, 우리가 드립니다.’라는 주제로 클래식, 재즈, 뉴에이지 팝스타일. 각각 3가지 버전으로 여러분께 들려드립니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수철은 건반을 눌렀다.
성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1분도 채 안 되어 수철의 연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VVIP들뿐만이 아니었다. 출연자들의 시선도 수철에게 쏠렸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귀를 세우고 눈을 반짝였다.
“다음은 두 번째 재즈 버전입니다.”
한 번의 연주가 끝나고 수철이 잠시 호흡을 고르는 사이, 사회자가 끼어들어 다음 버전을 소개했다.
수철은 보낸 음악대로 연주하지 않았다. 시작만 같았을 뿐 음악은 금세 달라졌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취향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연주를 했다.
광고 음악과 라이브는 다르다.
게다가 수철은 대화 분위기를 맞추는 배경 같은 연주는 할 생각이 없었다.
공연은 공연다워야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다 무대에 집중시켰다.
* * *
“어? 다른데?”
“그러게?”
“내 저럴 줄 알았어. 저 친구는 역시 창의적이야.”
유독 한 테이블은 다른 테이블과 분위기가 달랐다.
이 테이블에 앉은 3명의 할아버지는 수철의 연주를 들으며 소곤거렸다.
이들이 바로 수철을 부르자고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수철의 광고 음악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웃집 아저씨라기보다는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이봐, 정 선생.”
할아버지들은 서로를 선생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그들은 정 선생, 고 선생, 신 선생. 3인방이었다.
“말하게.”
고 선생이 부르자 정 선생이 대답했다.
“자네, 하인리히 하이네라는 이름 들어 봤나?”“독일 시인 말인가?”“허허, 역시 아는구만?”
둘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화했다. 시선은 수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사람이 뭐?”
“독일어가 원래 거칠고 강하잖아?”
“그렇지.”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독일어로는 시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런데 하인리히 하이네가 그 고정관념을 깨 버렸지. 독일어로 쓴 시로 사람들을 감동시켰어.”“그렇군.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를 왜?”“저기 용수철이라는 친구를 보니까 갑자기 그 생각이 났어.”
“음…….”
그의 말에 공감이 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수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고 선생 할아버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연주가 거칠어. 분명 월드 피아니스트와는 차이가 있어. 그런데 우릴 쥐었나 놨다 하잖아.”
조명에 비치는 둘의 모습은 영화관에서 신비로운 장면을 보는 어린이 같았다.
“맞아, 연주가 독일어처럼 거칠지만 사람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어.”“그래, 거칠어서 더 감동이 진해.”“사람들이 하이네를 칭송하며 그런 사람이 다시 나오길 기대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잖아? 저 친구도 그런 느낌이야, 독보적이야.”“엄청난 말을 하는군, 독보적이라……. 나도 부정은 못 하겠어. 완전 우릴 갖고 노네. 이 노인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워서 뺑뺑 돌리고 있어. 분명 알면서 저러는 거겠지?”“그럴 거야. 우리 심장을 테스트하는 건가? 싶은 정도야.”“짓궂긴 한데 밉지는 않네.”
둘이 대화하는 내내 입을 벌린 채 수철을 보고 있던 신 선생 할아버지가 뒤늦게 한마디 했다.
“숙련된 연주자는 아닌데 최고의 연주라는 말이군.”
그의 말에 처음으로 할아버지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래, 그 말이 정답이야.”
* * *
짝짝짝.
짝짝짝.
연주가 끝나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앙코르! 앙코르!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앙코르를 외쳤다.
수철은 다시 적당한 분위기의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앙코르곡이 끝난 후에도 누군가 또다시 앙코르를 외쳤지만, 수철은 정중히 인사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사회자가 무슨 말을 시키려고 했지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바로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유명 아나운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노련한 멘트로 화제를 돌렸다.
* * *
수철의 무대에 환호한 건 VVIP뿐만이 아니었다.
반응은 예상치 못한 데서 튀어나왔다.
연주 시작 전 힐끔힐끔 쳐다보던 음악가들의 시선이 수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수철은 자리로 돌아와서 알았다.
그들이 자신의 연주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여간해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인데 경직되어 있었다.
몇몇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저분, 본 적 있어?”
잠시 후, 그들은 수철의 존재에 관해 서로 묻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정보라고는 브로슈어에 나온 이름이 전부였다.
얼마 후,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명 소프라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긴 무대복의 치마를 잡고 수철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훌륭한 연주 잘 들었어요.”
성악가는 선 채로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수철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저도 노래 잘 들었어요.”
수철이 인사하자,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으시면 잠깐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네, 앉으세요.”
수철은 그녀가 앉기 편하게 의자를 뒤로 빼 줬다. 그녀는 감사를 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울컥할 정도로 감동이었어요.”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연주를 들은 소감을 말했다.
연주가 감동적이었다며 소녀처럼 밝게 웃었다.
그녀는 수철이 만나 본 사람들과 뭔가 달랐다. 말 한 마디,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품위가 있었다.
수철이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그랬다.
“음악의 대가를 만난 기분이네요. 호호.”
클래식 음악가들은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반대로 자신을 낮추는 느낌이었다.
대가라는 말에 수철이 난감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훌륭한 곡들을 직접 만드신 거 맞으시죠?”
“네.”
“앞에 32마디 테마에 뒷부분은 그걸 주제로 연주하신 거고요?”
“네, 맞아요.”
수철이 대답하자 그녀는 다시 소녀같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 테마의 멜로디가 저는 너무 맘에 들었어요. 황홀할 정도예요.”
“아, 네.”
계속되는 극찬에 수철은 어리둥절했다.
성악가도 그걸 눈치챘는지 칭찬을 멈추고 잠시 수철을 바라보다 본론을 꺼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가사를 붙여서 한번 불러 보고 싶어요. 괜찮을까요?”“네, 그렇게 하세요.”
성악가의 조심스런 물음에 수철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너무 주저 없이 대답해서 성악가가 멈칫할 정도였다.
수철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아, 악보가 필요하신 거군요?”
성악가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네, 악보도 필요하고, 곡에 대한 설명도 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러자 수철이 눈을 맞추며 물었다.
“어떤 곡이 좋으셨어요?”“다 좋았어요. 특히 전 두 번째 곡이 감동적이었어요. 하늘을 나는 듯이 부드러우면서도 들판을 뛰는 것처럼 상쾌했어요.”
성악가는 마치 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수철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특별히 곡에 대해 설명드릴 게 없어요. 느낌대로 만든 거라서요.”
성악가가 바로 말을 붙였다.
“그 느낌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노래할 때 도움이 될 거 같아요. 가사 만들 때도요.”
“…….”
수철은 특별히 설명할 게 없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들을 보고 즉흥적으로 만든 거였다. 어릴 때 동네 할아버지들이 말을 걸던 모습과 이곳 파티장의 분위기를 섞어서 만든 거였다. 그래서 특별히 설명할 게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느낌은 한가한 오후, 그리고 할아버지들의 수다. 그런 장면들을 생각했어요.”
그 말에 성악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이 말을 이었다.
“오선지 주시면 악보는 금방 그려 드릴게요.”“호호. 괜찮아요. 악보는 나중에 이메일로 보내 주셔도 돼요.”“아니요, 즉흥으로 만든 거라 악보가 없거든요.”
“……?”
그 말에 성악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사회자가 광고에 실릴 음악이라고 말씀하셨던 거 같은데요?”“앞에 4마디만 그렇고 뒤는 다 달라요.”
“……!”
성악가는 수철을 빤히 바라봤다.
“정말 미리 작곡하신 게 아니라 무대에서 바로 만드셨다고요?”
“네.”
수철이 끄덕이자 성악가는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