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순조로운 진행
‘농담이겠지, 정말 두 시간을 하겠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사도, 옆 테이블의 출연자들도, 심지어 할아버지 3인방까지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이사가 사회자에게 요청해 공식적인 프로그램 종료를 알렸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시간과 장소를 사용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사교를 즐길 분은 사교를 즐기고, 퇴장하실 분들은 요원들이 집까지 안전하게 모시겠다고 했다.
번외 프로그램으로 수철의 피아노 연주가 진행될 거라는 소식도 알렸다.
몇몇 사람들은 보험사에서 제공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자가 뭐라고 하든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었다.
이사는 진행 요원을 시켜 무대 가까이 몇 개의 테이블을 다시 세팅했다.
잠시 후, 화장실을 다녀온 할아버지 3인방이 무대 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수철이 다시 무대로 올라갔다.
수철이 피아노 앞에 앉자 성악가를 비롯한 다른 클래식 음악가들도 앞쪽 테이블로 몰려와 음료수를 놓고 둘러앉았다.
수철의 시선은 할아버지 3인방에게 향해 있었다.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려놓은 채 할아버지들에게 말했다.
“이번 연주의 주제는 ‘할아버지 3총사,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예요.”
수철이 장난을 치듯 말하자 할아버지 3인방은 즉각 반응했다.
“왜 자꾸 할아버지라고!”“그런 괴상망측한 주제를…….”“우리가 3총사긴 하지.”
수철이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오늘 할아버지들을 보고 느낀 점이에요.”
“…….”
“표정들이 왜 그러세요? 듣기 싫으세요?”“아니야. 듣기 싫긴. 난 준비 다 됐어.”
“나도.”
“미투야, 어서 들어 보자고!”
수철은 할아버지들을 귀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자세를 바로잡았다.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딴, 따다단!
우선 피아노로 할아버지들의 캐릭터를 한 명씩 묘사했다.
캐쥬얼 정장에 중절모가 인상적인 고 선생 할아버지는 발랄한 3박자 왈츠로, KFC 할아버지 같은 외모에 녹색 구두가 인상적인 정 선생 할아버지는 밝은 행진곡 분위기로, 그리고 와인이 얼큰한 신 선생 할아버지는 몽환적인 분위기로 묘사했다.
그리고 이어진 터프한 연주는 이곳에서 누가 할아버지 3인방을 막을쏘냐는 뜻이었다.
몇몇 사람은 수철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미소를 머금었다.
연주가 중반으로 넘어가자 수철은 어릴 적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친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뚜렷하진 않지만 어린 수철을 안아서 비행기를 태워 주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리고 수철을 이뻐하던 동네 할아버지들도 떠올렸다. 마트 앞 평상에 앉아서 잡담 떠는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래서 그런지 연주를 듣는 할아버지 3인방의 모습은 평안해 보였다.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따당! 땅따단, 따라단!
그러다 수철의 연주가 격렬해졌다. 이야기가 급변하며 후반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듣는 사람들을 긴장시키며 쥐었다 놨다 했다.
여기저기서 마른침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수철의 머릿속에 갑자기 엄마가 떠올랐다.
멀리서 떠들던 사람들도 이 순간만큼은 수철을 보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를 빼면 거대한 호텔의 꼭대기 층은 적막 속에 있었다.
격렬하던 연주는 5분을 남겨 놓고서야 다시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이 다시 편안해졌다.
건반 위를 옮겨 다니던 수철의 손가락은 ‘홈 스위트 홈’의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긴 여행을 마치고 집안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구수한 엄마의 찌개 냄새가 났다.
엄마가 등을 돌렸다.
왔니?
찌개만큼 구수한 엄마의 목소리.
음악은 여기서 멈췄다.
수철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수철이 느끼는 감정을 같이 느끼고 있었다.
집중해서 연주를 듣던 사람들도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의 구수한 찌개가 떠올랐다.
먹먹한 눈빛이었다.
수철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을 그렇게 과거로 회귀하는 시간을 가졌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수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여기저기서 조용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환호하지 않았다.
공감했을 뿐이다.
이곳에 자리한 모든 사람이 수철의 피아노 시간 여행의 동승자였다.
그래서 음악을 평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바로 음악이 주는 행복.
그 느낌이었다.
수철은 개구진 얼굴로 할아버지들을 바라봤다.
할아버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손뼉을 부딪치고 있었다.
수철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의 불편함은 모두 사라지고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형식을 정해놓지 않고 자유롭게 느낌을 따라가는 이런 연주가 좋았다.
“휴―!”
클래식 음악가들은 연주가 끝났는데도 아직 적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한동안 멈춰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하지만 할아버지들은 금세 원래 스타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난 건가?”“아니야, 그렇게까지는 안 된 거 같은데?”“한참 안티에이징이 치솟고 있었는데!”“그러게, 열심히 화장실도 갔다 왔는데.”“난 화장실 갈까 봐 와인도 조금밖에 안 마셨어.”
“몇 분이나 했지?”
“고작 30분?”
그때 옆에 서 있던 이사가 허리를 숙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1시간 하셨어요.”
“벌써요?”
“네.”
수철은 두 시간이 아니라, 세 시간도 거뜬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자리는 아니었다.
할아버지들의 방광도 걱정됐다.
결정적으로 신 선생 할아버지는 약속을 어기고 계속 와인을 들이켜고 있었다.
* * *
수철은 가벼운 묵례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와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러자 할아버지들이 우르르 수철의 테이블로 따라갔다.
“두 시간 할 거라고 엄포를 놓더니!”“그래서 부리나케 화장실까지 갔다 왔는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야 할 상황에 괜히 또 장난을 걸었다.
수철은 빙그레 웃고는 옷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들, 기회가 되면 담에 또 봬요.”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할아버지들이 또 따라붙었다.
“입가심도 할 겸, 어디 가서 막걸리 한잔할까?”
헤어짐이 아쉬운 표정이었다.
수철이 큭큭 웃다가 대답했다.
“저 가야 해요.”
“데려다줄까?”
“싫어요.”
“그럼 우린 언제 또 만나?”
친해졌다고 느꼈는지 이제는 아예 대놓고 손자 대하듯이 말했다.
수철이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또 만나게요?”
“당연하지! 오늘 못 들은 연주 들어야지!”“하하. 담에 기회 되면 그때 또 들려드릴게요.”
그러자 고 선생 할아버지가 대뜸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번이랑 이름 찍어.”
수철이 피식 웃고는 번호를 찍어 드렸다. 그러자 다른 할아버지들도 앞다투어 휴대폰을 내밀었다.
“나도!”
“나도!”
고 선생 할아버지가 이를 막아섰다.
“어허! 왜들 그러셔? 내가 알려 주면 되지. 우리 수철이 불편하게.”
우리 수철이란다.
할아버지들은 수철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수철이 다른 음악가들과 인사를 나눌 때도 마치 팬클럽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마지막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와서 아쉬운 얼굴로 배웅했다.
손자를 보내는 친할아버지 같았다.
‘휴, 깜깜하네.’
수철은 밖으로 나와서야 알았다.
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택시를 잡으러 도로로 향했다.
올 때는 모시러 오더니 갈 때는 알아서 가라였다.
* * *
“연주가 정말 감각적이었어요. 그 말 말고는 다른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호텔을 나서던 반주자가 읊조리듯 말했다.
그러자 성악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저런 음악가가 여태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지…….”
시선을 멀리 둔 채 깊어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곤 수철이 그려 준 악보가 잘 있는지 가방을 열어 확인했다.
둘은 수철이 사라진 길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잘하면 천재 친구가 생기겠어.”
정 선생 할아버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와인 잔을 부딪쳤다.
할아버지들은 참석한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보험사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출연료를 A급으로 책정했다는 말만 들었지 금액을 묻지는 않았었는데, 나중에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고서야 알았다.
세 곡에 앙코르곡 두 곡.
다섯 곡 연주하고 천만 원이라니.
역시 VVIP들은 달랐다.
덕분에 수철은 박 대표와 다혜에게 배 터질 정도로 쏘고 또 쐈다. 그리고 남은 돈은 다음을 위해 저축했다.
* * *
프로젝트 앨범이 많이 진행됐다. 제작에 필요한 돈도 다 모았고, 가사와 곡 작업도 모두 마쳤다.
수철은 세상을 떠돌며 자유롭게 사는 집시 소년의 이야기를 일렉트로닉 음악에 담았고, 박 대표는 아름다운 한강 야경을 보사노바 리듬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다혜는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내용의 팝스타일 음악을 만들었다. 상대만 있다면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 하는 다혜의 마음이 느껴졌다.
“녹음실 비용이 어떻게 돼요?”
제작비 관리를 맡은 다혜가 예산을 짜다 물었다. 그러자 박 대표가 수철을 봤다.
“이건 수철이, 네가 잘 알 거 같은데? 지난번 붐 녹음실 빼면 가장 최근에 녹음실을 가 본 건 너잖아. 붐은 비싸서 우리가 할 곳은 아니고.”
수철이 대답했다.
“제가 녹음했던 곳은 렌탈비가 1프로(3시간 30분)에 25만 원이었어요. 엔지니어 비용은 15만 원, 별도였고요.”
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사실 녹음실 비용은 천차만별이야. 수철이가 녹음한 곳은 좋은 곳이고, 엔지니어 비용까지 합쳐서 20만 원이 안 되는 곳도 많아. 그런데 퀄리티 생각하면 아무래도 검증된 곳에서 하는 게 좋겠지. 돈 아끼려다가 낭패 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겠네요.”
다혜가 볼펜을 입에 문 채 대꾸했다.
“그래,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하다 보면 오히려 돈이 더 들어갈 수도 있어.”“그럼 녹음실 비용은 1프로당 20만 원에서 30만 원 사이로 잡으면 될까요?”“일단 중간인 25만 원으로 잡아 놔.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조율하면 되니까. 그리고 마스터링은 곡당 20만 원 생각하면 돼. 우리는 3곡 할 거니까 60만 원이지.”
“네.”
박 대표는 수철과 다혜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가수가 문제네…….”
곡 작업도 다 끝났고 예산도 다 짰는데 가수가 잘 구해지지 않았다. 다혜는 학교에서 오디션을 몇 명 봤지만, 맘에 들지 않았고, 수철은 은주나 제시 같은 분위기의 가수를 찾았지만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다혜가 볼멘소리를 했다.
“쌤, 가수는 한 명으로 가는 게 좋지 않아요? 아무래도 3명의 작곡가와 3명의 가수면 시선이 분산되는 거 같은데.”“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으면 어려워도 구해야지.”
“…….”
박 대표의 완강함에 다혜가 뚱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박 대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앨범만 하나의 앨범으로 하고 곡과 가수는 각자 알아서 하기로 했잖아. 그게 3인 3색의 취지잖아.”
그 말에 다혜는 계속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1명의 가수에게 3가지 색채를 부여하는 것도 좋은 거 같은데.”
박 대표는 잠시 다혜를 바라보다 수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생각은 어때?”
“저도 다혜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는 가사가 단어로 되어 있어서 쉽게 가수를 구하지 못하겠어요. 누군가 정해지면 거기에 맞추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가수를 구해서 연습시키는 건 다혜에게 필요한 부분이었다.
수철과 박 대표는 이미 경험이 있기에 건너뛰어도 된다.
잠시 고민하던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해 보는 게 어떨까?”
“어떻게요?”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어. 너희 의견이 그렇다니 일단 한번 만나 보고 다시 얘기 나누는 게 어떨까?”
“저는 좋아요.”
다혜는 무조건 동의했다.
“수철이, 너는?”
“저도 좋아요.”
“그럼 내가 연락해 보고 다시 말해 줄게. 아직 계약이 안 끝나서 좀 기다려야 할 수도 있어.”
“계약이요?”
“그래, 소속사가 있는 친구거든.”
박 대표는 묘한 미소를 보였다.
* * *
수철과 박 대표, 다혜가 가수로 고민할 때 이 실장의 입은 찢어져 있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장 피디님!”
전화를 받은 이 실장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이고, 그럼요! 다 피디님 덕분이죠. 네, 피디님이 하시는 프로그램이면 무조건 출연해야죠. 제가 또 의리로 여기까지 온 사람 아닙니까? 하하!”
이 실장은 천하를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이 실장이 잘나가고 있는 것엔 박 대표의 조력도 컸다.
파티를 열어 관계자들을 소개해 주고, 방송 인터뷰와 축제 행사도 연결해 줬다.
그리고 이 실장과 함께 방송국을 가서 평소 친분 있는 피디들도 소개해 줬다. 언론사와 방송 매체에 보도 자료를 뿌리는 것도 도와줬다.
“내 앨범보다 더 열심히 하는 거 같아.”
박 대표가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그 결과 지우는 야외에서 펼쳐지는 콘서트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그리고 여기서 흥행의 급물살을 타는 대박 사건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