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탐관오리
음악 외에 다른 일은 수철의 관심사가 아니다. 명예니 대단한 위치니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드라마 음악 감독은 음악만 하는 자리가 아니야. 촬영 현장도 다녀야 하고, 음악 관련해서 사람들도 많이 만나야 하고. 여간 피곤한 자리가 아니야.’
김명석의 말도 떠올랐다.
수철이랑은 거리가 먼 얘기다.
금별은 수철의 재능을 높이 산다고 하면서도 재능을 고려하기보다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음악 감독을 제안한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성급하게 결정하지 마시고, 좀 더 신중히 고려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길게 보셨으면 합니다.”
금별기획과의 관계를 길게 보라는 얘기였다. 나중에 영상사업단에 들어오려면 음악 감독을 맡는 게 좋을 거라는 압박도 실려 있었다. 하지만 수철의 태도엔 변화가 없었다.
“아니요. 전 안 할 거예요.”
수철에겐 금별 기획의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달콤한 말도 잡음처럼 들렸다.
여차하면 음악을 안 하겠다는 말까지 할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의지가 확고하시니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수철의 분위기를 감지한 담당자는 수철이 주제곡만 맡는 거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돌아갔다.
* * *
―용수철 씨?
얼마 지나지 않아 금별에서 새로운 음악 감독을 뽑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음악 감독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다.
김명석이 말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음악 감독이 좀 피곤할 수도 있어. 그분 나도 아는 분인데, 작업 방식이 옛날 방식이거든. 그러니까 불합리한 것을 요구하면 참지 마.”
음악 감독은 김형석이 말한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람이었다.
꼰대가 아니라 막장이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려고 수철을 불렀다.
우선 그는 수철의 환심을 살 생각에 듣기 좋은 얘기부터 던졌다.
“금별에서 칭찬이 자자하던데? 대단한 음악가라고. 하하, 나도 수철 씨 같은 사람이랑 같이 일하게 돼서 기뻐요. 우리 잘해 보자고.”
그는 연륜 있는 사람답게 넉넉한 웃음을 보이며 대인배처럼 얘기했다. 금별기획에서 들은 수철에 대한 칭찬을 비롯해 계속해서 듣기 좋은 얘기를 늘어놨다.
그러다 말이 길어지며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내가 30년쯤 선배가 될 거야.”
자신이 음악 30년 선배라며 반말과 존댓말을 섞던 말투를 완전히 반말로 바꿨다.
그리고 자신이 음악 감독이라는 걸 강조하며 수철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상투적인 얘기였다.
“내가 음악 감독으로서 하는 말인데, 드라마 음악은 드라마의 결에 잘 맞는 장르를 선택해야 해.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분위기도 잘 잡아야 하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다.
게다가 수철은 담당자를 통해 연출부가 바라는 음악 스타일에 관한 얘기를 이미 들었다.
물론 이 부분은 음악 감독이 연출부와 회의를 하고 수철에게 전달하는 게 맞다. 하지만 금별기획에서 일찌감치 수철에게 주제곡을 맡겼기 때문에 수철은 미리 드라마 요약본도 보고, 연출부의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수철은 나이 많은 음악 감독의 얘기에 예의 있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음악 감독은 수철이 자신의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팁을 주자면 드라마의 주 무대가 눈 덮인 설원이고, 메인 스토리도 그곳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사운드를 어떻게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할까 고민하는 게 중요해.”
당연한 얘기다.
그리고 수철은 오래전에 이미 이 부분에 대한 구상을 다 마쳐 놓은 상태다.
하지만 수철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철이 고분고분하자 음악 감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드라마 음악 감독은 일종의 대장 작곡가다. 작곡을 맡은 작곡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드라마와 음악 사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프로듀서 역할을 한다.
“타이틀 곡은 원래 내가 맡아야 하지만 금별에서 이미 결정했다고 해서 내가 양보한 거야. 내가 다른 일이 바빠서 음악 감독직을 늦게 수락하다 보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드라마 주제곡은 보통 음악 감독이 맡는다. 그런데 이미 금별기획에서 수철에게 맡기기로 했기 때문에 자신은 그 뜻을 받아들인다는 말이었다.
틀린 말이었다. 순서도 잘못됐다.
주제곡 작곡은 오래전에 수철이 하는 거로 이미 결정됐고, 음악 감독은 수철이 거절해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 거다. 음악 감독직을 늦게 수락해서 주제곡을 수철이 하게 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감사해야 할 사람은 수철이 아니라 음악 감독이다.
“타이틀 곡은 드라마의 얼굴이야. 매번 드라마가 시작될 때마다 나가니까 말이야. 그만큼 자네의 어깨가 무겁다는 걸 알아야 해. 타이틀 곡이 곧 드라마의 첫인상이야.”
그는 꼰대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얘기했다.
주제곡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수철에게 부담을 줬다.
어느새 몸을 의자에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엔딩 곡은 내가 맡을 거니까, 우리가 서로 잘 소통해야 해. 알겠지?”
“네.”
드라마가 끝날 때 나가는 엔딩 곡은 주제곡과 좀 다르다. 주제곡은 바뀌지 않지만 엔딩 곡은 자주 바뀐다. 음악 감독은 자신이 엔딩 곡을 맡을 거니까 자주 소통을 하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수철은 생각이 달랐다. 주제곡만 하고 손을 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작업이 끝나면 더 이상 음악 감독과 부딪칠 일이 없다.
금별기획에서 요구한다고 해도 주제곡 외에는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이미 담당자와도 그렇게 못을 박았다.
음악 감독만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수철을 잠시 빤히 보더니 물었다.
“금별에 누구 친한 사람 있어?”
“네? 그게 무슨?”
“아니, 너무 이례적이라서 묻는 거야. 이런 경우는 잘 없으니까.”
경력이 얼마 없는 수철이 작곡을 맡은 것은 이례적이어서 그 과정이 의심스럽다는 얘기였다.
찾아보면 최 팀장도 있고, 어쩌면 이 차장도 수철과 인연이 있다.
하지만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그런 분 없어요.”
금별기획은 이번 드라마 음악 작업을 통해 수철과 영상사업단 사이에 다리를 놓을 생각이었다. 영입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알 수 없는 음악 감독은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음.”
보통은 연출부에서 주제곡에 대해 주문을 많이 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별도의 주문이 없었다. 음악 감독이 보기에는 그 점도 이상했다.
하지만 그건 금별기획에서 이미 그전에 수철이 보여 준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거기에다 H사의 CF 음악을 연이어 히트시킨 것도 알기 때문이다.
잠시 수철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감독이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내가 저작권까지 다 맡아서 진행하는 거 알지?”
음악 감독은 연출팀과 소통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저작권에 관련한 행정적인 부분까지도 책임을 맡는 것이다.
수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홍 과장님께 얘기 들었어요.”
홍 과장은 이번 드라마의 총괄 담당자다.
“조만간 주제곡에 붙일 가사 후보가 3개 정도 올라올 거야. 심사를 거쳐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거고.”
몇 명의 작사가가 쓴 가사를 놓고 심사를 해서 선택한다는 얘기다. 이 부분은 수철도 몰랐다.
“그렇군요. 전 몰랐어요.”
가사는 드라마 작가가 쓰는 줄 알았다. 작가가 드라마의 내용을 가장 잘 알기에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가사를 주겠다는 말만 들었지, 몇 명의 작사가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자네한테도 가사에 관해서 물어볼 거야. 자네가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지금 금별의 분위기로 봐서는 자네의 의견에 비중을 크게 둘 거 같아.”
“…….”
“그래서 말인데.”
그는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듯 꼬았던 다리를 풀고 몸을 세웠다.
“그 3개의 후보 중에서 ’운명‘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의 가사를 자네가 홍 과장에게 추천해 봐.”
“……!”
이거였다. 이 말을 하려고 자신이 얼마나 유명하고, 음악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음악 감독의 역할, 주제곡의 중요성, 서로 소통해야 한다는 등 긴 서론을 떠든 것이다.
수철은 대꾸 없이 불편한 얼굴로 쳐다봤다.
음악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잘 아는 작사가인데, 사고력도 좋고 아주 훌륭한 분이야. 가사도 남녀 간의 운명적 사랑을 잘 묘사한 아름다운 가사야.”
수철은 대꾸 없이 빤히 쳐다봤다. 불쾌함을 넘어 모멸감까지 들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자신이 추천하는 가사를 선택하라니.
‘확 일어나서 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불끈 들었다.
탁. 탁.
수철이 대꾸가 없자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수철의 얼굴을 살폈다.
수철도 그의 얼굴을 마주 봤다.
“음.”
가사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정말 자신이 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뽑힐 것이다.
한편으로는 묻고 싶었다.
왜 그러시냐고.
모두 드라마를 잘 만들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데, 아저씨는 왜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고 하냐고.
왜 당신을 믿어 주는 사람들을 배신하려고 하냐고.
왜 나에게 그런 부당한 부탁을 하냐고.
묻지 않으면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왜 대답이 없어?”
수철이 말이 없자, 음악 감독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리를 박차고 가 버릴까 말까를 생각 중인데 눈치도 없이.
수철은 다른 말을 했다.
“홍 과장님은 감독님을 많이 믿고 계시던데요? 감독님이 경험 많고 인간관계가 좋으신 분이라고 칭찬도 많이 하셨어요.”
“그래?”
음악 감독은 되물으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수철은 홍 과장의 신뢰를 정면으로 배신하는 음악 감독을 보면서 자신이 홍 과장이 된 기분마저 들었다.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데 음악 감독은 홍 과장의 신뢰 따윈 전혀 신경 안 썼다.
한술 더 뜨며 자신의 할 말만 했다.
“나중에 가사가 정해지면 말하려고 했는데, 가수도 자네가 좀 추천해 줘야겠어.”
“…….”
“노래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한 가수야. 소속사 사장도 내가 좀 알고.”
말문이 막혔다.
이젠 욕이 아니라 침을 뱉어야 할 상황이다.
자신이 아는 사람의 가사를 선택하라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아는 가수를 추천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대체 날 어떻게 봤으면!’
수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음악 감독은 수철의 눈빛을 외면한 채 허리를 숙여 차를 마셨다.
탁. 탁.
이번엔 수철이 탁자를 두드렸다.
혹시 자신의 작업물과 관련된 말을 할까 싶어 지금까지 앉아 있었지만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 갈까?’
시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수모를 당한 기분이어서 뭐라 한마디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낌새를 눈치챈 음악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철 씨,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자네’라는 호칭을 ‘수철 씨’로 바꿨다.
“하기 싫어?”
수철도 이번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대꾸했다.
“네, 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요.”
수철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음악 감독은 탁자에 몸을 붙여 왔다.
“잘 생각해 봐. 저 사람들 편들어 봤자 우리에겐 남는 거 하나도 없어. 내가 이런 일 많이 해 봐서 잘 아는데, 우린 음악 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야 한다고. ”“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잘 들어 봐, 저 사람들은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이야. 음악 따윈 관심도 없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끼리 주거니 받거니 돕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
“곰은 재주가 부리고 돈은 엉뚱한 사람들이 다 챙기게 놔두고 싶어? 정말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뭐가 그리 당당한지 언성을 높이며 눈알까지 내밀었다.
수철이 대꾸가 없자, 다시 목소리를 낮춰 설득 모드로 전환했다.
“수철 씨가 이번에 날 한번 도와주면 내가 앞으로 진짜 많이 도와줄게.”
“…….”
“수철 씨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데, 원래 이렇게 다 돕고 사는 거야. 별거 없잖아? 가사 한 번, 가수 한 번 추천하면 그만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
“그렇게만 되면 내가 그냥 넘어가지 않지. 앞으로 수철 씨한테 좋은 일 많이 생기게 내가 책임지고 밀어줄게.”
그는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 같았다.
입술 사이로 누런 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