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선수 교체
“안 밀어주셔도 돼요.”
“뭐?”
“저는 감독님을 도울 생각이 없다고요.”
“이런.”
어른이 지금까지 길게 설명했는데, 어린놈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저는 도움 주고받고 그런 거 잘 몰라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요. 전 부탁받은 음악만 열심히 만들면 그만이에요.”
그 말에 음악 감독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탁자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자네는 그냥 음악만 만들어. 그러면서 홍 과장이 가사에 관해 물어보면, 운명 들어간 가사가 마음에 든다고 한마디만 하면 돼. 그리고 음악에 잘 어울리는 가수가 있다고 한 번 추천하고. 그러면 끝인데 뭐가 어려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음악 감독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수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탐욕스러웠다.
계속 말을 이었다.
“홍 과장이 자넬 많이 믿으니까 쉬운 일 아니야? 그렇게만 하면 뒤는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이런 게 일거양득,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는 거야.”
수철 씨라고 했다가 자네라고 했다가를 반복하면서 다급함을 드러냈다.
말실수인지, 아님 진심인지, 믿는 사람을 속이라고 대놓고 말을 했다.
수철은 언짢음을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갈수록 한심해 보이고, 강압적인 말투에 거부감이 쌓여 갔다.
“이제 그만하시죠?”
“뭐?”
“저한테 그런 거 부탁하지 마시라고요. 홍 과장님이 저한테 물어본다고 해도 전 그렇게 말할 생각이 없어요. 오히려 말씀하신 가사와 가수는 빼라고 하고 싶네요.”
“뭐라고!”
수철이 반감을 드러내자 음악 감독은 눈을 치켜떴다.
수철도 밀리지 않고 같이 노려봤다.
그러자 음악 감독은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금세 표정을 바꿨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설마 형편없는 가사에, 형편없는 가수를 추천하겠어? 수철 씨도 보면 분명 마음에 들 거라고. 특히 가수는 정말 이 드라마와 딱 맞아떨어지는 음색과 이미지를 갖고 있어.”“그럼 걱정하실 필요 없겠네요?”
수철이 시크하게 대꾸했다.
“그게 무슨?”
“가사가 좋고 가수도 딱 맞아떨어지면 심사에 통과할 텐데 뭘 걱정하시냐는 말이에요.”“걱정하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해 두려는 거지.”
불안한지 말꼬리가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설득을 시작했다.
“잘 생각해 봐, 저 사람들 논리대로 따라가면 우린 제 가치를 인정 못 받아. 그래서 우리끼리 뭉쳐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
“이걸 알아야 해. 저 사람들은 우리 가치를 높이려는 사람들이 아니야. 오히려 떨어트리려는 사람들이지.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다루기 편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라고. 말로는 존중한다고 하면서 대우는 그렇게 하지 않잖아?”
“…….”
“돈을 깎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야. 음악 하는 사람들이 순진하니까 만만하게 보고 농간을 부리는 거라고.”
얘기를 들어 보면 음악 감독은 금별기획에 맺힌 게 많은 사람 같았다. 저렇게 적처럼 얘기하면서 왜 금별기획의 제안을 수락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대우하지 않고 돈을 깎는다는 말도 수철은 동의가 되지 않았다. 수철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대우와 돈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수철 씨가…….”
더는 음악 감독의 얘기가 귀에 안 들어왔다. 열변을 토하지만 수철에겐 ‘윙’ 하는 소음 소리로 들렸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적대시하는 걸까?’
얘기는 안 들리고 딴생각만 들었다.
“수철 씨가 내 말대로만 해 주면……. 우린 서로 윈윈하는…….”
아무래도 음악 감독은 수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금별기획에서 얘기를 못 들었는지 수철의 성향도 모르고, 그냥 재능 있는 어린 작곡가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음…….”
인제 그만 일어날 때가 됐다.
말끝마다 우리 음악 하는 사람이라며 한편으로 묶는 것도 역겹다.
수철이 음악 감독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전 그런 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홍 과장님이 묻는다고 해도 공정하게 말할 거고요. 그러니까 더 이상 강요하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그럼 저는 이만.”
“잠깐만!”
수철이 일어나려고 하자 갑자기 손을 덥석 잡았다.
수철이 불쾌한 얼굴로 쳐다보자 마른침을 삼키며 수철을 달랬다.
“수철 씨, 그러지 말고 잠깐만 앉아 봐. 수철 씨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그런데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야. 그냥 날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데 뭘 걱정해?”
“…….”
“내가 수철 씨같이 장래가 유망한 후배를 그냥 버리겠어? 인물도 잘생긴 게 나중에 배우 해도 되겠네, 내가 그쪽도 아는 사람이 많거든?”
“에휴―!”
수철의 입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음악 감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철은 그 눈빛을 무시한 채 꾸벅 인사를 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더 할 말 없어요.”
벙찐 표정을 짓는 음악 감독을 놔두고 돌아서 밖으로 나왔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내가 누군 줄 알고!”
음악 감독은 얼굴이 붉어진 채 수철의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 * *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런 짓을? 그 양반, 소문이 안 좋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이야기를 들은 박 대표는 불끈했다. 음악 감독이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어디서 더러운 것만 배워서. 쯧쯧! 병폐야, 병폐.”
고개를 저으며 혀까지 찼다.
“널 어리숙하게 보고 자기 혼자 이익을 챙기려고 그런 거야.”“네, 그렇게 보였어요.”“가사는 아마 지인이 아니라, 가족들 누구의 이름으로 직접 쓰려고 했을 거야.”
그 말에 수철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잘 알지. 은근히 이런 경우가 많거든. 아마 음악 감독은 작사비와 저작권료를 다 먹을 생각이었을 거야. 그리고 가수 추천은 기획사에서 제안을 받았겠지. 드라마 주제곡에 가수로 집어넣어 주면 사례금을 받기로 말이야.”
박 대표의 자세한 해석에 수철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거였군요?”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한 걸까요?”
“뭐가?”
“무슨 감정이 있어서 금별기획을 그렇게 나쁘게 얘기한 건지 궁금해요.”
“뻔하지, 뭐.”
“뻔해요?”
“금별기획을 적대시하게 만들어서 널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거겠지.”
수철은 박 대표의 말이 이해가 안 됐다.
“편을 만들다니요?”
박 대표가 수철과 눈을 맞췄다.
“넌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아마 그 사람은 널 같은 편으로 만들어서 조종할 생각이었을 거야.
“절 조종해요?”
“그래, 널 다룰 수만 있으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 테니까.”
“…….”
박 대표는 다시 몸을 세웠다.
“그 사람 참, 배짱도 좋아.”
“네?”
“널 몰라도 어떻게 그렇게 모르지? 하하!”
갑자기 웃음을 보였다.
수철이 갸웃하며 물었다.
“뭐가요?”
“그렇잖아? 조종당했으면 조종당했지, 널 어떻게 조종해? 방법이 있으면 나도 좀 알고 싶네, 하하!”
박 대표는 웃음 섞인 농담으로 마무리했다.
* * *
―홍 과장님, 그 용수철이라는 작곡가 꼭 쓰셔야 해요?
“왜 그러세요? 감독님.”―아니, 음악은 둘째 치고 인성이 영 아니더라고요.
음악 감독은 수철에게 거절당하자 치졸한 짓을 벌이고 있다.
―제 주변에 실력 있는 젊은 작곡가들 많은데 한번 맡겨 보시는 게 어떨까요? 곡을 많이 받아 보시고 그중에서 선택하시면 되잖아요.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용수철이 아무리 대단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제가 보기엔 영 아니라서 그래요. 이렇게 가면 드라마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요.”
음악 감독은 작곡자를 바꿔 보라며 이간질을 하고 있다.
홍 과장이 수철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작곡가라고 말했을 때도 음악 감독은 코웃음을 쳤다.
‘왕년에 천재 소리 한번 안 들어 본 사람 있어?’
비웃었다.
이게 음악 감독이 자기보다 나이 어린 작곡가를 대하는 자세였다. 오만한 사람이었다.
홍 과장은 음악 감독의 얘기에 놀랐다.
“제가 금방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수철에게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용수철 선생님.”―네, 안녕하세요.
홍 과장은 수철에게 음악 감독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수철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장면들이었다.
“선생님이 말씀해 주셔야 제가 무슨 조처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홍 과장이 계속 물어서 수철은 어쩔 수 없이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얘기했다.
얘기를 들은 홍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금방 조처할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홍 과장은 전화를 끊고 이 사실을 이 차장에게 보고했다.
이 차장은 박 대표를 만난 이후 수철과 관련된 일은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
“그래? 고민하지 말고 바로 짤라.”
이 차장은 음악 감독이 벌인 황당한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결정을 내렸다.
음악 감독을 단칼에 자른 것이다.
전화 한 통화면 금방 들통날 짓을 음악 감독은 왜 벌였는지 미스터리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금별기획의 이진석 차장이라고 합니다.”
이 차장은 직접 수철에게 전화했다.
신분을 밝히고 음악 감독이 벌인 해프닝을 사과했다.
자신들이 사람을 잘못 뽑은 실수라고 했다.
“아직 영상사업단이 체계화되지 않아서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입니다. 사과드리고 이해 부탁드립니다.”
수철이 통화한 이 차장은 다른 사람들과 격이 달랐다. 정중하고 명확했다. 말에 힘과 무게가 있었다. 그러면서 같이 편하게 일할 만한 음악 감독이 있으면 추천하라고 했다.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말씀해 보세요.”
수철은 잠시 머뭇하다가 생각나는 사람을 말했다.
―전 김명석 선생님이 편하긴 한데,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김명석 선생님께 의사 타진을 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차장은 시원시원하게 얘기했다.
전화를 끊고 이 차장은 홍 과장과 최 팀장을 불렀다.
수철의 의견을 알려 주며 그들의 생각을 물었다.
“왜 김명석 선생이 음악 감독 후보에서 빠져 있었던 거지? 그분은 경험도 많고 잘한다고 소문도 난 사람이잖아.”
홍 과장이 나서서 대답했다.
“하린이 앨범 프로듀서를 맡고 있어서 드라마 음악 감독까지 제안하기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말에 이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겠군, 알았어. 그럼 다른 사람으로 한번 알아봐. 용수철 선생과 마찰이 안 생길 만한 사람으로 말이야.”“네, 그런데 차장님.”
“말해.”
“지금은 김명석 선생도 가능해 보입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에 이 차장이 홍 과장을 빤히 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은 가능하다니?”“하린이 녹음 일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돼서 믹싱까지 마친 상황입니다. 그래서 시간상으로는 김명석 선생도 이번 드라마의 음악 감독을 충분히 맡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
“네.”
“알았어, 그럼 연락해서 의사를 물어봐.”
“네, 알겠습니다.”
“다른 의견은 없지?”
이때 양 대리가 나서서 말을 덧붙였다.
“아마 김명석 선생님도 좋아할 겁니다. 용수철 선생님과 친분이 두터우니까요.”“그러고 보니까 하린이 보컬 트레이너를 김명석 선생이 추천한 거였지? 용수철 선생으로?”
“네, 맞습니다.”
“하하, 재밌군.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이야.”
홍 과장도 말을 덧붙였다.
“두 사람이 같이하면 시너지 효과도 생길 겁니다. 서로 잘 아니까요.”“그렇겠군. 그럼 당장 연락해 봐.”
“네.”
이 차장에게 꾸벅 인사하고 나온 양 대리가 복도를 내려가며 홍 과장에게 물었다.
“그분 간도 크지, 어떻게 용수철 선생님에게 그랬을까요?”“어리고 음악만 하니까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그래도 금방 들통날 일을 그렇게?”“주제곡을 뺏기니까 가사라도 먹으려고 생각한 거겠지.”“우리가 영입에 관심을 두는 아티스트라는 걸 몰랐겠죠?”“그건 그 사람이 알 수가 없지.”
둘은 고개를 저으며 복도를 내려갔다.
* * *
―네가 날 추천했다며? 고맙다, 수철아!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음악 감독은 피곤한 자리라고 고개를 저었던 김명석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