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하루아침에 바뀌는
수철은 김명석의 반응이 의외였다. 너무 뜻밖이어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음악 감독은 피곤한 일이라고 해서 금별기획에서 물었을 때 적극 추천도 못 하고 조심스레 의견을 말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서 팔짝 뛰며 전화가 올 줄이야.
“아, 네, 선생님이 좋다고 하시니까 정말 다행이에요.”
수철은 김명석의 과한 반응에 당황하며 대꾸했다.
―난 전화 받자마자 바로 오케이 했어. 너랑 같이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김명석은 홍 과장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입이 벌어져서 바로 승낙했다.
자신은 수철과 손발이 잘 맞으니까 열심히 해 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신이 나서 바로 수철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수철아, 잘해 보자.
“네, 선생님.”
수철도 김명석이 음악 감독을 맡게 돼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지난 음악 감독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김명석은 천사다.
―근데 수철아, 미안하다.
잘해 보자며 신나게 얘기하던 김명석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바뀌었다.
수철이 멈칫하며 물었다.
“네? 뭐가요?”
―지난 음악 감독 말이야. 난 처음부터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자세히 말해 주지 못했잖아.
“그래도 귀띔해 주셨잖아요?”―그거론 부족하지. 나도 말을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했었는데, 함부로 말하기가 좀 그랬어. 어쨌든 그런 일이 생겨서 미안해.
김명석의 목소리에서 갈등했었다는 게 느껴졌다. 수철은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아니에요, 선생님. 전 괜찮아요. 그렇게 귀띔해 주신 것만으로도 도움이 됐어요.”―그렇게 말해 주면 고맙고. 원래 음악 판에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서로 쉬쉬하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관례처럼 돼 버렸어.
“아, 저는 몰랐어요.”―넌 이런 구질구질한 것까지 알 필요가 없지. 어쨌든 미안하다. 더러운 꼴 보게 해서.
“아니에요. 선생님이 왜 미안해요?”―음악은 네가 잘해도 이 바닥은 내가 선배잖아.
“…….”
* * *
하준이 가수로 참여하면서 프로젝트 앨범의 속도가 빨라졌다. 원래 짬짬이 진행하기로 했었지만, 시간이 바쁜 것도 아니고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어서 천천히 할 이유가 없었다.
수철은 저녁에는 개인 작업과 드라마 음악 구상에 신경 썼고, 낮에는 프로젝트 앨범에 집중했다.
사실 집중이랄 것도 없었다.
음악 작업은 모두 마쳤으니 각자 돌아가면서 하준에게 자신의 곡을 연습시키면 됐다.
“형, 제 곡이 좀 어렵죠?”
연습을 하다가 수철이 물었다.
하준은 괜히 이마를 한번 닦으며 대답했다.
“이런 노래는 처음이라서 좀 그렇긴 한데, 걱정 마. 금방 적응할 테니까.”
수철이 만든 곡이 단어로만 이뤄진 일렉트로닉 음악이라서 하준에게는 생소했다. 하지만 하준은 열의를 보이며 연습에 임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하준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수철아, 나 완전 소름 돋았어.”
“네? 왜요?”
“네 곡 완전 중독성 쩔어. 하루하루가 달라, 완전 음악에 빠져들고 있어.”“아, 좋은 뜻이네요?”“그 정도가 아니야. 이게 무슨 우주의 블랙홀 같은 느낌이야. 집시 소년이 우주여행을 하다가 블랙홀에 빠져들어서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아.”“와, 표현이 멋있어요.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군요?”
수철은 하준의 표현력에 감탄했다. 하준은 마치 블랙홀에 빠져 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역시 가수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시 소년이 세상을 떠돌며 여행하는 건 맞지만 우주의 블랙홀이라니.
음악이 일렉트로닉이어서 그렇게 느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알면 알수록 뭔가 깊고 거대해. 대체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 수가 있는 거지?”
하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수철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매일 새로운 감탄을 내놨다.
수철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반면 박 대표의 곡은 수철의 곡에 비해 처음부터 수월했다.
“준아, 어려울 거 없지?”“네, 곡이 너무 좋아요. 완전 제 취향이에요. 제가 보사노바 좋아하잖아요.”“하하. 그래,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하준은 쉽게 곡을 익혔고, 덕분에 연습 분위기도 밝았다.
“가사도 한강 야경이니까, 사람들이 한강에서 산책하고 야경을 보면서 이 음악을 들으면 좋을 거 같아요.”“그래, 그런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면서 만들었지.”
“대표님.”
“어.”
“이 곡은 서울시에서 한강 주제곡으로 쓰면 좋을 거 같아요. 가사는 말할 것도 없고, 멜로디도 쉽고 흥이 나잖아요.”
그 말에 박 대표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하, 녀석. 오늘 기분 좋은 멘트를 많이 날리네? 매니저 해도 되겠어.”
장난스레 웃더니 금세 표정을 바꿔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짜 가능할까?”
“네, 충분히요.”
하준이 확신하자 박 대표는 잠시 고민했다.
‘서울시가 한강을 주제로 공모전을 했었나?’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머리가 복잡해지는지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 얘기는 다음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불러 보고 연습을 마치자.”
“네.”
하준과 박 대표는 오랫동안 알아 와서 그런지 연습이 수월했다.
하지만 다혜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미래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애잔한 가사도 부담스러웠고, 지나치게 친절한 다혜의 연습법도 부담됐다.
“와, 노래랑 오빠 목소리랑 너무 잘 어울려요!”
“아, 그래?”
“네! 오빠가 노래 부를 줄 알고 만든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잘 맞을까요?”
다혜는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하준의 생각은 좀 달랐다. 가사가 애잔한데 템포까지 느려서 질척대는 느낌이 들었다.
미래의 연인에게 넌 꼭 나랑 만나야 한다고 협박하는 느낌이었다. 만나지 않으면 평생 저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굵은 자신의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이건 정말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다혜야, 가사는 이렇게 확정한 거지?”
“네.”
“좀 바꿔 볼 생각은 없고?”
“전혀요.”
다혜는 단호했다. 하준도 더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렇구나.”
갑자기 다혜의 눈빛이 영롱해졌다.
“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
“제가 작사에도 소질이 있는지를요. 정말 딱 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가사예요. 저, 이러다 작곡보다 작사로 뜨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
자뻑은 불편해도 그냥 참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서 거품이 빠질 때까지.
자뻑은 양날의 검이다. 자만해서 실패의 늪에 빠트리기도 하지만, 자존감을 높여서 창작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준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다시 이었다.
“가사가 그렇게 만족스럽다면 템포를 좀 당겨 보는 건 어떨까? 내 목소리가 너무 늘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그런가요? 전 지금이 딱 좋은 거 같은데.”
다혜는 자신의 음악에 빠져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하지만 하준은 이것마저 양보할 수 없었다.
몇 번을 설득해서 템포를 조금 앞당겼다. 그랬더니 그나마 조금 듣기가 편해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아니, 상당히 당겨야 할 거 같았다.
하준이 연습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혜가 입을 뗐다.
“노래할 때 오빠 옆모습이 너무 멋있는 거 같아요.”
그 말에 하준이 연습을 멈췄다.
“하하. 다혜야, 왜 갑자기 그런 말을……?”“그냥 멋있어 보여서요. 왜요? 싫으세요?”“아니, 수철도 있는데 그런 말을.”
하준이 난감한 얼굴로 대답하자 다혜가 얼굴을 붙여 왔다.
“수철이 왜요?”
“수철이 앞에서 외모 얘기는 좀 그렇지.”“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수철은 수철대로, 오빠는 오빠대로 매력이 있는 거죠.”“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차이가 나잖아.”
“…….”
다혜가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하준이 말을 덧붙였다.
“난 수철이 노래를 안 불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수철이 노래까지 했으면 정말 여러 가수들 좌절했을 거야. 더군다나 작곡 실력은, 와우―!”
하준이 감탄사까지 내뱉으며 수철을 칭찬하자 다혜의 얼굴빛이 변했다.
시큰둥하게 입을 뗐다.
“수철 얘기는 그만하시죠?”
“아, 미안.”
“제 시간에는 제 음악에만 집중해 주세요, 오빠.”“……그래, 알았어.”
갑자기 돌변해서 연습실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둘은 어색해졌다.
똑똑.
다행히 박 대표가 연습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잠시 쉬었다 하는 게 어때?”
“네.”
* * *
모두 모여 커피 브레이크를 가졌다. 연습 상황을 말하며 앞으로의 녹음 일정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지?”
“네.”
박 대표의 물음에 수철과 다혜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표가 계속 말을 이었다.
“발매 시기를 생각한다면 시간은 아직 넉넉해. 그래도 미리 다 해 놓고 나중에 여유롭게 쓰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전 좋아요.”
“저도요.”
“저도 대표님 의견에 따를게요.”
모두 박 대표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럼 녹음 일정을 한번 잡아 보자.”
“네.”
그때 박 대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지이이잉.
이 실장이었다.
―대표님! 어디세요?
“작업실.”
―시간 되시면 같이 저녁이나 하시죠?
“저녁?”
―네, 바쁘세요?
“바쁜 건 아닌데, 지금 미팅 중이라서.”―아, 그럼 다 모여 있겠군요.
“그렇지.”
―언제쯤 끝나세요?
“한 30분은 걸릴 거야.”―그럼 30분 후에 차 보내겠습니다. 타고 오십시오.
“차?”
느닷없이 차를 보낸다니.
박 대표는 멈칫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이 실장은 늘 그래 왔다는 듯이 대답했다.
―작업실 앞에 나오셔서 타고 오시면 됩니다. 음식점도 예약해 뒀으니까 다 같이 오십시오.
“……그래, 알았어.”―네, 이따 뵙겠습니다.
박 대표는 전화를 끊으며 ‘뭐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실장이 저녁을 사겠다는데?”
“…….”
“다들 시간 되면 같이 가자.”
“네.”
전화를 끊고 30분 후, 작업실 건물 앞에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검은색 밴이 나타났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차도 없이 뛰어다녔는데 어느새 으리으리한 밴이라니.”
박 대표가 감탄과 실소를 섞어서 내뱉었다.
수철은 음악 판이 도박판 같다는 박 대표의 말이 실감 났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기도 하지만 하루아침에 스타를 만들고, 하루아침에 부를 거머쥐는 데가 바로 이 제작 판이야.”
이 실장은 박 대표의 이런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차가 도착한 곳은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강남의 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종업원이 나와서 일행을 이 실장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모두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해프닝 때문에 사과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 실장은 다시 호기로운 모습을 보이며 팔까지 벌렸다.
그 모습에 박 대표는 피식 웃었다.
“천성을 누가 말려?”
한마디 하고는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바쁘지 않아?”
“매니저가 들어와서 이제 좀 한숨 돌리고 있습니다. 한 달 동안은 정말 정신없었거든요.”“직원은 몇 명이나 뽑은 거야?”“3명이요. 한 명은 사무실에서 전화 받고, 한 명은 방송국 돌고, 한 명은 운전해서 행사 다니고. 일단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그래, 그러면서 자리를 잡는 거지.”“이번엔 대표님 말씀대로 하나하나 신중하게 하고 있습니다.”“그래, 좋아 보인다.”
박 대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가 지금 일등이지?”“정확히 2주째 일등입니다.”“하하! 얼굴이 쫙 폈네? 이제 살 만해 보인다.”“하하, 제가 뭐 언제는 죽었었습니까?”
이 실장은 과거를 부정하며 크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실장의 너스레를 보며 따라 웃었다.
이 실장의 호기로운 모습이 오늘은 보기 좋았다.
“자, 이건 주방장 추천 요리입니다. 메뉴에는 없는 것이니까 맛보시고 평가도 해 주세요.”
이 실장과 박 대표 일행은 유명 셰프의 대접을 받으며 흡족한 저녁 식사를 했다.
* * *
“대표님은 잠시 저랑 얘기 좀…….”
저녁을 먹고 나와서 이 실장은 할 얘기가 있다며 박 대표를 잡았다. 그래서 모두 돌아가고 박 대표만 남았다.
“대표님, 사실 오늘 뵙자고 한 것은…….”
이 실장이 저녁을 먹자고 한 것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자리를 옮긴 호텔 라운지 바에서 박 대표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