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15화 (115/239)

#115화. 예상치 못한 가수(1)

“거긴 대표님보다 제가 더 잘 알죠.”

이 실장은 대꾸하고 몸을 돌려서 정면을 바라봤다.

“하준이 그 친구, 진짜 고생 많이 했겠네.”

혼잣말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기 대표가 원래 뭐 하던 사람인지 아세요?”“나야 알 수가 없지. 뭐 하던 사람인데?”“원래 집에 돈이 좀 있어서 강남에서 술집 하다가 넘어온 사람입니다.”

“그래?”

“네, 그래서 이 바닥 생리도 잘 모르고, 소속 가수를 술집 종업원 다루듯이 한다고 합니다. 아주 평이 안 좋아요.”

“역시 그랬었군.”

박 대표는 뭔가 집히는 게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이 가수들한테는 그렇게 충성을 요구합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 실장이 혀를 찼다. 그래도 이 실장은 가수를 엄청 챙기고 매너 있게 대한다. 기본적으로 가수들 덕분에 비즈니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돈 좀 있고 부모 빽도 좀 있고 하니까 연예계 바닥에서 놀겠다고 들어온 건데, 이 바닥 물 다 흐리고 다닙니다.”“그런 사람이었어?”

“네, 장난 아닙니다. 피디들한테는 간도 빼 줄 듯이 바짝 숙이고 다니면서 정작 소속 가수들한테는 또라이처럼 그렇게 갑질을 합니다. 정말 인성 안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인간이에요.”

이 실장은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거품을 물고 험담을 쏟아 냈다.

박 대표도 악명이 높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준에겐 이미 지나간 과거다. 오래전에 기획사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잘 알아봐 주지 못한 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박 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런 회사에 왜 자꾸 가수들이 들어가는 거지?”

아직도 거기랑 계약하는 가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속고 들어가는 겁니다.”

“속아?”

“네, 회사 이름도 바꾸고, 대표 이사도 바지로 세웠으니까요. 하지만 실세는 그대로입니다.”“나 참, 그 정도면 완전 사기꾼인데 언론은 뭐 하는 건지…….”

박 대표는 씁쓸한 얼굴로 혀를 찼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어떤?”

“말 잘 듣고 비위를 잘 맞추는 가수들은 팍팍 밀어줍니다.”

“허!”

말문이 막혔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직도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어? 진짜 정신 나간 사람이네.”“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같은 일을 한다는 게 수치스럽다.”“저도요. 그 사람은 연예인들이랑 술 먹고 놀고 싶어서 회사 차린 사람입니다.”

“유치한 놈이군.”

“맞습니다. 정말 치졸한 인간입니다.”

박 대표는 씁쓸한 얼굴로 택시를 잡으러 도로변으로 다가갔다. 이 실장도 뒤따랐다.

“어쨌든 대표님, 그 회사 대표는 이제 뒷목 잡고 쓰러지겠네요.”“그게 무슨 말이야?”“그렇잖아요? 나간 하준이가 최고의 작곡가들이 만든 음악을 부르고, 저처럼 유능한 제작자가 붙어서 홍보까지 하는데 음악이 뜨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허허. 그래, 그렇게 되길 바라야지.”“어쨌든 이런 보물을 내동댕이쳤으니까.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죠. 하하.”

이 실장은 재밌다며 낄낄댔다.

박 대표도 피식 웃었다.

이 실장의 말대로 그런 그림이 나오면 통쾌할 것 같았다.

“사실, 내동댕이친 건 아니지. 끝까지 묶어 놓고 있다가 계약이 끝났으니까 어쩔 수 없이 풀어 준 거지. 차라리 내동댕이라도 쳤으면 준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 말에 이 실장도 끄덕였다.

“네, 생각할수록 치졸의 끝판왕이에요.”“이젠 뭐, 다 지나간 일이니까.”“그래도 전 진짜 이해가 안 됩니다. 싫으면 계약을 파기하면 되지, 묶어 놓고 너 죽고 나 죽자고 한다니. 에이!”

이 실장은 금방 욕이라도 할 표정이었다.

박 대표는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며 대꾸했다.

“상식적인 사람은 아니지.”“맞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 비하면 순한 양이죠.”

박 대표가 택시를 잡으려다 말고 쳐다봤다.

“……순한 양?”

“그 사람에 비하면요.”

* * *

“쌤이 좋으시면 저도 괜찮아요.”

박 대표가 이 실장의 제안을 전하자 수철은 박 대표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다혜도 잇따라서 동의했다.

“저도 찬성이에요.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다혜는 좋아서 입이 벌어졌다. 제작비도 안 들고, 행사비의 10%까지 떼어 준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박 대표가 하준을 쳐다봤다.

“준이는?”

“저도 좋아요, 객원 가수로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일이 점점 커지네요?”

하준은 이 실장의 제안이 기분 좋은지 미소를 띠었다.

그 마음을 아는 박 대표도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일이 좀 커지긴 했지. 그런데 앨범을 내면 홍보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이 실장의 생각은 맞는 말이야.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갖고 시작했는지와 상관없이 말이야.”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표는 이 실장 덕분에 한숨 덜었다. 하준을 프로젝트 앨범에 객원 가수로 참여시켜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이 실장이 아니라 박 대표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싫은 소리 하지 말고 쉽게 수락할 거 그랬나?’

괜히 이 실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수철이 박 대표를 봤다.

“실장님도 바쁘실 텐데 굉장히 적극적이시네요?”“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거지.”

박 대표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다혜가 툭 내뱉었다.

“생각이 참 기특하네요.”

그 말에 박 대표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왜요?”

박 대표가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빤히 쳐다보자 다혜가 물었다.

“기특하다는 말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한테 쓰는 말 아냐?”

“그런가요?”

“그럴걸?”

“…….”

다혜가 고개를 돌려 수철과 하준을 번갈아 봤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진 하준이 일어났다.

“오늘은 제가 커피 쏠게요. 뭐로 드실래요?”“난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뭐.”

“수철은?”

“저도 쌤이랑 같은 거로요.”

“다혜는?”

“전 달달한 캐러멜마키아토요.”

잠시 후, 하준이 사 온 커피를 마시며 박 대표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다 찬성한 거로 알고, 난 바로 이 실장에게 오케이 할게.”

“네.”

“이 실장이 제작비를 다 댈 거니까 모아 놓은 돈은 진행비로 쓰거나 아니면 다 돌려주면 돼.”“조금만 빼 놓고 다 돌려드릴게요.”

재정을 맡은 다혜가 대꾸했다.

박 대표가 말을 이었다.

“이 실장은 홍보하고 행사 잡는 것만 맡고, 우리는 원래대로 프로듀싱 하면서 제작해 나가면 되는 거야.”

“네.”

“준이도 진행하면서 궁금한 거 있으면 수시로 물어보고.”

“네, 대표님.”

이로써 프로젝트로 진행하던 습작 앨범은 정규 앨범으로 전환되었다. 모두가 이 실장의 적극적인 제안 덕택이다. 이 실장은 뮤직비디오까지 찍겠다고 했지만 그건 말렸다.

* * *

수철은 김명석이 음악 감독을 맡게 되자 마음이 편했다. 너무 편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건 김명석도 마찬가지였다. 수철이 다 알아서 하니까 특별하게 코멘트 할 게 없었다.

수철과 같이 일하는 걸 좋아하는 김명석이다. 수철이 웃었다면 김명석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디렉션이 필요해?”

작업에 필요한 자료를 살펴보던 김명석이 물었다.

음악 감독으로서 작곡의 방향을 제시해 줘야 하느냐고 묻는 거였다.

물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형식상 물어본 거였다.

수철이 시크하게 대답했다.

“네, 해 보세요.”

“뭐? 해 보세요?”

수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식으로 말하니까 김명석이 째려봤다.

“아, 죄송해요. 해 주세요, 선생님. 아니, 감독님.”

수철이 미안해하자 김명석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으흠!”

그리고 말을 이었다.

“드라마 음악은 선을 넘지 말아야 해. 영상을 잘 받쳐야지, 과도하면 안 된다는 말이야. 알고 있지?”

“네.”

수철은 이미 영화음악을 해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이건 드라마뿐만이 아니라 영상에 실리는 모든 음악이 마찬가지야. 영상을 위한 음악이지, 음악을 위한 영상은 아니니까. 뮤직비디오만 빼고 다 그래.”

김명석의 말대로 음악을 위한 영상은 뮤직비디오 말고는 없다. 심지어 뮤직비디오도 가끔은 영상 위주로 나갔다. 하지만 그 어떤 영상도 소리를 빼면 시체다.

김명석의 디렉션을 듣던 수철이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응.”

“주제곡을 편집해서 하이라이트 부분에도 넣을 거라고 들었는데, 그러면 노래할 가수와 색깔이 맞아야 하지 않나요?”“그렇지. 남녀 배우의 감정선을 고려해서 가수를 선정해야지. 그건 하이라이트뿐만이 아니라, 주제곡도 마찬가지잖아?”“네, 그건 아는데 저는 주제곡은 이미 그림을 잡아 놨거든요.”

“벌써?”

“네.”

김명석은 늘 그렇듯 놀란 표정을 한번 짓고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잡았는데? 대충 설명 좀 해 봐.”“별거 없어요. 첫 장면이 눈 덮인 산에서 남녀 주인공이 스노우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니까. 거기에 어울리는 소리를 붙였고요, 멜로디 라인은 둘의 보드가 교차하면서 움직이는 것처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듀엣으로 잡았어요.”

“듀엣?”

“네.”

“음……. 데모가 벌써 기대가 되네, A 버전만 잡은 거지?”“B 버전도 잡았어요.”“허, B 버전은 어떤데?”“A 버전보다 사운드를 격하게 잡았어요. 익스트림 스포츠에 맞춰서 군대가 행진하듯이 스네어 드럼(Snare Drum)으로 리듬을 주고 북소리도 어택(Attack)을 많이 줬어요.”“와, 말만 들어도 입체감이 소름 돋네.”

김명석은 수철이 설명이 머릿속에 그려지는지 탄성을 내뱉었다.

수철은 반응에 대꾸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응.”

“그렇게 하려면 가수는 연출팀에서 선정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제가 선정하는 게 좋을까요?”

수철의 말에 김명석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일단 네 의견을 연출팀에 전달하고 상의해 볼게.”

* * *

수철의 의견을 전달받은 제작팀에서는 회의가 벌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소식을 알려 왔다.

“듀엣곡이면 남녀 배우가 주제곡을 부르는 게 어떨까요?”

“배우가요?”

김명석이 되묻자 홍 과장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대답했다.

“네, 드라마 주제곡은 가수의 보이스 컬러가 남녀 배우의 감성과 맞아떨어져야 하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남녀 주인공이 노래를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연출팀에서 나왔어요.”

“결정된 건가요?”

“아니요, 배우는 아직 이런 사실도 모르고 있어요. 주제곡 데모 버전이 나오면 그때 말해 보려고요.”“네, 그럼 결정이 되면 알려 주세요.”

김명석이 말을 하고 일어서는데, 양 대리가 급하게 홍 과장에게 다가왔다.

“과장님, 잠시만요!”

홍 과장의 주의를 끌고는 김명석과 눈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홍 과장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양 대리의 얘기를 듣는 홍 과장의 눈이 커졌다.

“그래?”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양 대리에게 사실이냐고 되물었다.

양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홍 과장은 김명석과 눈을 마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기획팀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먼저 식사를 하세요. 제가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말을 하고 홍 과장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김명석은 급하게 사라지는 홍 과장의 뒷모습을 보며 갸웃했다.

* * *

“어서 와, 홍 과장.”

홍 과장이 도착하자 이번엔 기획팀에서 회의가 벌어졌다.

아직 음악이 완성된 상황이 아니라서 가수 선정에 여유가 있다.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얘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기획팀 소관이 아닌데 기획팀에서 회의를 한다는 건 다른 뜻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내 생각엔 이번 기회를 살려서…….”

회의는 이 차장이 이끌었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20분가량 진행됐다.

회의가 끝나자 홍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짧은 회의를 마치고 홍 과장은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서둘러 내려갔다.

* * *

계단을 내려온 홍 과장은 수철과 김명석이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급해 보이는 홍 과장의 모습을 김명석과 수철이 쳐다봤다.

홍 과장이 바로 말을 꺼냈다.

“드라마 주제곡은 남녀 주인공이 부르지 않는 거로 결정했습니다.”

“아. 그래요?”

“네, 대신 새로운 사람이 부르기로 했습니다.”

홍 과장은 묘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김명석이 물었다.

“누구요?”

“두 분이 잘 아는 사람입니다.”

홍 과장은 무슨 퀴즈 놀이라도 하려는지 계속 묘한 미소를 띠며 눈까지 반짝였다.

김명석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며 다시 물었다.

“누군데 그러세요?”

홍 과장이 씨익 웃었다.

“하린이요.”

“네? 하린이요?”

김명석과 수철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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