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든든한 파트너
“준이 형이…….”
수철은 점심을 먹으며 다혜에게 하준이 주제곡을 부르게 될 거 같다는 말을 전했다.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 앨범의 스케줄이 조절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반찬을 집던 다혜가 눈을 마주쳤다.
“언제부터 하는데?”
“아직 정확하진 않지만 다음 주부터는 시작할 거 같아.”“그럼 우리 앨범은 당분간 멈춰야 하는 거야?”“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지금 그대로 진행하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하지만 혹시나 차질이 생길까 봐 미리 얘기하는 거야.”
다혜는 잠시 생각하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
표정이 밝지 않았다.
수철이 다혜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이 왜 그래? 준이 형이 주제곡 부르는 거 싫어?”
수철은 다혜가 갑자기 힘이 없어 보여서 뭔가 잘못 말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혜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야 좋지. 준이 오빠가 잘되는 거잖아.”“그런데 왜 그래? 싫어하는 사람처럼.”
다혜는 말을 멈추고 젓가락질을 깨작댔다.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갑자기 좀 소외감이 들어서.”
“소외감?”
“너야 잘되는 건 당연하지만, 이제 준이 오빠도 잘될 거라고 하니까 왠지 나만 정체된 거 같아서.”
수철은 다혜의 기분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잘 챙기지 못한 거 같아서 미안하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정체된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다.
하준이 잘되면 그건 다혜에게 도움이 되지, 뒤쳐지고 정체될 일이 아니다.
다혜의 마음은 괜한 우울감이다.
그건 서로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수철은 다혜의 그런 감정에 반발했다.
“정체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앨범이 있잖아?”“우리 앨범도 준이 오빠는 네 음악이랑 쌤 음악만 좋아해.”
수철의 반발에 다혜는 힘없이 대꾸했다.
그 말에 수철은 다혜를 빤히 쳐다봤다.
“설마?”
“진짜야, 내 곡은 템포에도 불만이 많고 가사도 별로 안 좋아하는 눈치야.”
수철은 이 부분에서 할 말이 없었다. 수철도 그런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철은 잠시 화제를 돌렸다.
“난 네 곡이 타이틀 곡이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
그 말에 다혜의 눈이 커졌다.
“진짜?”
“응.”
“어떻게 장담해? 쌤이 사람들에게 모니터링해서 공정하게 정할 거라고 했잖아?”“그렇긴 하지. 그런데 쌤이랑 나는 네 곡이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무슨?”
다혜가 의아한 얼굴로 수철과 눈을 마주쳤다.
“내 곡은 대중적이지 못해서 타이틀 곡으론 아니고, 쌤 음악은 보사노바라서 다른 음악에 묻히기에 십상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네 곡은 전형적인 팝 스타일의 대중음악이잖아? 타이틀 곡으로는 딱이지.”
다시 다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응, 쌤도 나랑 같은 생각이야. 물론 사람들의 모니터링 결과를 중시하겠지만, 우린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수철은 다혜에게 힘을 실어 주고자 비밀스러운 얘기까지 털어놨다.
다혜는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다.
“모니터링을 하면 결국 사람들이 네 곡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 말에 수철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우리 앨범이 일렉트로닉 음악 앨범이 아니잖아. 그래서 내 곡은 타이틀 곡으로 부적합해. 그건 쌤도 나랑 같은 생각이야.”
“그럼 쌤 곡은?”
“쌤도 내 곡이랑 비슷한 상황이야. 보사노바 곡을 타이틀로 하면 다른 음악들도 재즈나 보사노바로 받쳐 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 말에 다혜의 입이 잠시 씨익 벌어졌다가 멈췄다.
“그럼 내 곡은? 내 곡도 팝 음악으로 받쳐 줘야 하잖아?”“팝은 다르지. 팝은 대중적이어서 다른 색깔의 곡을 넣으면, 그건 오히려 앨범의 퀄리티를 높여준다고 생각할걸?”
“그런가?”
“그럴 거야.”
수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다혜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가사 얘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가사는 준이 형이랑 연습하면서 좀 더 조율해 봐. 아무리 좋은 가사라도 준이 형이 편하게 부르지 못하면 그건 좀 아니잖아?”“알았어,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아.”“그래 잘 상의해서 조율해 봐. 인제 와서 가수를 바꿀 수도 없잖아?”“에이, 그건 아니지.”
다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철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준이 형이 편하게 노래할 수 있게 힘을 실어 줘. 준이 형이 잘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잖아.”“그래, 알았어. 아무래도 네 얘기대로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나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까.”
다혜는 그제야 소외감이 해소되고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수철이 가까이 몸을 붙였다.
“그리고 생각해 봐.”
“뭘?”
“준이 형이 드라마 주제곡을 부르고 유명해진다면 사람들이 앞으로 나올 우리 앨범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까?”
“……!”
“주제곡은 딸랑 한 곡이지만, 우리 앨범은 준이 형이 세 곡을 다 부르는 거잖아? 거기에다가 네 음악이 가장 타이틀 곡이 유력한데.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에 쏠릴까?”
“하―!”
다혜는 입가에서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냉소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이 민망했는지 힐끗 수철의 눈치를 봤다.
괜히 손가락으로 목을 긁적였다.
수철은 한발 더 나아갔다.
“게다가 이 실장님이 방송에 나갈 때 널 세션맨으로 고정한다고 했잖아. 그렇게 되면 돈도 벌고 인기도 얻게 될 텐데 그래도 소외감 느껴?”
그 말에 다혜가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알았어, 인제 그만해. 자꾸 그러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수철이 빙그레 웃었다.
“인제 원래대로 돌아온 거야?”“돌아온 지 한참 됐어.”
“풋.”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
“갑자기 왜?”
“네가 지난번에 샀잖아. 나도 한번은 사야지.”
* * *
작업실에 넷이 모여 앉았다.
하준은 좋아서 하얀 이를 드러냈다.
“와, 듣기만 해도 벌써 심장이 콩닥거린다.”
잔뜩 입이 벌어져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수철아, 내가 뽑힌다면 정말 열심히 해 볼게.”“네, 형.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수철이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박 대표도 하준을 응원해 줬다.
“준아, 네가 일이 이렇게 풀리려고 그동안 그렇게 고생했나 보다.”“감사해요, 대표님. 다 대표님 덕분이에요.”
박 대표의 말에 하준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혜도 하준을 축하했다.
“준 오빠, 축하해요. 스타 인증 기대할게요.”“그래, 고마워. 지금 앨범도 열심히 할게.”
하준은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듯이 기뻐했다.
박 대표가 한마디 덧붙였다.
“좋은 기회니까 수철을 믿고 잘 따라가 봐.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
“네.”
“그렇다고 거기에 푹 빠져서 우리 앨범을 대충대충 하면 안 돼. 알았지?”
이 말은 다혜를 의식해서 한 말이었다.
하준이 대충대충 할 리가 없다는 건 박 대표가 더 잘 안다.
다혜도 박 대표의 말뜻을 아는지 피식 웃었다.
하준은 눈에 힘을 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대표님! 걱정 마세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 * *
“선생님―!”
수철이 김명석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하린이가 두 팔을 벌리며 달려왔다.
“잘 지냈어?”
수철은 격하게 반기는 하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하린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수철을 봤다.
“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하하, 그래. 앨범 녹음은 잘했어?”“네! 노래 잘 불렀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어요.”“오, 기분 좋은 얘기네?”“호호,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아니야, 네가 잘한 거지.”
수철은 빙그레 웃다가 뒤에 서 있는 하준을 의식했다.
“아 참! 하린아, 대장 선생님께 얘기 들었지? 이분이 너랑 듀엣을 맞춰 볼 하준 형이야.”
그 말에 하린이가 두 손을 모아서 공손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주하린입니다.”“네, 안녕하세요. 하준이에요.”
하준도 미소를 지으며 같이 인사했다.
그때 컨트롤 룸에서 김명석이 복도로 나왔다.
“수철아, 왔어?”
“네, 선생님. 준이 형도 같이 왔어요.”
수철이 하준을 소개하자 하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하준이라고 합니다.”
하준이 꾸벅 인사를 하자 김명석이 다가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수철이 칭찬을 많이 하더라고요. 반가워요.”
하준은 김명석의 손을 잡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하준은 유명한 음악가를 만난 탓에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김명석은 그런 하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도 잘 부탁해요. 자, 안으로 들어가죠.”
김명석이 하준을 컨트롤 룸으로 이끌자 수철과 하린이도 따라서 들어갔다.
* * *
넷은 테이블에 모여 차를 마시며 잠시 얘기를 나눴다.
주제곡에 관한 얘기와 어울리는 보컬의 컬러, 그리고 같이하게 되면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김명석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제 노래 한번 들어 볼까요?”
말을 마친 김명석이 하준과 하린이를 번갈아 봤다.
“네.”
하준과 하린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목을 풀고는 같이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헤드폰을 쓰고 마이크 앞에 섰다.
“준비됐어요?”
“네.”
“반주 틀게요.”
“네.”
반주가 시작되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준이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듀엣을 시작했다.
“When the strong wind subsides the heat―!”
노래는 유명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제곡 이었다.
이 노래는 하준의 보이스 성향과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김명석이 정한 곡이었다.
오늘은 하린이의 소리에 어울리는 남자 가수를 선택하는 자리다.
하린이의 보이스는 이미 잘 알고 있기에 하준에게만 집중하면 된다.
그런데.
첫 소절이 시작되자마자 김명석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금세 웃음이 비집고 새어 나왔다.
긴장감이 돌았던 상황이 의외로 싱겁게 끝나 버렸다.
김명석은 잔뜩 미소를 머금은 채 수철을 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골랐다는 뜻이었다.
“And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It is where we are.”
밖의 상황을 모르는 하준과 하린이는 계속 노래에 집중했다.
김명석은 둘의 노래에 맞춰 리듬을 타다가 수철에게 어깨를 기울였다.
“더 안 들어도 되겠는데?”
합격이라는 뜻이다.
수철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하린이랑 잘 어울리죠?”“그래, 완전 궁합이 딱이야. 어디서 이런 보물을 찾아냈어?”
김명석은 마음에 쏙 드는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수철도 같이 빙그레 웃었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어떠세요? 이번 드라마 분위기엔 잘 맞을 거 같으세요?”“그래, 벌써 딱 감이 오는데 뭐.”
김명석은 부스 안에서 둘이 노래하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듀엣에 흠뻑 빠진 모습이었다.
하준은 오늘 테스트를 준비하며 많은 연습을 했다.
수시로 수철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긴장감을 유지했다.
반면에 수철은 전혀 긴장감 같은 건 없었다.
처음 하준을 추천할 때부터 김명석이 좋아할 거란 걸 예상했었다.
수철이 의외였던 건 김명석의 반응이 예상보다 과하다는 거였다.
“Because I believe it's the best moment-”
어느 순간 김명석은 테스트는 잊어버린 채 흥에 겨워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 * *
짝짝짝!
하준과 하린이 노래를 마치고 컨트롤 룸으로 돌아오자 김명석은 박수부터 쳤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또 손을 내밀었다.
“잘 들었어요. 앞으로 잘해 봅시다.”
합격이라는 말과 환영한다는 말이 섞여 있었다.
하준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하얀 이를 드러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명석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하린이는 어땠어?”
김명석은 하린이에게도 듀엣을 한 소감을 물었다.
“너무 좋았어요!”
하린이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수철과 김명석의 눈을 반짝이게 했다.
“완전 든든했어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듀엣에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