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For Destiny
“홍 과장님도 좋아하시겠죠?”
수철은 김명석이 좋아하는 돈가스 맛집에 도착해서 물을 따라 주며 물었다.
김명석은 물컵을 잡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홍 과장은 걱정할 필요 없어.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야. 좋아서 입이 벌어질 게 뻔해!”
김명석은 금별기획에서도 하준을 맘에 들어 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면서 수철과 하준, 하린이의 얼굴을 쭉 한번 둘러봤다.
“우리, 완전 슈퍼 팀이 탄생한 거 같지 않아?”
모두 김명석을 쳐다봤다.
“슈퍼 팀이요?”
수철이 되묻자 김명석이 한 명씩 눈을 맞췄다.
“그래. 수철이 너에다가 하린이에, 이제 하준 씨까지 합류했으니 말이야. 대한민국에서 누가 우리를 이기겠어? 하하!”
김명석은 멤버 구성이 마음에 든다며 호기롭게 웃었다.
그 말에 모두 따라서 웃음 지었다.
“이참에 우리 넷이서 진짜 팀을 짜서 드라마랑 영화음악까지 다 정복해 버릴까? 어때?”
김명석은 진담 반 농담 반을 섞어서 물었다.
수철은 빙그레 웃기만 했고 하준은 좋으면서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은 같이 농담을 할 정도의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린이는 어른들의 얘기를 구경만 했다.
“반응이 왜 이리 뜨뜻미지근해? 아직 어색해서 그런가? 어디 엠티라도 가서 팀워크부터 만들까?”
김명석은 멤버들이 호응하지 않자 아쉬운 듯 계속 말을 붙였다.
그때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돈가스 나왔습니다.
커다란 접시에 담긴 왕돈가스가 하나씩 앞에 놓였다.
김명석도 서사를 멈추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자, 어서 먹자.”
“네.”
“하준 씨도 먹어 봐요. 이 집이 내가 인정하는 돈가스 맛집이에요.”“네, 잘 먹겠습니다.”
김명석은 말을 멈추고 커다란 돈가스의 한 귀퉁이를 쓱싹 썰었다. 포크로 콱 집어서 입에 집어넣었다.
하준과 하린이도 노래하고 허기진 탓에 고개를 숙이고 음식에 집중했다.
수철도 한 조각을 썰어서 입에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런데 하준 씨는 그동안 어디에서 활동했어요? 1집도 냈다고 들었는데 왜 내가 몰랐을까?”
김명석이 입가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으면서 물었다.
하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사연이 좀 있었습니다.”“사연? 아, 회사랑 뭐가 좀 잘 안 맞았나 보군요.”
김명석은 경험이 많은 사람답게 하준의 사연을 바로 꿰뚫어 봤다.
하준에겐 아픈 기억인데도 김명석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툭 내뱉었다.
계속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지금이라도 만나게 돼서 다행이에요. 이번 드라마 끝나고도 자주 봅시다. 같이 일도 하고요.”
그 말에 잠시 침울했던 하준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너무 영광입니다. 불러 주시면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김명석이 껄껄 웃었다.
“하하! 그 멘트는 좀 빼야겠어요. 기획사 냄새가 너무 나요.”
“…….”
하준은 대꾸는 못 하고 멋쩍은 표정만 지었다.
잠시 김명석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감독님.”
김명석은 돈가스 조각을 소스에 문지르다 고개를 들었다.
“네, 얘기하세요.”
“호칭을 준이라고 편하게 불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왜요? 불편해요?”
“네.”
하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김명석은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니, 알았어. 우리 어차피 자주 볼 사이니까 지금부터 편하게 부를게.”
“네, 감사합니다.”
하준은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했다.
이때 하린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저는 어떻게 불러 드려야 해요?”
하린이가 두 손을 들어 옆에 있는 하준을 가리켰다.
그 말에 김명석은 포크를 내려놓고 잠시 둘을 번갈아 봤다.
“글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수철한테는 선생님이라고 하고 하준한테는 오빠라고 하는 게 좀 이상할 거 같은데?”
“…….”
“그렇다고 같이 듀엣 하면서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하하, 족보가 좀 꼬였네?”
김명석이 난감한 웃음을 짓자 하준과 하린이는 멀뚱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다 하준이 해답을 내놨다.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보통 가수끼리는 그렇게 부르거든요.”
그 말에 김명석이 맞장구쳤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하준 선배님이라고.”
“네!”
하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수철 선생님과는 여전히 족보가 좀 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무난하겠어. 어차피 우린 다 선후배 사이니까. 하하.”
김명석이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 * *
하준은 김명석에게 합격을 보장받은 후 더 열심히 연습에 매진했다.
지난 기획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연습 벌레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한 것 같았다.
“연습보다 무대가 중요한 거야. 가수는 무대에서 깨지면서 성장해야지.”
박 대표는 지나치게 연습하는 하준을 보며 쉬엄쉬엄하라고 빗대어서 얘기했다.
당장 무대가 잡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무리해서 연습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저도 아는데 연습을 게을리하면 죄책감이 들어서요. 불안하기도 하고요.”
하준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박 대표는 하준이 트라우마가 심하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지난 시간을 자책하는 마음이 있고,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심리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옥죄는 것은 좋지 않다.
그걸 알기에 박 대표는 염려하는 것이다.
“준아. 네가 즐거워야 듣는 사람도 즐겁지.”“네, 대표님. 명심할게요.”
하준은 박 대표의 진심 어린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바로 수철에게 물었다.
“수철아, 주제곡은 언제 완성돼?”“가사가 나오면요.”
“그럼 비슷한 분위기의 곡 좀 추천해 줄 수 있어? 미리 연습 좀 해 놓게.”
“네, 찾아볼게요.”
수철은 박 대표가 우려하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하준이 쉽고 편하게 연습할 수 있는 곡을 골라서 추천했다.
하지만 하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수철에게 계속 모니터링을 부탁했다.
너무 열심이어서 수철이 불편할 정도였다.
하준은 그렇게 드라마 주제곡에 관한 연습과 프로젝트 앨범의 연습을 쉬지 않고 해 나갔다.
“녀석, 쉬지를 않네, 가수는 몸이 생명인데 말이야. 보약이라도 한 제 지어 먹여야겠다.”
박 대표는 그런 하준을 보며 안쓰러워했다.
금세 한약방에라도 달려갈 투로 말했다.
하준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걸 알기에 더는 말리지 못했다.
“지난번에 오빠가 좀 어색하다고 했던 부분 수정했어요. 한번 보세요.”
다혜는 수철의 충고대로 하준과 상의하며 가사를 조율했다.
노래의 템포도 하준이 원하는 대로 조절했고, 편곡도 거기에 맞춰 손을 봤다.
약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큰 갈등은 해소됐다.
이제 프로젝트 앨범은 녹음을 시작해도 될 상황까지 다다랐다.
* * *
“아, 좋다.”
김명석이 쭈욱 기지개를 켜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수도 네가 뽑고, 음악도 네가 만들고. 난 별로 할 게 없네?”
실실 웃으며 수철에게 말을 붙였다.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인생이야. 놀고먹는 거. 돈도 벌면서 말이야. 크하하!”
신이 나서 입이 찢어지라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예 두 다리 쭉 뻗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저기 뒤에 금별기획 사람이!”
“뭐!”
수철이 손가락을 가리키자 김명석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어디?”
뒤를 돌아보며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장난이었다.
“헤헤.”
수철이 싱겁게 웃었다.
“휴―!”
김명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어쭈, 용수철. 너 이런 장난도 칠 줄 알아?”
“죄송요. 헤헤.”
수철이 멋쩍게 웃자 김명석이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다가왔다.
“내가 놀고먹는 게 싫다는 거지?”“선생님도 작업하셔야 하잖아요.”“난 아직 멀었어. 촬영하고 편집이 나와야 시작하지. 그때까지는 전체 디렉팅(directing)만 하면 되는 거고.”“어떤 디렉팅이요?”
“별거 없지. 스케줄 체크나 하고 촬영팀 얘기나 전달하고 뭐 그런 거지.”“그래도 감독님이신데.”
수철은 김명석이 백수라도 된 듯 건들거리며 얘기하자 한마디 꼬집었다.
그러자 김명석은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내밀었다.
“감독이 뭐? 가수도 정해졌고, 주제곡도 네가 다 알아서 할 거잖아.”
“…….”
“그때까지만 한량으로 놀고먹으려고 했더니 녀석이 협조를 안 해 주네?”
“선생님.”
“또 뭐?”
“지난 음악 감독님이랑 비슷한 느낌이 나요.”
“뭐!”
수철의 말에 김명석은 당황해서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금세 표정을 바꿔서 피식 웃었다.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리고 설마 내가 진짜 놀고먹겠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하.”
수철의 말에 뜨끔해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그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
“드라마 제목이요.”
“정해졌어?”
“네.”
“뭔데?”
“사랑은 익스트림이요.”“사랑은 익스트림? 우웩, 제목이 그게 뭐야?”
김명석은 구토하는 시늉을 했다.
“……진짜 그거로 확정된 거 맞아?”
못 믿겠다며 되물었다.
“작가 선생님께 들었어요. 저도 처음에 엄청 오글거렸어요.”“오글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참, 뭐라 할 말이 없네, 아무리 3, 40대 주부 시청자를 염두에 뒀다고 해도 너무 심하다.”
김명석은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사랑은 익스트림.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
눈 덮인 산악에서 스노보드를 타며 활강하는 남자 주인공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다친다.
이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등장한 여자 주인공이 터프하게 남자 주인공을 썰매에 실어서 구조한다.
자신이 사는 산장으로 간다.
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한다.
산장에서 눈을 뜬 남자 주인공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앨범을 발견하고, 사진을 본다.
여주인공은 스키 활강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어릴 적 캐나다에 왔다. 그런데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던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다.
여주인공은 혼자 산장에서 개들과 살아가며, 구조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배운 스키 실력은 수준급.
거기에다 보드도 프로급이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을 구해 준 터프하고 시크한 여자 주인공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당연히 남자 주인공은 재벌 3세.
나중에 밝혀지지만 상속받을 엄청난 재산이 있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집안의 권력 싸움에 환멸을 느끼고 여자 주인공과 함께 설원에서 사람들을 구조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흔하디흔한 러브스토리.
하지만 배경이 일품이다.
여기까지가 수철이 알고 있는 이야기다.
익스트림 스포츠라는 것만 빼면 뻔한 스토리에 클리셰 범벅이다.
눈 덮인 산에서 활강하며 스키와 보드를 타는 장면이 많아서 캐나다와 스위스를 오가며 촬영을 하고 있다.
* * *
“가사 나왔어요.”
가사가 정해졌다.
그런데 수철은 가사를 보는 순간 놀라서 경직됐다.
제목에 운명이 들어가 있었다.
지난 음악 감독이 말한 그 가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 아니었다.
“지난번 음악 감독 사건 때문에 이번엔 따로 심사를 하지 않았어요. 대신 드라마 쓰신 작가님이 작사가님을 선택하고 작업을 의뢰해서 받은 가사예요.”
“아, 그렇군요.”
“작사가분은 예전에 시를 쓰셨던 분이래요.”
가사는 시를 쓴 경력이 있는 작사가답게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드라마의 핵심은 다 담겨 있었다.
아름답고 선명한 표현들은 사랑에 대한 환상마저 불러일으켰다.
“하린이가 부를 건데 설마 트로트 가사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이런 김명석의 걱정은 기우였다.
“드라마보다 가사가 훨씬 낫네.”
가사를 본 김명석은 만족해했다.
수철도 가사가 맘에 들었다.
오글거리는 드라마 줄거리를 잘 미화시켰다.
제목은 For Destiny(운명을 위하여)였다.
난 운명을 믿지 않아.
내가 눈 속을 달리는 이유도 그것과 맞서기 위해서야.
중략.
For Destiny.
난 내게 던져진 운명과 마주 서기 위해 너에게로 달려가고 있어.
이 극한의 눈보라를 헤치며.
This is my destiny. For Destiny.
짝짝짝!
“가사가 이 정도는 돼야지. 그래야 준이랑 하린이가 노래를 하지.”
김명석은 박수까지 쳤다.
“이제 주제곡 완성만 남았네?”
이제 수철이 음악을 완성하면 된다.
가수도 정해졌고 가사까지 나왔으니까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 그날 밤 수철은 공원을 산책했다. 늘 그렇듯 작업실 근처 공원을 빙빙 돌며 주제곡을 완성했다.
‘이제 만들어 볼까?’
작업실로 돌아와서 드럼을 찍고 악기를 연주했다.
녹음한 트랙을 편집하고 믹싱을 했다.
사람들에게 들려줄 데모 버전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