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19화 (119/239)

#119화. Three Versions(1)

“가사와 악보예요.”

수철은 김명석에게 가사가 적힌 악보를 내밀었다.

“이건 준이 형 거고요, 이건 하린이 네 거야.”

하준과 하린이에게도 나눠 줬다.

다시 김명석을 봤다.

“음악은 우선 A 버전만 만들어 왔어요. 오보에가 남자 파트고, 플루트가 여자 파트예요.”“드디어 음악이 나왔군.”“네, 악보 보면서 한번 들어 보세요.”

수철이 음악을 틀려고 하자 김명석이 말을 붙였다.

“하린이가 수철이 네 곡을 부르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좋아서 침대 위에서 1시간이나 뛰었대.”

그 말에 수철이 하린이를 봤다.

“1시간씩이나?”

“네!”

하린이가 미소를 머금고 끄덕였다. 1시간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좋아했다는 얘기였다.

수철은 피식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틀게요.”

작업한 주제곡의 플레이 버튼을 클릭했다.

음악이 시작되자 모두 기대에 차서 귀를 기울였다.

휘잉―!

음악은 눈 덮인 설원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바람 소리로 시작했다. 휘잉 세차게 한번 몰아친 바람 소리는 공명을 타고 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바람 소리가 사라지자 곧이어 까마득히 먼 곳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쒸이익.

산꼭대기에서 스노보드가 눈과 마찰하며 내려오고 있었다.

커브를 돌 때마다 나무에 쌓여 있던 눈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굉장한 스피드로 가파른 경사를 타고 내려오는 보드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부웅―

스노보드가 갑자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 모든 소리가 멈췄다.

똑딱. 똑딱.

잠시 적막이 흘렀다.

지이잉―!

그러다 잔뜩 텐션(Tension)된 화음의 신디사이저 소리가 긴장을 고조시키며 등장했다.

소리는 점점 커지며 다가오다가 갑자기 물 빠지듯 스르륵 빠져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따뜻한 메이저 성향의 밝은 멜로디 라인이 어쿠스틱 기타 리듬과 함께 등장했다.

하린이의 보컬 라인이었다.

[난 도망쳤어, 너의 손끝에 우리의 시간이 걸려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햐―

사람들은 감탄을 내뱉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혀를 내둘렀다.

하린이의 보컬 라인이 시작되자 설원에서 들리던 소리는 갑자기 무대 위의 밴드 소리로 옮겨졌다.

선을 그리며 내려오던 스노보드 소리는 전자 바이올린의 선율로 연결됐고, 나무에서 떨어지던 눈 소리는 경쾌한 스네어 드럼 소리로 바뀌었다.

모두 귀를 세우고 눈을 반짝였다.

[눈 덮인 설원에 Destiny의 외침이 울려 퍼졌을 때]

멜로디 라인은 4마디씩 주고받으며 화음을 만들다가 다시 서로 교차했다.

“마치 로키산맥의 눈 위에서 둘이 노래하는 것 같네.”

김명석이 중얼거렸다.

“눈은 덮였지만, 날씨가 화창해서 따스한 햇살도 보이고,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도 몇 개 떠 있고.”

김명석은 자신만의 느낌을 그렇게 표현했다.

음악에 집중하느라 대꾸가 없었지만, 하준과 하린이도 머릿속에 그런 이미지가 그려졌다.

쒸이익!

잠시 조용해진 음악 사이로 갑자기 보드가 강하게 멈춰 섰다.

그리고 그걸 기점으로 음악은 중반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하준과 하린이의 보컬 라인이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둘의 멜로디 라인은 탑을 쌓듯이 화성을 만들다가 절정을 향해 고조되기 시작했다.

[For Destiny.

(Destiny― Destiny― Destiny―)]

사람들은 모두 음악에 흠뻑 빠져 있었다.

김명석은 악보를 내려놓고 눈을 감은 채 심취해 있었고, 하준과 하린이는 악보를 보며 몇 번 멜로디를 따라 부르려다 실패했다.

음악이 주는 강렬함에 이끌려 고개를 숙인 채 음악만 듣고 있었다.

[지금 난 네가 내밀었던 그 손을 잡기 위해 눈 속을 헤치고 있어]

음악은 후반으로 향하면서 남녀 보컬이 주고받는 메이저의 따뜻한 멜로디 라인이 드라마의 주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한 후, 한창 열정을 쏟으며 움직이던 보컬 라인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운드는 다시 설원으로 돌아갔다.

쓰욱―

공중에 붕 떴던 스노보드가 다시 땅에 착지했다.

눈보라를 일으키며 엄청난 속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보드는 쏟아져 내리는 눈을 끌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콰광!

곧이어 눈사태가 난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스노보드의 뒤를 빠르게 따라왔다.

바짝 따라붙은 거대한 눈들은 금세 스노보드를 짚어 삼킬 듯이 큰 파도를 만들었다.

보드를 덮쳤다.

그 순간,

부웅―

스노보드는 눈을 뚫고 나와 절벽 위로 날아올랐다.

느려지던 악기 소리가 모두 멈췄다. 설원에서 들려오던 소리도 모두 멈췄다.

적막 속에서 두 명의 보컬이 다시 등장했다.

[This is my destiny.]

[For― Destiny―]

화음을 만들며 음악을 엔딩 했다.

“와― 미쳤다. 대박, 대박!”

하린이가 잔뜩 입을 벌린 채 제일 먼저 탄성을 내뱉었다.

곧이어 김명석도 고개를 돌렸다.

“수철아, 너 정말 엄청나다. 소름 돋는다, 소름 돋아. 이게 영화야? 음악이야?”

자신의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준은 할 말을 잃었다.

경이로운 얼굴로 수철을 바라봤다.

머리를 휘휘 젓더니 양손 엄지를 세워서 내밀었다.

드라마 1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눈사태를 피해 절벽에서 점프하다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구출하면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수철이 주제곡 엔딩 부분에 소리를 그렇게 넣은 이유다. 음악의 엔딩이 드라마의 시작으로 연결되게 만들었다.

* * *

“그러니까 이 음악들이 머릿속에 한 번에 다 떠오른 거야?”

김명석은 금별기획과 회의를 위해 이동하던 차 안에서 물었다.

“네, 뭐.”

수철은 멋쩍게 대답했다.

“나 참, 범접할 수가 없네.”

김명석은 수철을 보며 다시 한번 더 고개를 저었다.

수철이 화제를 돌렸다.

“이제 준이 형과 하린이의 연습을 시작할 생각이에요. 곡을 다 익히면 바로 녹음을 진행하면 될 거 같아요.”

“너무 빠른데?”

“늦게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 말에 김명석은 운전대를 잡은 채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회사에는 내가 그렇게 전달할게. 빨리 끝낸다고 하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지.”“네, 그리고 다른 버전은 내일 갖고 올게요.”

김명석이 고개를 돌려 수철을 봤다.

“하하, 천천히 해도 돼. 자꾸 그러니까 무슨 작곡 공장 같잖아.”

“네?”

“그렇잖아? 하루에 하나씩 뚝딱 만들어 오니까 말이야.”

* * *

“용수철이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군요?”

회의에 앞서 김명석이 보내 온 음악을 들은 홍 과장과 연출 감독, 작가의 반응은 이 한마디로 압축됐다.

음악이 주는 다이내믹에 모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음악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너무 좋아서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건 뭐, 바로 대박 보장이네요.”“그러게 말입니다. 홍보 전략 다시 짜야겠어요.”“입체감이 완전 사람 잡네요. 드라마보다 음악이 먼저 뜨겠어요.”“그것도 괜찮죠. 초반에 입소문 일으키면 시청률도 올라가는 거니까요.”

똑똑.

한참 음악을 듣고 들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김명석과 수철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 격하게 둘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음악 듣고 얘기 나누고 있었어요.”

김명석이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음악 어떠셨어요?”

“이건 뭐.”

홍 과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김명석은 그 의미를 알기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곧바로 사람들의 시선이 수철에게 쏠렸다.

시선이 강렬해서 수철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때 홍 과장이 의자를 빼서 내밀었다.

“용수철 선생님, 이쪽에 앉으세요.”

수철이 탁자에 앉자 사람들은 저마다 음악을 들은 소감을 한마디씩 털어놨다.

그리고 김명석과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작가가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한 모금 빨아 마신 연출 감독이 수철에게 말을 붙였다.

“데모 버전이 이 정도인데 악기가 다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안 되네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다.

수철은 다소 냉정하게 대꾸했다.

“악기는 더 들어가지 않아요. 최소한으로 간소화할 거예요.”

“아, 그런가요?”

연출 감독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네, 대신 효과음을 더 구체화해 볼 거예요.”

그 말에 모두 수철을 바라봤다.

연출 감독이 다시 물었다.

“효과음은 지금도 많지 않나요? 전 그렇게 들었는데요?”

말을 하며 주위 사람들을 봤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이 다시 입을 뗐다.

“효과음을 더 넣겠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의 소리를 더 구체화하겠다는 뜻이에요.”

“구체화라면?”

“지금 소리들은 예시로 기본만 잡은 거예요. 소리를 좀 더 꿈틀거리고 튀어나오게 해서 현장의 입체감을 더 살려 볼 생각이에요.”

“아하!”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작가가 히죽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작가에게로 향했다.

그런데도 작가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니, 좀 웃겨서요.”

“웃겨요?”

홍 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지금보다 현장의 입체감을 더 살린다고 하시니까요.”

“??”

“그렇잖아요? 저녁 먹는데 스노보드가 쌩쌩 달려와서 갑자기 TV에서 툭 튀어나오면 사람들 표정이 어떻겠어요?”

사람들은 그제야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

작가의 작가다운 상상에 모두 껄껄댔다.

“저녁을 먹다가 스노보드가 튀어나오면 놀라긴 하겠네요.”“그런 게 익스트림 아닌가요?”“그렇네요. 그런 게 익스트림이죠. 하하.”“놀라서 밥풀이 익스트림하게 튀어나오는.”“하하! 이제 그만하시죠.”

* * *

“그런데 수철이 너, 은근히 짓궂은 구석이 많은 거 같아”

김명석은 생각에 잠겨서 한참을 운전대만 잡고 가다가 입을 뗐다.

수철이 고개를 돌려 김명석을 봤다.

“왜요?”

“네가 만든 음악을 생각해 보면 소리로 사람들을 갖고 논다는 생각이 들어. 짓궂게 사람들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거 같고.”

“눈치채셨군요?”

“뭐? 진짜야?”

수철이 장난스레 대꾸했는데 김명석은 놀란 눈을 뜨고 되물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피식 웃고 넘어갈 얘긴데 수철에겐 그럴 수 없다.

수철은 그런 게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수철은 김명석의 표정을 재밌는 얼굴로 바라봤다.

“소리가 너무 한 방향으로만 흐르면 재미없잖아요? 쫄깃쫄깃해야 씹는 맛도 나죠. 헤헤.”

“허…….”

김명석은 처음 들어 보는 표현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수철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넌 음악을 떡 주무르듯이 하니까.”

김명석은 넘을 수 없는 벽에 혀를 찼다.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이었다.

“넌 성격도 은근히 장난기가 많은 거 같아.”“학교 다닐 때 그런 말 좀 듣긴 했어요.”“그때뿐만이 아닌 거 같은데?”

김명석이 게슴츠레하게 바라봤다.

수철도 같이 게슴츠레하게 봤다.

“하하, 녀석.”

김명석은 수철이 귀여운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들었다 멈췄다.

“아까 든 생각인데.”

“……?”

“오케스트라로 가면 엄청 대작이 될 거 같았어.”“오케스트라는 너무 식상하잖아요.”“그렇긴 하지. 그래도 사람들을 압도되게 만드니까 여전히 사랑받는 거지만.”

정면을 보며 끄덕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거보다 구성이 좀 단순해진 부분이 있던데?”“가사가 그래서 저도 거기에 맞췄어요. 장황한 거보단 간결한 게 좋잖아요.”“그렇지, 간결해야 더 임팩트가 살지.”

김명석은 수철의 말에 공감하며 어두운 밤길을 내달렸다.

* * *

“B 버전이라니, 이번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 군침이 도네요.”

오늘은 일찌감치 사람들이 몰려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 음악은 회사에서 다 같이 듣자고 홍 과장이 제안했기 때문이다.

작가와 촬영감독은 다른 사람도 이끌고 와서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눈엔 기대가 차 있었다. 어제 수철의 능력을 확인했으니 그럴 만했다.

회의실은 유명 가수의 신곡 발표회라도 구경 온 분위기였다.

하지만 김명석은 표정이 달랐다.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집에 밤늦게 도착했는데 그사이에 다 만들었을까?’

그동안 경험한 수철은 분명 B 버전을 만들어 올 게 뻔했다. 하지만 밤을 새웠을까 우려됐다.

‘밤을 새웠다고 해도 불과 몇 시간밖에 안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 계산이 맞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휘휘 저었다.

그때 수철이 나타났다.

“어,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아직 10분이나 남았는데요?”

수철도 10분 일찍 왔다는 소리다.

“응, 뭐, 특별한 일이 없어서 그냥 일찍 왔어. 커피도 한잔 마실 겸해서.”

김명석은 말을 하며 수철의 얼굴을 살폈다.

“잠은 충분히 잤어?”

“네.”

“작업은 몇 시간 정도 하고?”“세 시간 정도 한 거 같아요.”

“…….”

김명석은 빤히 바라볼 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오셨어요?”

수철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철도 같이 인사하고 만들어 온 음원을 김명석에게 내밀었다.

“B 버전이에요.”

김명석은 받자마자 컴퓨터로 다가가 바로 음악을 틀었다.

휘이잉―

쒸익. 쒸익.

로키산맥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스노보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꿀꺽 침을 삼키며 음악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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