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20화 (120/239)

#120화. 의도된 소감

B 버전은 A 버전보다 사운드가 강렬하고 거칠었다.

휙휙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더 스피디했고, 산을 타고 내려오는 보드의 마찰음은 더 생생했다.

거기에다 주인공이 내뿜는 호흡은 눈앞에서 하얀 입김이 보이는 듯했다.

“와우―!”

사람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음악은 초반을 벗어나자 느낌이 더 몸에 와닿았다. 거침없이 몰아치는 눈보라와 그 사이를 뚫고 쌩쌩 지나가는 보드 소리는 듣는 사람의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곧이어 이어진 밴드의 악기 소리는 설원의 소리와 뒤섞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미쳤다.”

사람들은 눈도 깜박이지 않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음악이 후반부에 들어서자 산꼭대기에서 출발한 두 명의 스노보드 소리가 페이드인(Fade In) 되면서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거칠게 눈보라를 일으키며 멀리서 시작된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듣는 사람의 눈앞을 휙 하고 지나갔다.

듣는 이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익스트림 스포츠.’

사람들은 모두 이 단어를 떠올렸다.

음악이 끝나고 나서도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박수를 쳐야 할지 환호성을 질러야 할지 헷갈렸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뭐라고? C 버전도 있다고?”

김명석은 눈을 크게 떴다.

“네.”

“아니, C 버전은 왜?”

두 개의 버전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왜 C 버전까지 만들어 왔느냐는 말이었다.

음악이 궁금하면서도 하나를 더 만들어 온 것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별기획에만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많으면 좋잖아요. 헤”

수철은 김명석의 기분과 상관없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그 말에 김명석은 좁혔던 미간을 폈다. 다시 미소를 지었다. 수철의 순수한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김명석은 주위를 돌아보며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사람들은 이미 감정의 에너지를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C 버전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미리 귀띔을 좀 해 주지. 놀랐잖아. 이건 또 언제 구상을 한 거야?”

김명석은 수철이 내민 음원을 틀려고 컴퓨터에 다가가며 물었다.

“갑자기 생각나서 급하게 만들어 봤어요.”

수철은 툭 내뱉듯이 대꾸했다.

그 말에 김명석이 황급히 등을 돌렸다. 눈을 크게 떴다.

“어젯밤에?”

“네, 헤헤.”

수철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김명석은 달랐다.

소름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룻밤 만에 두 개의 버전을 완성하다니!’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영역의 일이다.

‘악기 녹음에, 편집에, 믹싱까지. 만약 나였다면 얼마나…….’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삼 경이로운 감정이 다시 밀려왔다.

경이로움을 넘어서 신비로웠다.

수철은 그런 김명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준이 형이랑 하린이에게 템포가 빠른 리듬 음악도 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김명석은 음악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수철의 설명은 뒤로 미루고 바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딸깍.

음악이 시작되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오호.”

첫 반응부터 아까와는 달랐다. 눈을 반짝이던 사람들은 어느새 어깨를 움직이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수철이 만들어 온 C 버전은 A 버전의 멜로디 라인을 변주시키고, 그루브한 리듬을 섞어 가며 3단계로 변화시켰다.

그 리듬엔 스윙과 비밥 재즈, 라틴 리듬이 섞여 있었고, 중반에는 펑키한 힙합 리듬도 등장했다.

음악이 무슨 리듬의 향연 같았다.

후반으로 갈수록 리듬은 더 격렬해지며 서로 섞여서 돌아갔다.

새로운 리듬이 탄생하고 그 리듬은 다시 성장해서 격렬해졌다.

“햐―”

이런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그 변화무쌍한 리듬에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심장이 계속 빨라졌다.

“흠.”

김명석이 놀라운 건 엄청난 리듬의 향연이 아니었다.

그렇게 변화무쌍하면서도 보컬의 멜로디 라인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든든히 잘 받치고 있었다. 조금도 난잡하거나 혼잡하지 않았다.

김명석은 다른 사람들처럼 리듬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때 연출 감독이 툭 내뱉었다.

“버전 C는 익스트림 스포츠 끝나고 파티하는 분위기 같지 않아요?”

딱 그랬다.

극한의 공포를 즐기고 나서 잔뜩 아드레날린이 솟아올랐을 때 파티장에 모여 리듬을 즐기는 사람들.

익스트림 스포츠의 성과를 축하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은 봄이 온 건가요?”

음악은 눈이 녹아서 골짜기를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로 끝이 났다.

짝짝짝!

아까와 다르게 사람들은 거세게 손뼉을 부딪쳤다.

사람들이 좋아하자 수철은 기분이 좋았다.

김명석도 마찬가지였다.

“음악만 들었는데도 에너지가 많이 빠져나가네요. 우선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부터 한잔하시죠.”

홍 과장은 사람들을 야외 파라솔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오늘 들어 본 음악에 대한 소감을 나눴다.

홍 과장은 차가운 커피를 쭉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시원한 표정으로 수철을 봤다.

“C 버전은 다른 버전들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네, 그렇게 들리실 거예요. 그런데 분위기만 다르지, 듣다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아, 그렇군요.”

무슨 뜻인지 알 거 같다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말없이 끄덕였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버전을 갑자기 만든 이유가 있나요?”“두 남녀 가수의 목소리 조합이 그루브하고 펑키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어요.”

이때 연출 감독이 얼굴을 내밀었다.

“음악을 들어 보니까 마치 익스트림 스포츠 후에 파티를 여는 분위기를 연상케 하던데요?”“네, 맞아요. 제가 익스트림 스포츠를 잘 몰라서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어떤 영화를 보게 됐는데, 거기서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해서 성공하면 파티를 하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면서 익스트림 스포츠의 마지막은 파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역시.”

딱!

연출 감독은 자신이 수철의 의도를 맞췄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서 손가락을 튕겨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을 보면서 우쭐했다. 사람들은 자기들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김명석은 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수철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음악을 잘 표현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수철이 말을 덧붙였다.

“A, B 버전 외에 하나가 더 있어야 완벽한 마무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래서 버전 C가 탄생한 거군요.”

연출 감독이 수철의 말꼬리를 물었다.

“네, 맞아요.”

수철이 끄덕이자 이번엔 작가가 나섰다.

“제가 듣기에 그냥 작은 파티 같지가 않았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작가에게 몰렸다.

“큰 파티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열광적으로 춤추는 모습이 연상됐어요. 격렬한 리듬이 말이에요.”

작가는 말하며 수철의 반응을 살폈다. 수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는 수철이 자신의 표현에 공감한다고 생각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붙였다.

“사람들이 흥을 더해 가면서 계속 춤을 추죠. 마지막 한 명이 탈진해서 쓰러질 때까지 말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쓰러지면 사람들은 다시 일어나 새로운 춤을 시작하는 거예요. 어때요? 이런 게 바로 익스트림 아니에요?”

작가는 마친 파티를 경험해 보기라도 한 듯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를 내밀었다.

사람들은 작가다운 표현에 흥미로운 얼굴로 끄덕였다.

“쓰러질 때까지 계속 격하게 춤을 추는 익스트림 댄스. 익스트림 파티. 바로 우리 드라마가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결이 같고, 맥이 닿아 있죠.”

작가는 이야기를 끝내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제 표현이 어려운가요?”

사람들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제 표현이 좀 과했는지 모르겠지만, 음악에서 연상되는 파티의 모습이 익스트림의 스포츠에서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어요.”

작가는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와 자신의 느낌을 마무리 지었다.

“네, 맞아요.”

수철이 대꾸하자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수철은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서 계속 리듬을 바꾼 거예요. 사람들을 화려하고 격한 리듬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려고요. 그래서 아프리카의 토속 원주민들이 쓰는 리듬도 섞은 거예요.”

“아, 어쩐지.”

사람들은 그제야 생소하면서도 낯설지 않았던 리듬의 정체를 깨달았다.

“틀에 박힌 동작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나오는 몸짓을 상상했어요.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다 제각각의 춤을 추는 모습을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익스트림 파티였어요.”

그 말에 사람들은 눈을 반짝였다. 수철의 엄청난 디테일에 감탄했다.

작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수철과 소통했다는 생각에서다.

‘놀랍다고 해야 하나, 짓궂다고 해야 하나.’

김명석은 두 가지를 느꼈다. 음악의 놀라움과 그 안에 숨어있는 짓궂음.

‘음악을 잘 만들기만 하는 건 재미가 없는 건가? 그래서 슬쩍슬쩍 장난도 쳐야 작곡하는 재미가 있는 건가?’

김명석이 이런 생각을 할 때 연출 감독이 수철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리듬은 어떻게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비법 같은 게 없나요?”

“네.”

수철은 연출 감독의 뻔한 질문에 뻔하게 대답했다.

* * *

“어떠세요?”

홍 과장은 이 차장에게 음악을 들려주며 반응을 물었다.

좋아하는 건 당연하고, 자신이 진행을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기대했다.

“아주 좋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이 차장의 답변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홍 과장은 만족한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시청률을 보면서 드라마 중후반 하나씩 새로운 버전으로 바꿔 주면 좋을 거 같습니다.”“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식상해질 타임에 맞춰 바꿀 수 있는 주제곡이 두 개나 있으니 말이야.”

이 차장은 흡족한 표정을 보였다.

“네, 거기에다 하린이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줄 기회가 한 번 더 생겼습니다. 부가적으로 음원 수익과 컨텐츠 수익도 기대할 수 있고요.”“그래, 듣기 좋은 얘기야. 잘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홍 과장은 기대했던 칭찬을 끌어내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 차장은 흐뭇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 진행은 어떻게 되는 거지? 드라마에 비해 음악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네,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김명석 선생은 굳이 시간을 뒤로 미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그래도 나중에 어떤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너무 서두를 필요가 있겠어?”“그래서 가수들 연습이 끝나면 우선 A 버전만 먼저 녹음할 계획입니다. 나머지 두 버전은 드라마 분위기를 보면서 진행할 계획이고요. 차장님 말씀대로 수정 사항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이 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어쨌든 음악 파트는 걱정할 부분이 없겠어. 능력자들이 있으니까 말이야.”“네, 맞습니다. 용수철 선생은 정말 복덩이입니다.”

홍 과장이 흐뭇한 웃음을 보였다.

홍 과장은 수철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생긴 것부터 말투, 걸음걸이까지 마음에 들었다.

이 차장은 그런 홍 과장을 보며 시크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음악 감독 한번 잘못 뽑았다가 큰일 날 뻔했잖아? 용수철 선생이 안 한다고 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 말에 한껏 좋아서 들떠 있던 홍 과장은 금세 쪼그라들었다.

* * *

“박자, 음정,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느낌대로만 따라가 보세요.”

“그래, 알았어.”

“하린이 너도 준이 형 의식하지 말고, 네 느낌대로 불러 봐. 모니터링은 내가 할 테니까.”“네, 다시 해 볼게요.”

본격적으로 주제곡 연습이 시작됐다.

수철은 김명석의 작업실과 금별 기획에 마련된 연습 공간을 오가며 하준과 하린이의 연습을 지도했다.

수철은 둘 다 레슨을 해 봤기 때문에 둘의 장단점을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쓸데없는 것은 생략하고 오롯이 느낌을 잘 뽑아내는 데만 집중했다.

“하린이가 형의 성량을 따라갈 수 없으니까, 형이 하린이를 배려해 주세요.

“그래, 알았어.”

“하린이는 준이 형 의식해서 소리를 크게 내려고 하지 마. 준이 형이 너한테 맞출 거니까.”

“네.”

수철은 둘의 장점을 최대치를 끌어올리는 것에 집중했다.

하준과 하린이도 이를 악물며 수철의 스피드를 따라왔다.

열정을 불태웠다.

그 결과, 몇 주 만에 모두가 만족할 정도로 음악을 소화해 냈다.

“우후, 이제 노래에서 꿀이 떨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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