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ET 월드
김명석이 입을 잔뜩 벌린 채 다가왔다.
“호흡이 착착 맞는 게, 완전 몇십 년 같이 산 부부…….”
몇십 년 같이 산 부부처럼 호흡이 잘 맞는다는 얘기를 하려다 멈췄다.
하린이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말을 돌렸다.
“예전 연습곡을 한번 불러 볼까? 얼마나 바뀌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네.”
하준과 하린은 부스 안에 들어가 예전에 김명석이 추천했던 연습곡을 다시 한번 불렀다.
“Sorry I never told you All I wanted to say―”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보이즈 투 맨(Boyz II Men)이 함께 부른 One Sweet Day였다.
“You will always listen as I pray―”
노래를 들은 김명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부딪쳤다.
“이젠 너희가 그 사람들보다 훨 낫다.”
극찬을 했다.
“드라마 시작되면 반응이 얼마나 폭발적일지 정말 기대된다.”
주제곡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고, 반응이 얼마나 대단할지 궁금해했다.
수철은 이번 연습을 통해 새삼 느낀 게 있다.
하준에게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하린이도 그에 못지않았다. 아직 어린데도 불구하고 악바리 근성까지 있었다. 덕분에 연습에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왔고, 나중엔 듀엣을 앞서서 주도했다.
“금별기획 사람들 또 입이 벌어지겠군.”
김명석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린이의 또 한 번 성장에 금별기획 사람들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 *
“여기가 바로 ET 월드입니다.”
홍 과장이 자신 있게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우와―!”
모두가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와, 이게 현실이에요?”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입이 쩍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곳은 정글이었다.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갈라파고스 같았다.
금별기획의 꼭대기 층에 갈라파고스가 있었다.
모두가 넋을 잃고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봤다.
“이런 곳이 있었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김명석도 눈 앞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녹음을 위해 올라간 금별 기획의 꼭대기 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홍 과장은 사람들이 놀라는 느낌을 잘 알기에 빙그레 웃었다.
자신도 그랬기 때문이다.
다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실까요?”
정글은 가짜로 꾸며진 것이지만 현실감 있는 디테일 탓에 진짜처럼 느껴졌다.
정글 안은 컴컴했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마치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빛 같았다.
“대단하다, 대단해.”
금별기획의 대단함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한 달도 안 됐습니다.”
만들어진 지 한 달도 안 됐다는 말이었다.
엘진 그룹은 영상사업단을 출범하면서 금별기획의 탑 플루어(Top floor)에 브레인 집단의 창작 공간을 만들었다.
보안을 유지하며 비밀리에 만든 공간, 이곳이 바로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ET 월드다.
ET는 엘진 영상 사업단(ELJIN VIDEO PROJECT TEAM)의 준말.
금별기획의 꼭대기 층에 엘진 영상사업단의 실체가 있었다.
“상상도 못 했네요.”
김명석은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계속 감탄했다.
말은 들었었다.
탑 플루어에 녹음을 하고 휴식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길 거라는.
―환상의 층입니다. 아무나 올라갈 수 없는 공간이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6개월 걸렸습니다.”
작업 기간이 6개월 걸렸다는 말이었다. 영상사업단이 출범한 시간과 맞춰 보면 비슷했다.
“놀랍죠? 저도 오늘이 두 번째입니다. 프로젝트가 아니면 아무나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그렇군요.”
김명석은 시선은 다른 곳에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홍 과장이 슬쩍 어깨를 붙여 왔다.
“이곳이 영상사업단의 아이디어 뱅크이자 씽크탱크입니다. 모든 프로젝트가 여기서 탄생하죠.”
“아, 그렇군요.”
“녹음 스튜디오는 원래 계획에 없었는데, 얼마 전에 새로 만든 겁니다. 진행의 효율성을 위해서요.”
앞으로 계속될 영상사업단의 프로젝트를 위해 아예 녹음 스튜디오를 갖췄다는 말이었다.
“저기 보이는 곳이 녹음 스튜디오입니다.”
정글을 지나자 초원이 나타났다. 초원엔 듬성듬성 디딤돌이 놓여 있었다.
디딤돌은 두 개의 독특한 건물로 이어졌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녹음 스튜디오입니다. 오른쪽은 아까 말씀드린 씽크탱크고요.”
녹음실은 갈라파고스 안의 작은 섬 같았다.
녹음실 주위를 삥 둘러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홍 과장이 가리킨 싱크탱크라는 건물은 더 대단해 보였다.
건물 앞으로 작은 다리가 있고, 건너편엔 수영장이 있었다. 썬베드와 파라솔이 보였고, 나무 사이에 해먹도 매달려 있었다.
한쪽에는 농구 코트도 있었다.
작업 공간이 아니라 휴양지 같았다.
“쉬고, 움직이고, 생각하자. 그래서 이런 것들이 있어요.”
홍 과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오로지 아이디어 집단만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공간.
금별기획이 그동안 대단한 성과를 만들어 낸 이유가 여기 있었다.
마치 외국 기업 같은 분위기였다.
엄청난 투자였다.
“작업 공간이 아니라 휴양지 같네요.”
김명석이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하, 그렇죠? 휴양지 같은 편한 분위기에서 작업하라는 뜻이죠. 그러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홍 과장은 마치 잘 안다는 듯이 말했다.
김명석은 대꾸 없이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공간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활용했고, 모든 동선을 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희도 저기 사용할 수 있나요? 수영은 안 하더라도 녹음하다가 피곤하면 저기에 누워서 쉬고 싶네요.”“네, 그럼요. 편하게 사용하시면 돼요. 녹음하다가 머리 아프시면 저기서 산책도 하시고, 잠깐 잠도 주무시고 하면 되죠.”
김명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참 부럽네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작곡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본 공간이다.
“대단하지?”
김명석이 모두를 돌아봤다.
한참 눈을 반짝이며 구경하던 멤버들은 그제야 서로 눈을 맞췄다.
“이런 곳에서 작업하면 재밌겠어요.”
수철이 먼저 끄덕였다.
하준과 하린이는 아직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쁘게 시선이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김명석이 둘을 보며 말을 붙였다.
“외국의 유명 작곡가 중에는 작업실을 이런 분위기로 꾸며 놓고 쓰는 사람이 많아.”
“많아요?”
“그래, 섬을 사서 통째로 작업실로 쓰는 사람도 있고, 절벽에 유리로 지은 작업실을 가진 사람도 있어.”
“와…….”
“숲속과 해변에 작업실을 가진 사람은 정말 흔하고.”“와,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길래?”“외국이니까 가능하지. 한 곡만 히트 쳐도 평생을 부자로 먹고사니까. 그러니까 너희도 어서 스타가 돼서 외국으로 나가. 난 늦었지만, 너희는 가능하잖아.”
김명석은 하준과 하린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뭐, 수철은 어려울 거 없겠지만.”
김명석은 말을 덧붙이며 멀리 있는 수철을 봤다.
수철은 이미 녹음 스튜디오 앞에 가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제 스튜디오에 들어가 보실까요?”
홍 과장이 이끌자 김명석과 하준, 하린은 그 뒤를 따랐다.
“감독님이 먼저 들어가시죠.”
건물 앞에 다다르자 홍 과장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김명석은 아무 의심 없이 앞으로 나가 손잡이를 당겼다.
“헉! 이건 또 뭐야?”
녹음실 문을 열자 이번엔 느닷없이 깜깜한 동굴이 나타났다.
“하하!”
홍 과장은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자 재밌어했다.
김명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건 또 뭐예요? 정글을 지나 초원을 지나 이번엔 동굴이라니, 디즈니랜드도 아니고. 하하, 장난 아니네요.”
황당해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멤버들도 김명석을 보며 따라 웃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이제 더 놀랄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멤버들은 홍 과장을 따라 모두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을 통과하니 비로소 녹음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명석은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 녹음실은 누가 설계했나요? 한국 사람이 한 거 같지는 않은데요?”
김명석은 자신의 녹음실을 직접 설계해봤기에 눈썰미가 있다.
홍 과장은 빠르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독일의 유명 설계사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했습니다. 입구를 동굴로 만든 것도 그분이 제안한 것입니다. 외부와 다른 세계로 들어오는 느낌을 줘야 한다면서요.”“네, 그렇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김명석은 크게 동의했다. 녹음실은 바깥세상과 다른 공간이다. 녹음실에 들어올 때는 밖에서 묻은 온갖 소음을 털어 내고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오롯이 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독일 설계사는 그걸 알기에 입구를 동굴로 만든 것이다.
과학자들이 연구실에 들어갈 때 몸에 묻은 세균을 소독하듯이 동굴이 소음을 털어 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분인지 대단한 분이시네요. 창의적이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게 느껴집니다.”“네, 저희도 처음 그분을 컨택할 때 그런 평가를 많이 들었습니다. 독창적이면서도 과감하다고요.”“네, 백 퍼센트 공감합니다.”
김명석은 그의 작품에 푹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홍 과장은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분이랑 계약할 때 조건이 자신이 하는 일에 토를 달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는 돈만 내고 입을 다물라는 뜻이죠. 그 정도로 괴팍하신 분이에요. 하하.”
홍 과장은 괴팍하다며 웃지만 그건 괴팍한 게 아니다. 창작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김명석은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신념이 부러웠다.
“여기가 컨트롤 룸이에요. 저쪽이 부스고요.”
컨트롤 룸 내부는 심플했다.
조명은 최소한으로 써서 영화관처럼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졌고, 녹음 장비를 제외한 다른 인테리어는 전혀 없었다.
조그만 말소리도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사운드 체크를 위해 다른 가수의 녹음을 한번 진행했습니다. 연습용으로요.”
이번 녹음을 위해 미리 사운드 체크도 했다는 얘기였다.
“선생님, 우리나라에 이 정도의 녹음실이 또 있어요?”
수철은 부스와 녹음실 구석구석을 다 둘러보고 와서 물었다.
“아니, 없어.”
김명석이 고개를 저었다.
수철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이런 좋은 녹음실을 일반인들은 사용하지 못하고 금별기획의 프로젝트에만 사용된다는 게 그랬다.
* * *
녹음은 3일간 진행됐다.
첫날은 음악에 들어갈 악기를 먼저 쭉 녹음했다.
“A급 세션맨들 불러 줄까?”“아니에요, 제가 혼자 할 테니까 소리만 잘 받아 주세요.”
수철은 최고의 세션맨들을 데려오겠다는 말을 단박에 거절했다. 지난 리메이크 앨범 때 고생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 아픈 거보다 혼자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김명석은 수철의 악기를 다루는 능력을 잘 알기에 지켜보기만 했지만, 금별기획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침이 떨어질 정도였다.
“이거였어? 이래서 그렇게 눈독을 들인 거였어?”
수철의 능력을 제대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준은 박 대표와 다혜에게 얼핏 수철의 음악 재능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어.”
수철이 연주하는 내내 눈을 떼지 못했다. 앞으로 수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선생님, 멋있어요!”
하린이는 처음 보는 수철의 모습에, 졸졸 따라다니며 멋있다는 말을 연발했다.
“선생님, 천재 맞죠?”
수철에게 달라붙어서 천재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수철의 답변이 궁금해서 쫑긋하며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수철은 장난으로 받아넘겼다.
“천재는 너 아니었어?”“쉿! 비밀이에요, 헤헤.”
그 선생에 그 제자였다.
어찌 됐건 금별에서는 수철 덕분에 제작비를 확 줄였다. 시간도 단축했다. 이 또한 홍 과장이 칭찬받을 일이었다.
김명석도 수철이 다 알아서 하니까 편했다. 점심을 먹고 눈독 들이던 해먹에 누워 낮잠을 자는 여유도 부렸다.
수철은 악기 녹음을 마치고 준비해 온 효과음 트랙을 넣어서 전체 사운드의 밸런스를 맞췄다.
* * *
“일단 끝까지 쭉 한번 불러 보고 그다음부터 제대로 녹음을 받을게요.”
둘째 날은 본격적인 보컬 녹음이 시작됐다.
이날은 소문을 듣고 마케팅 이사까지 올라와 있었다.
하린이를 보러 온 것 같았다.
“준비됐으면 바로 들어갈게요.”
“네.”
반주가 시작되자 하준과 하린은 화음을 맞추며 그동안 연습한 실력을 드러냈다.
“난 도망쳤어. 너의 손끝에 우리의 시간이 걸려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노래가 시작되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이사의 입꼬리가 조금씩 씰룩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