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수철의 나침반
이사는 반짝이는 크리스털 안경을 매만지며 부스 안에서 노래하는 하린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실룩이던 입꼬리는 금세 잔뜩 미소를 머금었다.
옆에서 힐끗거리며 이사의 표정을 살피던 홍 과장도 덩달아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 덮인 설원에 Destiny의 외침이 울려 퍼졌을 때. 난 세상을 부정했어―(세상을 버리고 싶었어―)”
하준과 하린은 밖에서 벌어지는 모습과 상관없이 노래에 집중했다.
부스 유리창으로 보이는 둘의 모습은 마치 드라마 속의 남녀 주인공 같았다.
“For Destiny― 난 내게 던져진 운명과 마주 서기 위해 너에게로 달려가고 있어. 이 극한의 눈보라를 헤치며―(너에게로 가기 위해―) This is my destiny. For Destiny―(Destiny― Destiny―)”
녹음은 예상대로 잘 마무리됐다. 이사가 박수를 치자 금별 사람들은 모두 따라서 박수를 쳤다.
이사는 노래를 마치고 나온 하준과 하린을 격려하고, 수철과 김명석과 악수까지 하고서야 사라졌다.
이사가 나갈 때 따라 나갔던 홍 과장은 무슨 칭찬을 들었는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쏘겠습니다.”
손에 카드가 들려 있었다.
* * *
“내일 바로 믹싱을 한다고요?”“네, 전 그랬으면 좋겠어요.”
엔지니어는 할 말을 잃고 김명석을 쳐다봤다. 하지만 김명석은 수철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이미 몇 번 경험을 해 봐서 말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엔지니어는 어쩔 수 없이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수철은 다음 날 바로 믹싱까지 마무리 지었다.
“이렇게 믹스 다운(Mix down, 녹음에서 받은 여러 개의 트랙을 믹싱해서 단일 트랙으로 만듦)하면 되겠어요. 수고하셨습니다.”“네, 수고하셨습니다.”
수철은 곧바로 마스터링까지 끝낼 생각이었지만, 김명석이 말렸다. 혹시 모르니 천천히 하자고.
“수정 사항이나 변동 사항이 생길지 모르니까 말이야.”“어떤 변동 사항이요?”“드라마를 하다 보면 종종 그런 일이 생기거든. 스토리가 바뀌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배우가 바뀌거나 하는 일 말이야.”“아, 그런 일이 있군요.”“그래, 그렇게 되면 가사가 바뀔 수도 있고, 믹싱을 다시 해야 할 수도 있잖아. 물론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겠지만.”“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믹싱을 다시 할 수도 있으니까 마스터링을 미리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이제 수철의 역할은 끝이 났다. 마스터링은 때가 되면 하면 되고, 나머진 음악 감독인 김명석이 할 일이다. 성과는 드라마가 시작돼야 알 수 있다.
* * *
첫날 수철이 악기를 녹음할 때 이 차장도 그 자리에 방문했었다.
“어, 차장님.”
“쉿!”
컨트롤 룸 입구에서 홍 과장이 알아보자 이 차장은 급하게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조용히 보고 갈 생각에서였다.
홍 과장이 속삭이며 물었다.
“얘기도 없으시더니 갑자기 스튜디오까지 어쩐 일이십니까?”“겸사겸사해서 들렸어.”
“겸사겸사요?”
“ET 월드 완성된 것도 보고 녹음실도 구경할 겸해서 말이야.”
사실 이 차장은 수철이 연주까지 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올라온 것이다.
박 대표가 상상 이상이라고 말한 수철의 재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수철이 연주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모습은 조용했지만, 그의 눈은 깜빡이지도 않은 채 수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주먹은 꽉 쥐고 있었고 마른침을 삼키느라 울대뼈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한 번씩 몸을 움찔하며 팔을 쓰다듬었다.
어두운 조명 사이로 그의 경직된 얼굴과 곤두선 머리털이 보였다.
‘이래서 그렇게 말한 거였어.’
이 차장은 이제야 박 대표의 말들이 이해가 됐다.
이 차장도 소싯적에 음악에 빠져 있었다. 박 대표와의 친분도 그때 생긴 거였다. 그래서 이 차장은 남들 못지않게 음악에 대한 귀를 갖고 있다고 자부했다. 연예부 기자를 할 때도 다른 기자들이 부러워한 부분이었었다.
그런 이 차장이 보기에도 수철은 차원이 달랐다. 누구와 비교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음.”
순간 어릴 적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외국 뮤지션들이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존경하던 뮤지션들이 허상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박 대표가 수철에 관해 표현했던 말들이 거짓이 아니란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박 대표가 수철을 애지중지하는 것이 이해가 됐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 차장은 전화를 들었다.
“형님, 오늘 바쁘세요?”
* * *
박 대표와 이 차장은 학창 시절 자주 가던 종로의 고등어구이집에 마주 앉았다.
“한 잔 받으세요.”
이 차장이 먼저 막걸리가 담긴 양은 주전자를 내밀었다. 박 대표는 대접에 하얀 막걸리를 받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도 참 많이 변했네.”
박 대표의 말에 이 차장도 막걸리를 따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변해 간다는 게 서글프네요. 청춘을 많이 보낸 곳인데 말이에요. 비틀스가 어떻고, 롤링 스톤스가 어떻고 여기서 설전도 많이 했었잖아요.”“하하, 그래. 기억난다. 진석이 네가 아마 롤링 스톤스 팬이었지?”
박 대표도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네, 그래서 형님과 막걸리 몇 통을 비우면서 누구의 얘기가 맞는지 내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하하.”
둘은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한동안 껄껄댔다. 그러다 막걸리 몇 잔에 다시 시무룩해졌다.
“이제 그런 시간이 다시 올 수 없다는 게 서글프네요.”“인생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버텨 줘서 참 고마운 곳이야.”
박 대표는 다시 애잔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이 차장에게 몸을 기울였다.
“너, 군대 가기 전에 그때 여친이랑 여기 어딘가에 서약을 적어 놓지 않았나?”
그 말에 이 차장이 막걸리 대접을 내려놓고 박 대표를 마주 봤다.
“형님은 별걸 다 기억하네요. 그게 언제 적 얘긴데요.”“찾아보면 여기 어디에 그때 그 낙서가 있을 거 같은데?”
박 대표가 일어나서 벽에 빼곡히 적어 놓은 낙서를 기웃거렸다.
그러자 이 차장이 웃으며 손짓을 했다.
“앉으세요, 형님. 없어요.”
“없어?”
박 대표가 자리에 앉으며 갸웃했다.
“아까 화장실 갔다 오다가 옛날 생각나서 한번 찾아봤어요.”
“하하, 그래?”
“네, 이미 다른 낙서로 덮여서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하하. 녀석, 벌써 확인했구나?”
“네, 하하.”
“그럼 그렇지, 첫사랑의 추억인데.”
둘은 한동안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옛날 추억을 공유했다.
이 차장은 박 대표의 빈 잔을 채우다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 수철과 관련한 일은 제가 직접 진행할 겁니다. 이제 회사에서도 형님과 저의 관계를 아니까요.”“잘됐군. 아직도 회사에서는 내가 수철을 이용해 먹는 나쁜 놈으로 알고 있어?”
박 대표가 시원하게 막걸리를 한잔 들이켜고, 손으로 입을 닦으면서 물었다.
“하하, 아니에요. 제가 잘 설명했으니까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차장은 손을 저으며 웃었다.
“수철이 녹음하는 건 봤어?”
“네.”
“직접 보니까 어때?”
박 대표의 물음에 이 차장은 머리부터 흔들었다.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아직도 머리가 쭈뼛 서는 거 같아요.”
이 차장은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박 대표는 대꾸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대단하다, 뛰어나다, 그런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더라고요.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어요.”
“그래, 그랬겠지.”
박 대표는 그 느낌 안다며 끄덕였다.
이 차장은 흥분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겉모습은 우리와 닮았는데 다른 세상에서 온 생명체를 보는 것 같았어요.”
“하하, 뭐?”
박 대표는 웃으며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제 느낌이 그랬어요.”
이 차장은 그때가 생각나는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다른 생명체라, 수철이 들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하하.”
박 대표는 이 차장의 표현이 재밌다며 껄껄 웃었다.
이 차장은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그런데 형님은 알고 계시죠?”
“뭘?”
“H 보험사 VVIP 파티 소식이요.”“그래, 듣긴 했어. 근데 갑자기 그건 왜?”“거기서 수철이 한 건 했나 보더라고요. 그 소문이 저희한테까지 들어옵니다.”“나도 들었어. 할아버지들이 그날 이후로 수철을 귀찮게 쫓아다닌다고.”“하하, 재밌네요. 그분들이 누굴 쫓아다니는 분들이 아닌데 말입니다. 오히려 쫓겨 다니는 분들이죠.”
그 말에 박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단 말이야?”
고추장에 고추를 푹 찍어서 한 입 베어 물고는 다시 이 차장을 봤다.
“그런데 그분들의 정체가 뭐야? 그분들이 문화계 큰손이라는 분들인가?”“네, 저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렇게 알고 있어요. 문화 재단을 운영하며 예술인들 장학금 사업에도 많은 돈을 내놓고 있다고 들었어요.”“귀찮은 할아버지들이 아니라 멋있는 어르신들이었네.”
박 대표는 수철에게 속았다는 투로 말을 했다.
“하하, 그렇죠. 수철은 그런 것을 잘 모르니까 그렇게 말한 거겠죠.”“그래, 그 녀석이 좀 그렇긴 하지.”
박 대표도 이 차장의 말에 동의했다.
“형님도 아시겠지만 H 보험사에 큰돈을 넣어 놓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납작 엎드려서 모시는 겁니다.”“그렇겠지. 거기는 돈의 논리가 작용하는 곳이니까.”
박 대표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슬쩍 물었다.
“그분들은 뭐 하시는 분들인데 그렇게 돈이 많아?”“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어떤 분은 젊었을 때 빌딩을 사고팔았고, 어떤 분은 회사를 사고팔았데요. 어떤 분은 대단한 은행가였다는 소문이 있고요.”
박 대표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결국, 장사꾼들이었다는 얘기네?”“하하! 형님 시각으로 보면 그렇죠. 어쨌든 엄청난 재력가인 건 분명해요.”“그래도 그렇게 돈을 벌어서 좋은 일에 쓰신다니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군.”“네, 그럴 만한 분들이죠.”
박 대표는 막걸리 잔을 들어 내밀었다. 이 차장도 같이 건배하고는 한잔을 쭉 들이켜고 내려놓았다.
“그런데 수철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뭐가?”
“가는 곳마다 화제를 몰고 다니잖아요. 그 어르신들도 수철에게 완전 빠졌다고 들었어요.”“그럴 만하지. 수철이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잖아. 게다가 수철이 할아버지들이랑 친해.”
박 대표는 이 차장의 빈 잔을 채웠다. 이 차장은 잔을 받으며 되물었다.
“아, 그래요?”
“응,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들이랑 잘 어울렸나 봐. 할아버지들을 친구처럼 대하더라고? 하하.”“하하, 재밌군요. 할아버지들이랑 친구라니.”
이 차장도 따라서 웃고는 막걸리 주전자를 들어 박 대표에게 내밀었다.
“그나저나 수철은 앞으로 좀 편해지겠어요.”“그게 무슨 말이야? 편해지다니?”“그렇잖아요? VVIP 어르신들이 이쪽 업계의 큰손들이신데 수철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어요? 당장 H 보험사만 해도 광고 음악을 계속 맡길 분위기던데요?”
그 말에 고등어 살을 발라 먹던 박 대표가 피식 웃었다.
“VVIP? 광고?”
비웃듯이 툭 내뱉었다.
이 차장은 박 대표의 표정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박 대표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보험사 광고나 기대하는 그 정도 상황이 아니야.”“……뭐가 또 있나요?”
이 차장은 박 대표의 단호한 말투에 멈칫하며 물었다. 박 대표는 이 차장과 눈을 맞췄다.
“작, 편곡 좀 해 달라고 줄을 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그중에는 잘나가는 가수들도 널렸어. 그리고 프로듀서나 음악 감독 요청은 피곤할 정도로 전화가 와. 게다가 외국에선 또 어떻고?”
“외국이요?”
“앨범에 참여한 내 후배가 그러는데 조만간 난리가 날 거라고 하더라고. 초반 반응이 예사롭지가 않대. 이건 내 후배 생각이 아니고, 영국 음반사의 말이야.”
박 대표는 한 잔 쭉 들이켜고는 입을 쓱 닦았다.
이 차장도 들은 게 있는지 눈을 반짝였다.
“아, 언뜻 소식은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상황이 벌어졌군요?”“그래, 폭발하기 직전이라고 하더라고.”
그 말에 이 차장은 수철과의 일을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박 대표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잘 봐 봐, 재밌지 않아?”
“뭐가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수철을 서포트 하겠다고 나서지만 결국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다 뚫고 나가잖아?”“듣고 보니 그렇네요?”
이 차장은 동의하며 끄덕였다.
“내가 말했잖아, 우린 도울 게 없다니까?”“그래도 형님은 도움을 주고 계시잖아요.”“나? 나도 알고 보면 그런 거 없어. 오히려 내가 배우는 게 더 많지. 이젠 가끔 구박도 받는다니까? 하하!”
박 대표가 껄껄 웃었다.
이 차장은 그런 박 대표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수철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으니까.
새삼 음악 하는 사람이 부럽게 느껴졌다.
“이번에 녹음하는 모습을 보며 느낀 건데요, 수철은 뭔가 사람을 끄는 힘이 있더라고요.”
“거짓이 없잖아.”
박 대표의 빠른 대꾸에 이 차장은 멈칫하다 되물었다.
“음악이요? 사람이요?”
“둘 다.”
이 차장은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수철을 돌이켜 보며 끄덕였다.
박 대표의 말대로 음악도 사람도 거짓이 없는 것 같았다.
“형님 말씀대로 수철은 그냥 알아서 크고, 알아서 뚫고 나갈 거 같아요. 저도 이쪽에 있다 보니까 감이 오는데, 수철이 세계로 나가는 건 시간문제 같아요.”“내 생각도 그래. 수철의 나침반이 그렇게 가리키고 있잖아.”
이 차장은 박 대표의 말을 곱씹었다.
“수철의 나침반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