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패밀리 네임 드래곤
“저의 전략은 이렇습니다.”
금별기획에서 드라마 주제곡을 하린이가 부르게 하고, 자연스레 분위기를 연결시켜 하린이의 1집을 발매하는 노련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더 놀라운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 실장이었다.
“일단 녹음은 다 해 놓고, 드라마가 분위기를 타고 주제곡이 인기를 끌기 시작할 때 앨범을 풀 생각입니다. 듣자 하니 같이 노래하는 하린이라는 가수도 1집 앨범을 낼 거라고 하는데 그 분위기에도 올라탈 생각입니다.”
이 실장은 드라마와 하린이의 앨범까지 편승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준과 듀엣을 하니까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박 대표는 이 실장의 영리함에 혀를 내둘렀다.
“날로 영리해지는군. 알았어, 그건 이 실장이 알아서 해. 난 앨범에만 신경 쓸 테니까.”
“네, 대표님.”
박 대표는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영 개운치는 않았다.
이 실장의 전략은 속이 빤히 보이는 전략이라서 금별기획에서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괜히 금별기획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까 우려됐다. 그래서 한마디 덧붙였다.
“대신 신중하게 생각해서 해. 자칫 껄끄러워지는 상황이 생기지 않게 말이야. 이 실장도 금별기획에 미운털 박혀서 좋을 거 없잖아? 너무 대놓고 그러지 말라는 뜻이야.”“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생각해서 하겠습니다.”
박 대표는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이 실장이 예전과 달라졌기 때문에 더는 말을 달지 않았다.
“어쨌든 제 전략은 하준 씨의 인기가 가장 물이 올랐을 때 앨범을 풀겠다는 게 핵심입니다.”“홍보가 타이밍이 중요하지. 그런데…….”
“?”
“우리 앨범의 장점을 알리는 데도 힘을 좀 실어 봐. 각각 다른 3가지의 특색이 있어서 충분히 어필할 포인트가 있으니까 말이야.”“네, 물론입니다. 금별기획에만 업혀 가겠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 앨범의 장점을 홍보하는 게 당연히 주력입니다.”
“확실해?”
박 대표가 의심의 눈초리를 날렸다.
“그럼요! 당연하죠. 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앨범은 주체성이 중요하다고요.”
“…….”
박 대표는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이 실장을 바라봤다.
이 실장은 말해 놓고도 머쓱했는지 뒤통수를 문질렀다. 온종일 금별기획에 편승할 생각만 했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다시 입을 뗐다.
“어쨌든 넓게 보고 접근하는 게 좋아. 너무 욕심내다 보면 무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충돌하고 갈등하게 되니까.”“네, 그 부분은 제가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박 대표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노파심에서 몇 마디 하긴 했지만, 홍보와 마케팅은 이제 이 실장의 몫이다. 이 실장이 제작을 하기로 한 이상 그렇다. 지나친 간섭은 갈등만 만들 뿐이다.
“그런데 대표님.”
“왜?”
“하준 씨가 나중에 지우 공연에 깜짝 출연하고 그런 건 문제가 될까요?”“그거야 이 실장이 알아서 하면 되지. 준이랑 상의해서 말이야.”“그건 아는데, 금별기획과 계약이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해서요.”
“계약?”
“네, 분명 OST 앨범을 내고 활동에 관한 규정을 뒀을 테니까 말이에요. 앨범이야 상관없지만 행사는 다르잖아요?”“그래, 그럴 수 있겠네.”
박 대표가 턱을 매만지며 끄덕였다.
금별기획에서 계약서에 그런 조건을 붙였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대표님이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내가?”
“네, 제가 직접 물어보기엔 껄끄러워서요.”“그래, 알았어. 내가 한번 물어보고 알려 줄게.”“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녹음할 때 기자랑 카메라를 붙여서 홍보 영상과 기사를 좀 만들어 볼까 해요.”“홍보 영상과 기사?”“네, 발매 전에 밑 작업을 좀 해 놓으려고요.”
이 실장은 이미 홍보에 대해서 많은 아이디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박 대표는 예전과 다르게 진지하게 디테일을 챙기는 이 실장의 모습이 흐뭇했다.
하지만 녹음실에서 영상을 만들겠다는 얘기엔 미간을 좁혔다.
수철이 그런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수철이 불편해할 텐데.”“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준 씨랑 다혜 씨 위주로 찍어 보려고요.”“음. 그렇다면 먼저 수철에게 알려 주고 진행해 봐. 이 실장이 한다는데 내가 말릴 일은 아니니까.”“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편집할 때 신경 쓰면 대표님이나 수철 씨가 우려할 일은 없을 거예요.”“그래, 그러면 되겠네.”
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 실장이 갑자기 해죽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
“요런 게 은근히 짭짤하더라고요.”“뭐가? 홍보 영상?”
“네, 미리 뿌려 놓으면 약발이 잘 먹힙니다.”
“허!”
이 실장의 약장수 같은 말투에 박 대표는 실소를 내뱉었다.
* * *
수철이 만든 음악이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을 때 영국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일주일 만에 상위권에 올라갔고, 둘째 주엔 탑 파이브에 올라갔대!
영준이 형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 왔다.
―내 말이 맞았지? 진짜 빠른 상승세야. 이 정도면 1등도 기대해 볼 수 있다고!
영준이 형은 자신의 예상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워낙 잘 만든 앨범이기도 하지만 ECM의 홍보 전략도 잘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해. 괜히 ECM이 아니지!
영국 음반사까지 치켜세웠다.
아직 샴페인을 터트리기는 이르지만, ECM은 수준 높은 음악과 수준 높은 마케팅 전략이 먹혔다는 분석을 하고 있었다.
―난 벌써 다음 주가 기대돼. 이러다 초대박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그렇게 되면 좋죠.”
흥분해서 들떠있는 영준이 형과 달리 수철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영준이 형은 잠시 멈췄다 말을 이었다.
―넌 순위 확인 같은 것도 안 하지?
“네, 제가 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요?”―햐, 무심한 녀석. 궁금하지도 않냐?
영준이 형은 수철이 남의 앨범 얘기하듯이 말하자 섭섭한 투로 물었다.
“브라이언 김 형님께 소식은 듣고 있어요. 그리고 형이 이렇게 알려 주시잖아요? 헤헤.”
수철이 해맑게 웃자 영준이 형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바뀌었다.
―넌 아마 모를 거야, 거기서 대박이 난다는 의미를.
“어떤 의민데요?”
―한국을 생각하면 안 돼, 여기가 파도라면 거기는 거대한 해일이야!
“해일이요?”
―그만큼 엄청나다는 뜻이야. 너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엄청난 변화가 생길 거라고. 어쩌면 나까지도 여기 생활 접고 외국에 나가서 ABYSS 앨범만 따라다닐 수도 있어.
“그 정도예요?”
수철이 놀랍다는 투로 되묻자 영준이 형은 껄껄 웃었다.
―하하, 천진난만하긴. 하기야 네가 그런 것까지 관심을 두면 용수철이 아니지.
“…….”
―암튼 기대해, 내가 계속 소식을 전해 줄 테니까.
“네, 감사해요.”
―그리고 수철아.
“네?”
―내가 신나서 소식을 전하면 호응을 좀 해. 맞장구도 좀 치고. 그래야 나도 소식을 전할 맛이 나지. 시큰둥하게 대꾸만 하면 김새잖아.
영준이 형은 수철에게 그런 부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평소답지 않게 툴툴댔다.
수철은 순간 미안해졌다.
“네, 형. 기억해 둘게요.”―하하, 녀석. 기억해 두긴. 나 참.
보이진 않지만, 영준이 형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 * *
“이번 주에도 ABYSS 앨범에 대한 평론가들의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수철의 앨범은 음악 차트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더 뜨거웠다.
팀장이 자랑스럽게 말을 꺼내자 해리가 눈을 맞췄다.
“어떤 내용이야?”
“앨범이 현대 재즈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내용도 있고, 정체된 음악계의 출구를 열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엄청난 굿 뉴스군. 까다로운 양반들이 웬일로 그런 말들을 했지? 더위라도 먹었나?”
기분 좋은 소식에 해리는 농담까지 던졌다. 그 말에 팀장도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 맞습니다. 저도 그런 호평은 정말 오랜만에 봤습니다.”“까고 싶어도 깔 게 없었나 보지.”
해리는 피식 웃고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봤다.
“오늘도 굿 뉴스가 많아. ABYSS가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되면 시장을 좀 더 확장해 볼 수도 있겠어. 미국 시장을 좀 더 공격적으로 공략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긍정적인 신호들이 많이 보이니까 시장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고.”
“네.”
“수고들 했어.”
해리는 날마다 들려오는 ABYSS에 대한 굿 뉴스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처음부터 예사롭지가 않았어.”
창가에 서서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작곡자가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한 건가? 그래서 제목을 ABYSS라고 붙인 건가? 에이, 설마. 하하.”
해리는 혼자 중얼거리다 머리를 저으며 웃었다.
해리가 이럴 정도로 앨범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발매되자마자 금주의 주목할 앨범으로 꼽히더니 곧이어 돌풍을 일으키는 뮤지션들이라는 문구가 따라붙었다. 여기저기에 앨범 자켓이 실리며 갖가지 호의적인 반응들이 쏟아졌다.
“용수철이라는 작곡가에 대한 정보를 모아 봐. 곡에 대한 에피소드도 모아 보고. 이건 먼저 터트리는 사람이 다 먹는 거야!”
발 빠른 음악 판의 언론들은 멤버들보다 수철에게 먼저 집중했다.
ECM에 문의하고 제시와 멤버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만족할 만큼 수철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는 없었다. 자잘한 에피소드는 있었지만, 독점 기사를 내보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한국의 언론사에까지 부탁했다. 하지만 자신들도 못 하고 있다는 답변만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타이틀을 썼다.
[베일에 가려진 한국 작곡가, 유럽에 상륙하다!]
[신비로운 천재 작곡가, 영국에서 돌풍을 일으키다!]
심지어 이런 타이틀도 있었다.
[유럽을 점령하기 시작한 천재 작곡가, 그의 패밀리 네임은 드래곤이다.]
곡들의 특성에 따라 반응이 조금씩 달랐지만,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에서도 수철의 모든 곡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재밌는 건, 좀 더 거칠고 도전적인 음악을 선호하는 독일에선 다른 나라와 달리 ‘Sleepless In Island’가 압도적인 우위를 달리고 있었다. ECM에선 곡의 독특함과 그들의 감성이 잘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을 내놨다.
수철의 음악은 이렇게 각 나라의 성향에 따라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어찌 됐건 유럽에선 수철의 곡들이 뜨겁게 떠오르고 있었다.
반면에 한국은 조용했다. 몇몇 음악 잡지에서 유럽의 이런 소식을 듣고 인터뷰 요청을 해 왔지만, 수철은 응하지 않았다.
* * *
―요즘 바빴다며?
“네, 좀.”
―녹음은 다 끝낸 거야?
“어떤 녹음이요?”
―그 드라마 주제곡 한 거.
할아버지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그간 수철의 작업과 녹음 소식을 알고 있었다.
“제가 주제곡 한 건 어떻게 아셨어요?”―어? 뭐, 그냥 여기저기서 좀 들었지.
정 선생 할아버지는 켕기는 게 있는지 말끝을 흐렸다. 수철은 계속 캐물었다.
“여기저기 어디요?”
―아니, 그 회사에 친구가 있거든……?
“친구요?”
―응.
“금별기획에 할아버지 친구가 있다고요?”
수철이 거세게 되묻자 할아버지는 우물쭈물했다.
―흠흠! 그 얘기는 그쯤하고, 이제 한가해졌으면 우리 소원 들어줘야지?
할아버지는 헛기침하며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시간이 생겼으면 약속한 연주를 해 달라는 말이었다.
“안 돼요. 아직 녹음이 남았어요.”―다 끝났다며?
“다른 앨범이요.”
―무슨 앨범을 그렇게 많이 해?
“네?”
―아니, 내 말은 쉬엄쉬엄하라고…….
“…….”
수철은 한가하게 할아버지랑 말장난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 프로젝트 앨범의 녹음이 끝나지 않았다. 보컬 녹음과 믹싱에 신경 써야 한다.
“그런데 왜 전화하신 거예요?”―뻔하잖아. 알면서 그래?
할아버지는 능청스럽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안 된다니까요. 진짜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그럼 언제 해 줄 건데?
“앨범 다 끝나고 한가해지면 해 드릴게요.”―그게 언젠데?
“할아버지가 전화 안 할 때요.”-…….
“하실 말씀 없으면 그만 끊을게요.”―야, 야, 잠깐만.
“……?”
―언제쯤 전화할까?
“제가 드릴게요.”
딸칵.
―이런, 끊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