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24화 (124/239)

#124화. 경로잔치(1)

똑딱. 똑딱.

메트로놈 소리와 함께 악기 녹음이 시작됐다. 수철은 일렉트로닉 음악이어서 악기 녹음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 디지털 음원을 사용했다. 하지만 박 대표의 곡과 다혜의 곡은 리얼 악기로 녹음을 해야 해서 서로 품앗이를 했다. 다혜는 학교 친구들이 세션을 해서 수철이 기타만 도와줬고, 박 대표는 후배들이 세션을 해 줘서 수철이 피아노만 도와줬다. 대신 수철은 모든 시간을 편하게 쓰고 녹음 스케줄도 수철의 일정에 맞췄다.

“준이 형, 제 곡은 크게 할 게 없으니까 다혜랑 쌤 곡에 집중하면 될 거 같아요. 저는 녹음도 제일 마지막에 할게요.”

수철은 녹음실에도 느지막하게 나타났다. 박 대표와 다혜의 보컬 녹음이 다 끝나고 나서야 도착했다. 그렇다고 불만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한 거였다. 각자의 곡은 각자 알아서 하기로. 그것이 이 프로젝트의 취지다.

하지만 다혜는 손이 좀 필요했다.

“수철아, 믹싱만 좀 도와주면 안 돼?”

처음 하는 믹싱이고, 녹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서 수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수철도 믹싱은 도와줄 생각을 하고 있어서 순순히 응했다.

“알았어, 네 곡 믹싱 할 때 시간 맞춰서 올게.”

박 대표가 끼어들었다.

“그래, 수철아. 네가 좀 도와줘. 친구끼리 돕고 살아야지.”

그 말에 다혜가 박 대표에게 시선을 돌렸다.

“쌤도 오셔야죠.”

“나도?”

“그럼 안 오시려고 그랬어요? 절 여기 끌어들인 건 쌤이잖아요.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죠.”“아니, 너는 맨날 불리할 때마다 그 소리를 꺼내?”“그래서 안 도와주시겠다는 거예요?”“알았어, 나도 시간 맞춰서 올게. 나 참, 더러워서.”

“네?”

“아니, 덥다고. 나 참 더워서.”

다혜는 녹음 내내 예민해 있었다. 악기 녹음도 여러 번 다시 했고, 보컬 녹음도 수십 번을 다시 했다. 하준이 다리가 비틀거린다고 할 정도였다. 프로듀싱을 처음 하기에 예민함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괜히 잘못 건드리면 뼈도 못 추릴 분위기였다. 그래서 수철은 도와달라는 말에 순순히 응했다.

덕분에 모든 곡의 믹싱이 순탄하게 마무리됐다.

“혼자 해도 될 뻔했네. 호호.”

다혜는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모두의 의도대로 녹음은 무사히 끝났다.

“마스터링이 깔끔하게 나왔네?”“쌤이 신경 써 주신 덕분이죠.”

박 대표와 다혜의 관계도 다시 호전됐다.

* * *

수철은 프로젝트 앨범을 모두 마무리하고서야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할아버지 3인방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오호, 이게 무슨 일이야? 바쁘신 용수철 피아니스트께서 먼저 전화를 다 주시고?

정 선생 할아버지는 반가움에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전화드린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저 피아니스트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러세요?”―아, 미안. 용수철 예술가님.

“…….”

―그럼 이번엔 연주를 들려주는 거야?

“네, 그럴게요.”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옆에서 할아버지들이 좋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음 콘서트홀에서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봐!

옆에서 고 선생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 선생 할아버지가 다시 수철에게 물었다.

―우리가 아는 콘서트홀이 있는데, 이번엔 거기서 하면 어떨까? 객석도 좋고, 소리도 아주 잘 빠지거든.

“콘서트홀이요?”

―그래, 제대로 된 공연장에서 듣고 싶어서 말이야. 지난번은 소리가 좀 튀더라고.

노인 공경 차원에서 연주 한번 들려드리려고 했는데 콘서트홀이라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부담돼요.”―아니야,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오전에 거기서 다른 공연이 있어서 우리가 거기 있을 거거든. 그러니까 그거 끝나고 오후에 잠시 연주 들려주면 되지. 그냥 자그마한 공연장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럼 다른 사람들은 없는 거예요?”―거의 없다고 봐야지.

“거의요?”

―아마 없을 거야. 학생들이 몇 명 있을 수는 있고.

“학생들은 또 누구예요?”―그날 오전 공연이 학생들 공연이거든. 우리가 좀 돌봐 주는 학생들이라서. 어쩌면 같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수철은 좀 부담이 됐지만, 기왕 마음먹은 거 더 미루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요, 대신 사람들 모으고 하시면 안 돼요.”―알았어. 금방 콘서트홀에 확인을 해 보고 다시 전화 줄게.

수철은 전화를 끊고 다이어리를 보며 스케줄을 확인했다.

금방 전화가 오지 않아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사용 가능하대. 오후 3시부터 시작하면 돼.

“네, 알았어요. 그럼 3시까지 갈게요.”―좀 일찍 오는 게 좋지 않겠어? 우리랑 대화도 하고, 차도 한잔 마시려면 말이야.

“차는 끝나고 마시면 되죠.”―아니, 그래도…….

“잠시만요. 할아버지, 금방 다시 전화드릴게요.”―아니, 왜?

딸칵.

라면을 먹으려고 올린 냄비의 물이 넘치고 있었다.

수철은 얼른 라면을 집어넣고 다시 전화를 들었다.

“죄송해요, 물이 끓어서요.”―점심 먹는 거야?

“네.”

―라면?

“네.”

―계란은 넣었고?

“……더 할 말 없으면 끊을게요. 저 이제 먹어야 해요.”―그래. 맛있게 먹고, 그날 좀 일찍 오면 좋겠어. 반갑게 얘기도 나누고.

“시간에 맞춰서 갈게요.”―아니, 그래도…….

“그날 뵐게요.”

딸칵.

“이런 버르장머리!”

정 선생 할아버지가 욱하며 핸드폰을 노려봤다.

“참아, 우리가 을이잖아.”“그래. 와 준다고 한 거만 해도 어디야?”

“그렇지?”

“그럼!”

할아버지들은 금세 표정을 바꾸고 손을 부딪쳤다.

* * *

공연 장소는 한 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이었다.

할아버지들은 공연장을 마음대로 쓰고 있었다.

게다가 스탭들도 모두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수철의 연주 때문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들이 후원하는 학생들의 공연 때문이었다.

어찌 됐건 할아버지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오전엔 학생들의 공연이 있고, 수철은 오후로 잡혀 있었다.

“이제 시작한다.”

오전 공연이 시작됐을 때, 할아버지 3인방은 객석에 앉아서 흐뭇한 미소로 무대를 바라봤다.

고 선생 할아버지 옆에는 지난번 VVIP 파티에서 할아버지들을 케어했던 H 보험사의 문 이사도 앉아 있었다.

짝짝짝!

이날 공연은 유독 한 학생에게 박수갈채가 집중됐다.

문 이사도 이 학생을 아는 눈치였다.

“어떠세요? 별론가요?”

공연이 끝난 후 문 이사는 고 선생 할아버지에게 소감을 물었다.

모두의 박수가 쏟아졌음에도 고 선생 할아버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좋았어요. 또래들보다 소리에 대한 감각이 탁월하네요. 박수받을 만했어요.”

고 선생 할아버지가 예상과 다른 평을 내놓자 문 이사는 갸웃하며 되물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세요?”“그럼요. 잘만 성장하면 훌륭한 음악가가 되겠어요. 기본도 탄탄하고, 아마추어치고는 꽤 훌륭해요.”

음악 들을 때의 표정과 달리 좋은 평이었다.

문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구분을 하세요? 프로와 아마추어를요?”“하하, 무슨 그런 질문을…….”

고 선생 할아버지는 질문이 식상하다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선생님의 의견이 궁금해서 여쭤봅니다.”“음…… 가장 쉽게 얘기하면 자신의 연주로 돈을 버느냐 아니냐의 차이겠죠. 돈을 벌려면 그 정도의 실력이 받쳐 줘야 할 거고. 그게 바로 프로겠죠.”

“…….”

“그런데 이걸 물어본 건 아닐 테고.”

고 선생 할아버지는 문 이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말 들어 봤어요? 지식은 나열된 정보고, 상식은 정리된 정보라는 말?”“네, 들어 본 거 같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그거랑 비슷해요.”

“……?”

“음악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그 지식을 상식으로 만들어서 전달하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어요. 많은 훈련과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성찰이 필요하죠.”

“아!”

문 이사는 고 선생 할아버지의 표현이 와닿았다.

“역시 예술을 보는 눈이 다르시군요.”

감탄을 붙였다.

“다르긴요, 다 늙어서 침침한 눈인데.”“……하하, 재치도 넘치십니다.”

애써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음악은 성찰이에요. 마음에 담아서 숙성시키는 작업이죠.”

“그렇군요.”

문 이사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마디 붙였다.

“바꾸어 말하면, 연주가 장황하다는 것은 아는 건 많은데 정리가 안 됐다는 말이네요?”

자신이 눈여겨본 학생의 연주를 떠올렸다.

“그렇죠. 그게 아니면 남의 것을 따라 한 것이겠죠. 그러면 소리가 가벼워지거든요. 자기 것이 아니니까요.”

“아, 그렇군요.”

문 이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오늘도 한 수 배웁니다.”

“말로만요?”

고 선생 할아버지는 뭔가를 바라는지 씨익 웃었다.

“하하! 네, 막걸리 한 잔 받아 드리겠습니다.”“다음 주에 기대할게요.”“네, 모시러 가겠습니다.”

문 이사는 환한 웃음을 보이며 돌아서려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물었다.

“그럼 지난번 그 젊은 연주자도 잘 정리하고 숙성시켰나요?”“지난번 누구……?”

“파티 때 피아노 쳤던 젊은이 말입니다.”

“용수철이요?”

“아, 네. 맞아요.”

“하하, 그 친구는 달라요.”

고 선생 할아버지는 크게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르다니요?”

문 이사가 눈을 끔뻑였다.

“그 친구는 레벨이 달라요. 내가 평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냥 쉽게 말하면 천재예요.”

“천재요?”

“네.”

“아…….”

문 이사는 길게 탄성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축복받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군요?”“글쎄요, 축복이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왜요? 모두 부러워하는 재능이잖아요. 저기 어린 학생들조차도요.”

문 이사는 공연장 한쪽 편에 방금 연주를 끝낸 학생들을 가리켰다.

고 선생 할아버지는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부러운 재능이지만 천재의 삶이 그렇게 좋지가 않아요. 안타까운 삶이 너무 많아요.”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신이 어쩌다 실수로 몸 안에 음악 DNA를 몇 개 더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낸 거죠. 대신 몇 개는 빠트리고요. 그래서 비극적인 삶을 살고, 비련의 주인공이 되곤 해요.”

고 선생 할아버지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문 이사는 괜한 질문을 한 거 같았다.

“제가 질문을 잘못했나 봅니다. 저 때문에 불편해지셨네요.”“아니에요, 그냥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하지만 용수철은 좀 달라요. 그들과 같은 삶을 살 것 같지는 않아요.”“아, 어떤 부분에서요?”“에너지가 달라요. 뿜어내는 에너지가 다른 천재들과 다르게 경쾌해요.”

“아…….”

문 이사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고 선생 할아버지는 그걸 알기에 미소만 지었다.

“우리가 용수철을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궁금합니다. 어떤 이유가 있는지.”“용수철이 대단한 이유는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는 거예요.”

“……?”

갈수록 어려운 말에 문 이사는 눈만 끔뻑거렸다.

“사실 용수철에게 천재라는 단어는 맞지 않아요. 그건 너무 흔하고 광범위해요. 용수철은 그냥 자신의 소리를 내는 어떤 사람이에요. 규정지을 수 없는.”

“…….”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단한 비밀을 들은 듯한 기분이었다.

‘설명을 할 수 없어서 더 대단한.’

문 이사에겐 그런 말로 들렸다.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나?’

문 이사는 수철에 대한 놀라움보다 다음 광고도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고 선생 할아버지는 머리가 복잡해진 문 이사를 보며 빙긋 웃었다.

“문 이사는 아쉽겠네요.”

“네? 왜요?”

“용수철이 이따 오후에 여기서 연주를 할 거거든요.”

“아, 그래요?”

고 선생 할아버지는 대꾸 없이 미소로 끄덕였다.

“아, 진짜 아쉽네요. 제가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 좋은 기회를 놓치게 생겼네요.”“하하,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오늘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더 시간 뺏지 않을 테니까 어서 가 봐요.”“네, 그럼 전 이만.”

문 이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아쉬운 얼굴로 돌아섰다.

문 이사는 사실 음악에 큰 관심이 없다.

할아버지들이 대단한 고객이니까 적당한 선에서 분위기를 맞추는 것뿐이다.

오늘 자리도 회사를 대표해 후원금을 내려고 온 것이다.

그래도 수철이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머리가 좀 복잡해졌다.

‘광고 음악 말고 또 뭐 맡길 게 없나?’

생각하며 어두운 콘서트홀을 벗어났다.

* * *

수철은 시간에 맞춰서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이라기보다 할아버지들을 위한 경로잔치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리허설은 안중에도 없었다.

할아버지들이 알면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수철은 그랬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편한 평상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잠시 짬을 내서 할아버지들을 재밌게 해 주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어떤 레퍼토리도, 연습도 없이 분위기에 맞춰서 즉흥적으로 연주할 생각.

40분 정도만.

* * *

“광고 나가고 매출이 200%나 뛰었다던데?”

점심을 먹고 다시 콘서트홀로 돌아온 할아버지들이 로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신 선생 할아버지의 말에 녹차를 홀짝이던 정 선생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음악 때문이래?”

“그렇지는 않겠지. 배우의 이미지와 광고 기획력이 골고루 섞였겠지.”“그래도 음악이 크게 한몫한 건 사실이잖아?”“그렇지, 그건 부정할 수 없지.”

그때 고 선생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광고사 실장이 수철에게 연락해서 CF에 출연해 볼 생각 없냐고 물어본 모양이야. 하하.”

“그래?”

“응.”

“하하, 그래서?”

“예상대로지. 단칼에 거절하고 전화를 끊어 버리더래. 기분 나빠 하면서 말이야.”“하하! 녀석, 그럴 줄 알았어.”

“하하하!”

그때 수철이 회전문을 통해 로비에 나타났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고 선생 할아버지의 말에 다른 할아버지들도 고개를 돌렸다.

순간 할아버지들의 표정이 황당하게 바뀌었다.

“아니,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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