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경로잔치(2)
어이없는 얼굴로 수철을 바라봤다.
“복장이 저게 뭐야?”“어떻게 저런 복장으로 여기 올 생각을?”“진짜 자유로운 영혼이네.”
수철은 후드 티에 모자를 눌러쓰고 스니커즈 운동화를 신고 나타났다.
걸음걸이도 가볍게 산책을 나온 듯했다.
수철은 입을 벌리고 서 있는 할아버지들을 발견하고는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할아버지들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꾸벅 인사를 했다.
“잘 지내셨어요?”
할아버지들은 그제야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그래, 어서 와.”
“1분도 빨리 오지 않았네?”
신 선생 할아버지는 시간을 확인하고 신기해했다.
수철은 대꾸는 하지 않고 할아버지들을 번갈아 봤다.
“근데 할아버지들. 여기서 뭐 하세요?”“녀석이 또 할아버지래!”
정 선생 할아버지가 얼굴을 붉혔다.
“어디 결혼식 가세요? 모두 정장 차림이시네요?”
수철은 자신의 복장은 신경 쓰지 않고 할아버지들의 복장을 걸고넘어졌다.
그 말에 할아버지들은 벙쪘다.
“누가 누구보고 복장을 말하는 건지.”
“나, 참.”
모두 혀를 찼다.
수철은 굴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다.
짓궂게 할아버지들에게 계속 장난을 걸었다.
“아하!”
“??”
“할아버지들 중에 한 분이 오늘 결혼을 하시는구나?”
“뭐!”
세 할아버지는 놀라서 다시 입이 벌어졌다.
“아니면, 제가 피아노 치는 동안 프로포즈 하시려고 오늘 장소를 여기로 장소를 잡으셨나요? 어쩐지.”
“컥!”
할아버지들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근데 프로포즈 받으실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수철이 로비를 두리번거렸다.
수철의 계속되는 장난에 신 선생 할아버지가 뒷목을 잡았다.
“아니, 이 녀석이 또 어른을 갖고 계속 장난을!”“너 진짜 못 말리겠다. 재능이 음악에만 있는 게 아닌 거 같아.”
고 선생 할아버지까지 고개를 저었다.
“헤헤.”
수철은 그제야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모두 한마디씩 했다.
“짓궂은 녀석.”
“으이구, 못 말리겠다.”“우리 혈압 높단 말이야. 장난을 치더라도 살살해.”
“네.”
“아니면 예쁜 여자라도 소개해 주고 그런 말을 하든지!”
“…….”
“들어갈까?”
“……네.”
* * *
“우와!”
공연장에 들어선 수철은 놀랐다.
밖에서 볼 때와는 또 달랐다.
단순한 콘서트홀이 아니었다.
공연장은 크지 않지만, 최고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조명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마음에 들어?”
“네, 이렇게 좋은 곳인지는 몰랐어요.”“유명 음악가들이 여기서 독주회를 많이 했어. 그 정도로 이름이 있는 곳이지.”“작은 공연장이라고 했잖아요?”“네가 안 올까 봐 살짝 낮춰서 얘기한 거지.”
공연장 내부는 소리의 충돌을 고려해 세심하게 나무의 조각 하나하나 각도를 맞춰서 설계되어 있었다.
짝!
수철은 크게 손뼉을 쳐 봤다. 예상대로 소리의 울림이 골고루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와, 이게 뭐예요?”
무대 위의 피아노를 보는 순간 놀라서 멈칫하며 한걸음 물러났다.
지난 VVIP 공연 때 썼던 바로 그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때는 몰랐었지만, 나중에 박 대표가 알려 줬다.
몇억이 넘는 피아노라고.
오전 공연을 위해 준비한 거겠지만 대충 연주하고 갈 생각으로 온 수철은 좀 민망해졌다.
“오전엔 학생들 공연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맞아.”
“그런데, 왜 저렇게 비싼 피아노를?”“학생들은 비싼 피아노 치면 안 돼?”“그런 뜻이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아서요.”“사실은 우리가 준비한 게 아니라 여기 콘서트홀에서 준비한 거야.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말이야. 하하!”
수철은 고 선생 할아버지가 왜 웃는지 몰랐다.
고 선생 할아버지의 말은 콘서트홀을 소유한 회사에서 오늘 행사를 위해 크게 배려를 했다는 뜻이었다. 자신들에게 잘 보이려고.
* * *
수철은 잠시 손가락을 푼 후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뜸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할아버지들은 모두 객석으로 돌아가 수철이 누르는 피아노 선율에 집중했다.
“지난번과 연주가 좀 다른 거 같지 않아?”
눈을 감고 소리를 음미하던 정 선생 할아버지가 눈을 떴다.
“장소가 달라져서 그런가?”
신 선생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 선생 할아버지도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한테 또 장난을 거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정 선생 할아버지가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바로 동의했다.
“그래, 맞아. 바로바로 음악을 해결 안 해 주고 긴장감만 주며 계속 끌잖아. 그러다 우리 표정이 좀 안 좋아지면 그제야 해소해 주고 그러네.”
정 선생 할아버지는 눈을 부릅뜨고 무대 위의 수철을 주시했다.
“저것 봐 봐, 한 번씩 우리를 힐끗 쳐다보잖아.”“오늘은 우릴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 같은데?”“왜지? 자꾸 전화해서 그런가?”“아니면 우리 혈압을 테스트하는 건가?”“아니면 심장 테스트?”“어쨌든 노인을 괴롭히는 건 확실하네.”
할아버지 3인방은 시선을 수철에게 둔 채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수철은 그걸 눈치챘는지 다시 연주를 정상으로 되돌리고 평화롭게 이어갔다.
할아버지들은 곧바로 잡담을 멈추고 다시 눈을 감았다.
탄성을 내뱉으며 수철의 피아노 선율에 빠져들었다.
할아버지들은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아기들 같았다.
수철의 선율에 복종하는 착한 아기들이었다.
“벌써 끝난 거야?”
40분가량 이어지던 연주가 끝이 났다.
도중에 잡담을 해서인지 오늘 연주는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할아버지들은 아쉬운 얼굴로 조용히 박수를 쳤다.
수철은 연주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으로 걸어왔다.
“잘 들었어.”
“역시 훌륭해.”
두 명의 할아버지는 수철의 연주를 칭찬했고 신 선생 할아버지는 손가락 하트를 내밀었다.
수철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좀 짧은 거 같지 않아?”
정 선생 할아버지가 아쉬움을 표했다.
수철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길이는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아요. 1시간보다는 40분이 아쉬움도 남고 좋잖아요.”“그 아쉬움은 또 언제 채워 주려고?”
정 선생 할아버지의 말에 수철 대신 고 선생 할아버지가 옆구리를 툭 쳤다.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어련히 알아서 해 주겠지!”
수철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런데 오늘은 지난번과 연주 스타일이 많이 다르던데?”“당연하죠. 장소도 다르고, 시간대도 다르잖아요?”
“시간대?”
“그런 게 있어요. 그건 제 비밀이니까 꼬치꼬치 캐물으시면 안 돼요.”“허, 녀석. 갈수록 터프해지네.”
당당하게 말하는 수철의 태도에 고 선생 할아버지가 헛웃음을 냈다.
수철이 시크하게 말을 이었다.
“전 똑같이 연주하는 거 싫어해요. 저한테 그걸 기대하시면 일찌감치 포기하시는 게 좋아요. 한번 한 연주를 또 하는 건 정말 재미없거든요.”
그 말에 할아버지 3인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오늘 연주는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져서 물어본 거였어.”“아, 그거요? 심심해서 장난 좀 친 거예요.”
“그치!”
수철의 말에 셋이 동시에 눈을 치켜떴다.
마치 사기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수철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할아버지들은 피아노 칠 줄 모르세요?”“모르는 건 아니지.”“그래, 우리도 좀 쳐.”“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할아버지들은 수철의 속뜻은 모른 채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수철이 씨익 웃었다.
“그럼 좀 쳐 보세요.”
“뭐?”
할아버지들은 놀라서 서로 쳐다봤다.
“왜 그래? 갑자기?”
얼굴이 빨개진 신 선생 할아버지가 볼을 문질렀다.
“오늘은 제가 할아버지들 피아노 실력 좀 구경해야겠어요.”“뭐? 오늘 우릴 쓰러트리려고 작정을 했구나!”“저도 피아노 들려드렸으니까 할아버지들도 들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공평하죠.”
“…….”
대답은 못 하고 서로 멀뚱히 쳐다봤다.
수철은 할아버지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나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봤다.
“꼭 들어야겠어?”
정 선생 할아버지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수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할아버지와 수철 사이에 잠시 냉기류가 흘렀다.
“만약에 거절하면?”
“앞으로 제 피아노는 못 들으시는 거죠.”
그 말에 할아버지들은 바쁘게 눈빛을 교환했다.
그건 안 된다는 거였다.
“우리 중에 대표로 한 명만 치면 되지? 너도 혼자서 쳤으니까.”
“네, 그러세요.”
수철은 시크하게 끄덕였다.
할아버지들은 서로를 보며 눈짓을 했다.
네가 대표로 나가라는 눈짓이었다.
잠시 치열한 눈짓 전쟁이 펼쳐졌다.
오랜 혈전 끝에 결국 둘의 시선이 한 명에게 꽂혔다.
고 선생 할아버지였다.
어쩔 수 없이 고 선생 할아버지가 낙담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다음에 하면 안 될까? 오늘은 영 컨디션이 안 좋아서…….”“비겁한 변명이십니다.”
수철은 차갑게 대꾸했다.
고 선생 할아버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장해 보였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세수하고 30분만 손가락 연습 좀 할게.”
“너무 긴데요?”
“그럼 어쩌라고?”
“알았어요, 다음에 들을게요.”
“진짜?”
비장함은 사라지고 할아버지의 얼굴이 아이처럼 환해졌다.
수철이 끄덕였다.
“어쩔 수 없잖아요? 시간도 없는데.”“그래! 좋은 판단을 했어. 역시 수철이 넌 긴장을 해소할 줄 알아.”
그 말에 수철이 피식 웃고는 몸을 틀었다.
“가시죠?”
“어딜?”
“저녁 사 주신다면서요?”“그래, 먹어야지. 어서 가자.”
수철이 할아버지들과 밖으로 나오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색 세단이 일렬로 쭉 늘어섰다. 운전사가 나와서 뒷문을 열고 허리를 굽혔다.
할아버지들은 수철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슬쩍 손을 흔들어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운전사들은 다시 차에 올라타서 지하 주차장으로 사라졌다.
“건너갈까?”
“네.”
수철은 할아버지들과 횡단보도를 건너서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 * *
“출연료 주면 받을 거야?”
수철이 할아버지들 앞에 수저와 젓가락을 세팅하는데, 물끄러미 보던 신 선생 할아버지가 물었다.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러자 정 선생 할아버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피아노 뭐 써?”
“피아노 없어요.”
물을 한 잔씩 따라 놓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가 없다고?”
그 말에 수철이 고개를 들었다.
“저 피아니스트 아니라니까요?”“어쨌든 음악가가 피아노가 없다는 게 말이 돼?”“조그마한 건반 하나 있어요. 음악 만드는 데는 충분해요.”“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피아노가 있어야지. 어때, 피아노 한 대 넣어 줄까?”
그 말에 수철은 대꾸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고 선생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 일렉트릭 건반은 현을 두드리는 느낌이 없잖아. 그러다 손가락 근육 다 죽어.”
수철이 피식 웃었다.
“할아버지 손가락 근육보단 나아요.”“녀석이 또? 어른이 말하시는데!”“어쨌든 전 됐어요. 피아노 넣을 공간도 없어요.”“그럼 공간도 하나 만들어 줄까?”
“……네?”
수철이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제 작업실을 아세요? 공간을 어떻게 만드신다는 말이에요?”
수철의 질문에 고 선생 할아버지는 멈칫했다.
“아니, 좀 더 넓은 데로 옮기면 되지. 피아노 넣을 공간은 있어야 하잖아?”“인제 그만하세요. 피아노 필요하면 제가 살게요.”
그 말에 모두 말을 멈추고 순대와 빈대떡에 집중했다.
수철이 따라 준 막걸리도 시원하게 한 잔씩 들이켰다.
“이거, 이러면 노동 착취한 게 되는데……. 이거 참 난감하네.”
정 선생 할아버지가 순대를 된장에 찍어 입에 집어넣으며 수철을 봤다.
“노동 착취요?”
“그렇잖아! 멀쩡한 청년 불러내서 우리 좋은 일만 시켰으니 말이야.”“전 괜찮아요. 할아버지들 즐거우셨으면 됐어요.”“오호, 말이 부드러워졌네?”
수철이 피식 웃었다.
“저도 돈 많으니까 제 걱정 마시고, 좋아하시는 막걸리 많이 사 드세요.”“어허! 그만큼 막걸리 마시면 우린 다 죽어.”
“하하!”
정 선생 할아버지의 농담에 모두 크게 웃었다.
“대신 제가 선물 하나 드릴게요.”
“선물?”
수철은 가방을 열어 앨범을 꺼냈다.
“이게 무슨 시디야?”“친한 사람들이랑 만든 프로젝트 앨범이에요. 아직 발매 전이라 따끈따끈해요.”
할아버지들은 신기한 얼굴로 시디를 돌려봤다.
“네 곡은 한 곡이네?”“네, 다른 사람들 곡도 좋으니까 한번 들어 보세요.”“고마워. 언제 나온다고?”“아직 방송 심의도 안 받아서 몇 주 걸린다고 들었어요.”
“그래, 그렇군. 기대가 되네.”
할아버지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시디를 돌려 보던 신 선생 할아버지가 슬쩍 어깨를 붙였다.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전혀요.”
“왜? 유명해지면 좋잖아. 소녀 팬도 생기고 말이야.”
“관심 없어요.”
“허 참. 별난 놈이네.”
“네?”
“아니, 여기 정 영감 말이야.”
그 말에 정 선생 할아버지가 얼굴을 붉혔다.
“뭐! 영감?”
“아니, 정 선생. 내가 오늘 왜 이렇게 말이 새나?”“틀니 바꿀 때가 됐나 보지.”
“아니, 이런!”
할아버지들이 아웅다웅 다투는 모습을 보다 수철이 끼어들었다.
“또 전화하실 거죠?”
“응.”
정 선생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수철은 잠시 머리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연주는 짬 날 때 한 번씩 해 드릴 수 있지만 앞으로 이런 장소는 안 돼요. 너무 부담돼요.”“이런 데 아니면 어디서 해?”“작은 공간에 피아노만 한 대 있으면 되잖아요?”“그러니까 피아노 한 대 넣어 준다니까? 괜한 고집을 피우고 그래?”“자꾸 그러시면 저 진짜 가요?”“아니, 무슨 말만 하면 간대? 초등학생이야? 우리 막내 손자도 안 그래.”
정 선생 할아버지가 발끈했다.
수철이 눈을 맞추며 물었다.
“막내 손자가 초등학생이에요?”
“응.”
“첫째 손자는요?”
“……어서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