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Time to Reward(4)
그날 이후 사람들은 더 바빠졌다.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준은 쏟아지는 행사를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혜는 하준을 따라다니며 반주를 했다. 이 실장은 하준과 지우의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매니저를 한 명 더 뽑을 정도였다. 박 대표는 곡이 좀 유명해진 탓인지 강의 요청이 많아졌고, 수철은 오랜만에 시간이 생겨서 미뤄 왔던 작업에 집중했다.
그중에서도 하준은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준 오빠! 사랑해요!”
가는 곳마다 팬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정말 잘하네. 신인답지가 않아.”
관계자들도 하준을 인정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연습벌레인 만큼 어디 하나 오점이 없을 정도로 무대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 결과 하준의 공연은 항상 팬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하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어. 저 정도 실력 있고 성실한 가수는 찾기 힘들어”
금별기획에서도 하준을 다시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김명석도 당연히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하준 파이팅! 다음 앨범은 나랑 꼭!
문자를 보낼 정도였다.
그런데 이 실장은 오히려 이런 상황을 우려했다.
“금별의 무게중심이 하린에게로 옮겨졌다고 해도 하준은 이미 스타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이 기사 한번 보세요.”
이 실장은 박 대표에게 음악 매거진에 실린 기사를 내밀었다.
“이건 제가 뿌린 보도 자료가 아닙니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평론가가 쓴 겁니다.”
[하준, 특유의 안정적인 흉성과 듬직한 목소리로 여심을 사로잡다. 혜성처럼 등장한 하준의 인기는 쇼케이스부터 달랐다. 엄청난 소녀 팬들이 몰리며…….]
기사 내용처럼 프로젝트 앨범의 쇼케이스에는 엄청난 팬들이 몰려들었다. 공연장 주위는 인산인해를 이뤘고, 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소녀들도 있었다. 하준은 말 그대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서며 연예 기사의 중심에 섰다. 그렇게 지난 시간을 보상받고 있었다.
“보기 좋네. 그런데 이게 왜?”
박 대표는 흐뭇한 얼굴로 매거진을 탁자 위에 툭 내려놓았다. 하지만 박 대표와 달리 이 실장은 불안한 모습이었다.
“분명 다른 회사에서 많이 달라붙을 텐데, 덜컥 다른 데랑 계약해 버리면 어떡하죠?”
이 실장은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알기 때문에 누가 채 가지 않을까 걱정부터 했다. 그 정도로 하준의 인기가 높다는 뜻이었다.
“무슨 그런 쓸데없는 말을…….”
박 대표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이 실장의 우려를 부정해 버렸다. 그래도 이 실장은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계약서도 한 장 없으니까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대표님도 잘 아시다시피 이 바닥에 의리 같은 거 없지 않습니까?”“준이가 그렇지 않다는 건 이 실장도 이제 알 때가 되지 않았어?”“인성이 좋다고 해도 누구나 더 올라가고 싶은 욕망은 있지 않습니까?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뭐?”
박 대표가 얼굴을 붉히자 이 실장은 잠시 멈췄다 말을 이었다.
“대표님도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지 않습니까?”“준이는 그렇지가 않아. 그리고.”
“……?”
“만약에 준이에게 더 좋은 기회가 있다면 그 길을 가게 해 줘야지. 꼭 우리가 계속 껴안고 있어야 해?”
그 말에 이번엔 이 실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우리가 다 키워 놨는데 엉뚱한 데서 단물 다 빨아먹을까 봐 그러죠. 대표님은 열받지 않습니까?”“어허, 무슨 그런 말을.”
박 대표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이 실장이 무슨 우려를 하는지는 잘 안다.
계약서 한 장 없기에, 한창 잘나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다른 곳이랑 덜컥 계약을 해 버리면, 프로젝트 앨범은 큰 타격을 입는다. 타격 정도가 아니라 치명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하준이 그렇게 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안다. 아무리 다른 곳에서 꼬신다고 해도 이 앨범은 수철과 박 대표, 다혜의 정성이 들어가 있다. 하준이 모두에게 등을 돌릴 수는 없다. 게다가 박 대표가 지금까지 겪어 본 하준은 신뢰를 중요시한다.
“잘 가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은 접어 두고 지금 상황에 집중하자고.”
“……네.”
이 실장은 힘없이 대답했다.
이 바닥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박 대표가 지금 상황에 집중하자고 하지만 그러기 힘들다. 맥이 빠진다.
박 대표는 그 마음을 알기에 시선을 맞추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라도 준이가 더 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보내 줘야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시작한 거잖아?”“……그렇긴 하지만.”
이 실장은 박 대표가 하준을 자신의 회사에 소속시키지 않을 거라면 다음 차례는 당연히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도 그렇다. 계약서만 없을 뿐이지, 소속 가수처럼 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곳이라니, 말이 안 된다. 게다가 한창 잘나가고 있는 지금 앨범에도 타격이 클 것이다.
“이번 앨범은 걱정하지 마. 내가 확실히 보장할 테니까. 날 믿어.”
박 대표는 이 실장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말을 했다.
“당연히 대표님이야 믿죠. 그런데 들리는 얘기가 있어서 그럽니다.”
“무슨 얘기?”
“하준 씨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얘기요.”
“눈독?”
박 대표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사실 놀랍지는 않다. 인기가 급상승하는 신인에게는 흔한 일이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마구 들이댄다. 그런데 이런 것은 거절하면 그만이다. 만약 의리를 저버리고 먹튀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가수의 생명은 그걸로 끝이 난다. 한번은 그럴 수 있지만, 그다음엔 기회가 없다. 더는 받아 줄 기획사가 없다.
“흔한 일이잖아? 신인한테는.”“계약서가 없어서 걱정하는 거죠.”
이 실장이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박 대표에겐 원망처럼 들렸다. 계약서 없다고 못 박은 건 박 대표기 때문이다.
“아무리 서로 믿더라도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계약서 쓰는 거잖습니까?”
“…….”
“지금 상황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린 괜찮아도 계약서가 없다는 걸 알면 저 사람들은 막 달려들 테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 대표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당연히 계약 기간이 얼마 남았는지 물었을 테고, 어쩌면 계약서가 없다는 걸 알게 됐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매니저들끼리 몰래 정보를 공유했을 수도 있다.
“음.”
그렇다면 당연히 먹음직스러운 파이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다. 비정하지만 쉽게 벌어지는 일이다. 이 실장도 박 대표가 믿는 하준을 믿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싶은 거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하준 씨를 교육하기도 그렇잖아요. 사람 맘이란 게 순식간에 획 넘어가기도 하는 거라서.”
박 대표는 이 실장의 말을 들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냐고 물어보기도 껄끄럽고, 그렇다고 인제 와서 그러면 안 된다고 교육시킬 수도 없고.’
이 실장이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박 대표는 머릿속으로 손익을 따져 봤다. 대충 계산해 봐도 이미 제작비의 몇 배는 넘어선 거 같았다.
“이 실장, 아무래도 이 부분은 내가 준이랑 먼저 얘기를 나눠 보는 게 좋겠어.”“네, 대표님. 잘 좀 얘기를 해 주십시오.”
이 실장은 사실 지금이라도 계약서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박 대표가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하준에게 확답만이라도 받길 바랐다.
* * *
―대표님, 좀 뵐 수 있을까요?
며칠 후, 지방공연을 갔던 하준이 늦은 밤 전화를 해 왔다. 박 대표도 하준이 돌아오면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근데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꽤 늦은 시간이다.
“지금 보자고?”
―네, 제가 작업실로 갈게요.
하준은 왠지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요.
“그래, 알았어. 기다릴게.”
전화를 끊은 박 대표는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하준의 목소리가 심각해서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저 왔어요.”
얼마 후에 하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아니야, 괜찮아. 어서 들어와.”
박 대표는 커피를 끓여 하준 앞에 내려놓고는 마주 앉았다.
“…….”
하준은 커피 잔만 매만지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을 들여?”
박 대표는 한동안 말이 없는 하준을 바라보다 물었다.
하준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속사 관련해서 대표님의 의견을 여쭙고 싶어서요.”
“……!”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실장이 우려한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박 대표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하준이 먼저 꺼냈다.
‘진짜 이 실장의 감이 맞는 건가?’
박 대표는 하준을 잘 알면서도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분위기와 긴장감이 싫었다.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두렵기도 했다.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준이 너, 아직 저녁 안 먹었지?”“……네, 대표님은요?”
느닷없이 저녁 먹었냐고 묻자 하준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난 너무 일찍 먹어서 그런지 갑자기 야식이 당기네. 나가자, 나가서 우선 맛있는 거부터 먹자.”
박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하준도 슬금슬금 따라서 일어났다.
“오늘 야식은 제가 살게요.”
“네가?”
“네, 제가 잘 아는 맛집으로 모실게요.”“그래? 그러면 난 땡큐지.”
박 대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무슨 폭탄선언을 하려고…….
* * *
“하하하! 뭐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박 대표의 큰 웃음소리가 매장 안을 울렸다.
“으하하하!”
하준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데 박 대표는 계속해서 통쾌하게 웃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소속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네.”
“계약도 하고 싶고?”
“네.”
여기까지는 이 실장의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나랑 하고 싶다고? 다른 기획사가 아니라?”“네? 다른 기획사라니요?”
하준은 박 대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박 대표가 크게 웃는 이유도.
다른 기획사라는 말도.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하하! 재밌다, 재밌어.”
박 대표는 불안이 해소되자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저, 대표님?”
박 대표도 예상치 못했지만, 하준도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단박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호탕하게 웃고 있다.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박 대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웃으니까 어처구니가 없지?”
“……네, 좀.”
하준은 당황해서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이건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얘기해 줄게.”
박 대표는 두리뭉실하게 마무리하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까 접근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네?”“네, 실장님과 매니저님이 없는 날엔 매번 그랬어요.”
“현장에서?”
“네, 현장에서도 그러고, 연락 와서 만나자고도 하고요. 제가 계약서가 없다는 것도 알더라고요.”
박 대표는 이 실장의 직원들이 떠올랐다. 씁쓸하지만 흔히 있는 일이다. 매니저들도 결국엔 독립해서 자기 회사를 차리는 게 최종 목적이기에 서로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만났어?”
“……두 번이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하준은 미안해하며 시선을 내렸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네 잘못이 아니니까. 점점 알게 되겠지만 이런 건 흔한 일이야.”“……사람들이 절 너무 괴롭힙니다. 자신들에게 오면 어떻게 해 주겠다느니, 뭘 해 주겠다느니 너무 피곤합니다. 대표님이 저 좀 보호해 주세요.”
하준이 보호를 요청하자 박 대표는 오히려 몸을 뒤로 뺐다.
“뭘 망설여? 가장 잘해 주겠다는 데를 골라서 가면 되지.”
박 대표가 표정을 바꾸고 장난스레 대꾸하자, 하준은 멍하니 바라봤다. 사실 하준이 처음 예상했던 박 대표의 반응은 이런 거였다. 시크하게 거절하는, 그래서 눈치 보며 조심스레 말한 거였는데 결국은 역시였다.
“대표님…….”
하준의 눈빛이 잠시 애절해졌다.
박 대표는 대꾸 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박 대표도 ‘그래, 나랑 계약하자!’ 소리치고 악수도 하고 하이파이브도 하고 싶다. 그런데 박 대표의 회사는 그런 곳이 아니다. 스타를 키우는 곳이 아니다. 게다가 스케줄을 따라다닐 매니저도 없다. 지금이야 이 실장이 해 준다고 하지만 다음 앨범까지 그럴 수는 없다. 박 대표의 회사에 어울리는 건 하준이 아니라 오히려 수철과 다혜다.
“저 정말 대표님 소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준은 입술에 힘까지 주며 비장한 모습을 보였다.
박 대표는 이 실장이 떠올랐다.
하준이 다른 기획사랑 계약해 버리면 어쩌나 하는 이 실장의 걱정은 역시 기우였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른 사람들이 자꾸 달라붙고 떼를 쓰니 지켜 달라는 거다. 의리를 버리는 게 아니라 의리를 지키고 싶어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우선 이 실장이랑 상의를 좀 해 봐야 할 거 같아. 너도 알다시피 내 회사는 스타를 키우는 회사가 아니잖아.”“……네. 실장님이랑 얘기가 잘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박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준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기특해서.”
“제가요?”
“응, 피곤할 텐데 늦은 시간에 달려와서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게. 의리를 지키겠다는 마음도 보기 좋고.”
박 대표가 훈훈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하준은 뭉그적거리며 입을 뗐다.
“……사실. 좀 망설이기도 했어요. 너무 파격적인 제안을 해서요.”“그래,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어쨌든 넌 우릴 선택했으니까.”“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죄송해지네요.”
“죄송하긴.”
“그래도 수철이 덕분에 확실하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어요.”
“수철?”
뜬금없이 등장한 수철의 이름에 박 대표의 시선이 하준에게 고정됐다.
“네.”
“수철이 뭐라고 했는데?”“자기 그만 보고 싶냐고요.”
“뭐? 진짜?”
“네.”
예상치 못한 반전에 박 대표의 입이 벌어졌다.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하준은 그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왠지 자기 곡도 못 부르게 할 거 같은 분위기였어요.”“하하, 녀석도 참.”
박 대표는 기분이 좋아서 연신 웃음소리를 냈다. 입꼬리는 잔뜩 올라갔다.
“그러면서 대표님 회사에 들어갈 거면 순서를 지키래요.”
“무슨 순서?”
“제가 3호래요.”
“3호?”
“자기가 1호고, 다혜가 2호고, 제가 3호래요. 그 순설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못 박더라고요. 무서운 선배처럼요.”“하하, 수철이 진짜 그랬단 말이야? 수철이? 으하하!”
박 대표는 입이 찢어질 듯 크게 웃었다. 껄껄 웃으며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