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Finally
“대표님의 예상이 맞았군요.”
박 대표의 이야기를 들은 이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괜한 오해를 해서 하준 씨에게 미안하네요.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데 좀 뻘쭘하게 됐어요.”“일반적인 상황도 아니었으니 한 번쯤 겪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박 대표는 이 실장의 민망함을 풀어 줬다.
“네,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하준 씨를 좀 더 챙길게요.”
이 실장은 입술에 힘을 주며 의지를 보였다.
“그건 그렇고, 준이 소속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얘기를 좀 해야겠어.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이 실장은 얼굴을 붙이며 물었다.
박 대표는 고개부터 저었다.
“솔직히 난 아직 판단이 안 서. 준이가 나랑 같이하겠다는 건 고마운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준이는 내가 음악 판에 오래 있었으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이 실장도 알다시피 그거랑 이거랑 다르잖아?”
박 대표의 말에 이 실장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회에 한번 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대표님은 마음만 먹으면 어려울 거 없잖습니까?”
그 말에 박 대표는 시선을 맞춘 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어.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난 누구한테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길로 가야 숨통이 트이는 사람이지. 내가 연예 기획사를 하려고 했으면 진즉에 했지. 안 그래?”“그렇죠, 대표님이야. 뭐.”
이 실장은 강하게 동의했다.
“수철과 다혜는 작곡하니까 내가 봐 줄 수 있지만 준이는 다르잖아? 이제 연예인 수준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능력 밖이야.”“그렇다고 대표님 말씀처럼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잖아요. 옆에서 계속 집적댈 텐데 서로 불안하지 않겠어요?”
같이 일을 하려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직원들 입.”
“……?”
박 대표는 직원들 입단속 잘 시키라는 말을 하려다 멈췄다. 다른 사람들이 집적대는 가장 큰 이유는 계약서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접근하는 것이다.
계약서가 없다는 말을 할 사람은 박 대표 자신과 이 실장, 하준을 제외하면 이 실장의 직원들밖에 없다. 하준이 그랬을 리는 없고, 하준의 로드매니저를 맡고 있는 직원이 가장 의심이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실장에게 덜컥 말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분란이 일어날 게 뻔하다.
일단은 그냥 덮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서가 없다는 말이 새어 나간 건, 이 실장이 모르는 채로.
“직원들 입이 뭐요?”
이 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이렇게 바빠지면 직원들이 더 필요할 거 같다고.”
박 대표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네, 그거야 뭐. 뽑으면 되죠. 어쨌든 대표님은 하준 씨를 소속으로 둘 생각이 없다는 얘기시네요?”“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다는 거야. 준이가 그런 결정을 내렸을 때는 기분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머리가 더 복잡해져 버렸어.”
“…….”
이 실장은 대꾸는 안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다른 데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보다 오히려 더 부담이 돼 버렸어.”
박 대표는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대표님 마음이 어떤지 알 거 같아요. 그런데 대표님.”
“응.”
“이번 일은 어떻게 보면 기회 아니에요? 이참에 실장급 매니저도 좀 영입해서 시스템 갖추고, 회사도 좀 키워 보시는 게 어떠세요? 대표님은 인맥도 넓으시겠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시잖아요?”“지금까지 무슨 얘기를 들은 거야?”
박 대표가 불쾌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아니, 제 말은 대표님이 좋은 기회를 자꾸 밀어내시는 거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물론 대표님의 뜻이 어떤지 알지만, 옆에서 보기가 좀 안타깝습니다.”
“…….”
“대표님 주위에 대표님을 그렇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번 신중하게 결단을 내려 보시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이 실장은 이번 일을 기회라고 말하며 박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괜히 또 버럭 할까 봐 우려했는데 박 대표는 오히려 힘이 빠져서 대꾸했다.
“말했다시피 그럴 생각이었으면 벌써 했지. 내가 그런 쪽이 아니란 건 이 실장도 잘 알잖아.”“알죠, 그래서 고생하시는 것도 알고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고생은, 자기 갈 길 가는 거지.”
그 말에 이 실장은 눈을 맞췄다.
“저도 압니다. 대표님을 오랫동안 겪어 봤으니까요.”
“…….”
“그래서 가끔 대표님이 이 바닥에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안타깝지만요.”
“허!”
박 대표는 실소를 내뱉었다. 이 실장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실장은 상관하지 않고 하려던 말을 다 했다.
“대표님은 너무 점잖아요. 이런 일보다 교수님 같은 일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 뭐.”
박 대표는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그러고는 되물었다.
“부정하지 않을게. 생긴 대로 사는 거니까. 어쨌든 이 실장이 보기에 내가 돈을 벌 스타일은 아니라는 말이지?”
“…….”
이 실장이 선뜻 대답을 못 하자, 박 대표는 잠시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스 커피?”
“네, 주세요.”
박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서 많은 것들이 교차했다.
“자.”
이 실장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자신의 자리에도 나머지 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를 당겨 와 마주 앉았다. 진지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박 대표는 그나마 최선이라 생각한 해법을 꺼내 놓았다. 며칠간 고민 끝에 유일하게 떠오른 방법이다.
이 실장은 눈을 똑바로 뜨고 박 대표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음.”
가능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방법밖에 없어.”
설명을 마친 박 대표가 이 실장의 얼굴을 살폈다. 한마디 덧붙였다.
“이 실장의 도움이 절실해.”
이 실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박 대표의 생각을 들은 이 실장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뗐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뜻이 그렇다면 신중하게 생각을 해 볼게요. 저도 딸린 식구들이 있으니까 판단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그래, 당연하지. 충분히 생각해 봐.”
“네.”
이 실장은 대답하고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메모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수철 씨랑 다혜 씨는 어떻게 하실 거에요?”“뭘 어떡해? 계약?”
“네.”
“게네들은 급할 게 없지. 준이처럼 활동할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사실 소속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즘은 작곡가들도 소속을 많이 두잖아요. 그래야 일하기 편하니까요.”“그런 추세긴 해. 회사에서 쓸데없는 데 신경 안 쓰고 작곡에만 집중할 수 있게 케어를 해 주니까. 그렇다고 해도 둘은 아직 급할 게 없어.”“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또, 또.”
박 대표가 미간을 구겼다.
“아,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입에 붙어 버렸네요. 헤헤.”
이 실장이 멋쩍게 웃자 박 대표는 잠시 찌푸렸던 인상을 다시 폈다.
“어쨌든 수철과 다혜도 내가 계속 신경을 쓰긴 해야 해.”“신경은 계속 쓰시잖아요.”“그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내가 필요한 역할을 좀 해야 해. 둘 다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 특히 수철은 돈에 대한 개념이 너무 없어. 세금계산서, 소득신고, 이런 말만 하면 소 쳐다보듯이 멀뚱멀뚱 쳐다봐. 묻지 말고 알아서 해 주면 안 되겠냐는 얼굴이지.”
“하하. 그렇군요.”
이 실장은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며 되물었다.
“세금 관련해서는 대표님이 계속 도와주시는 거 아니에요?”“지금은 그렇지만 앞으로 일이 커지면 나도 혼자서 할 수가 없어.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실장의 말대로 소속 계약을 하는 게 맞지. 법적인 문제가 걸리니까. 앞으로도 계속 세금 계산서를 발행하려면 말이야.”
그 말에 이 실장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철 씨는 회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음악 외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아니, 관심이 없으니까요.”
“맞는 말이야.”
박 대표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금별 기획과 확실한 관계가 돼서 쭉쭉 뻗어 나가길 기대했지만, 수철은 그런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제 어떤 형태로든 결정할 때가 왔다.
수철이 점점 더 많은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 더 커질 것이기에.
박 대표를 물끄러미 보던 이 실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수철 씨와 다혜 씨는 대표님께 가족
같은 사람들이잖아요.”
이 실장의 의도와 달리 박 대표에겐 결정을 다그치는 말로 들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길게 말꼬리를 끄는 박 대표의 눈빛이 흐려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암튼 수철과 다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실장은 준이만 신경 써 줘.”
“네, 알겠습니다.”
* * *
박 대표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좋아할 게 뻔하지만, 그래도 생각을 듣고 싶었다.
“빨리 오셨네요?”
박 대표는 심각한 얼굴로 들어섰는데, 수철은 하품하며 돌아봤다.
“어디 피곤해?”
“식곤증이요.”
“점심 늦게 먹었구나?”
“네.”
박 대표는 수철이 평소처럼 장난기를 보이면 장난스레 얘기하며 물어보려고 했는데, 수철이 그렇지 않아서 준비했던 서사에 차질이 생겼다. 그래도 중요한 얘기니까 어떻게 풀어 나갈까 생각하는데, 수철이 먼저 물었다.
“왜 그렇게 심각하세요?”
박 대표는 잠시 수철을 바라보다 물었다.
“지난번에 내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는 말, 진심이야?”
“네.”
수철은 짧게 대답하며 멀뚱히 쳐다봤다.
“넌 계약 관계나 퍼센테이지, 그런 거 모르잖아?”
“네.”
수철이 계속 짧게 대답하며 멀뚱히 쳐다보자, 박 대표는 잠시 멈칫하다 손을 내밀었다.
“일단 악수부터 하자.”
“……?”
수철은 영문도 모르고 박 대표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제 계약이 체결된 거야.”
“……?”
“넌 이제 ‘디데이 뮤직’의 소속 뮤지션이 된 거라고.”
“알겠어요.”
수철이 별 반응이 없자 박 대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내가 너의 소속사 대표가 된 거라고.”
“네.”
“다른 반응 없어?”
“네.”
자주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박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궁금한 거는?”
“뭐가 달라지는데요?”“……특별히 달라질 건 없지. 그래서 계약서 쓰고 싶어?”
“쌤은요?”
“난 별로.”
“저도 그래요.”
“……다른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통장 맡겨야 해요?”
“통장은 왜?”
“계약했으니까 회사에서 돈 관리해 주는 거 아니에요?”
“허. 허. 허.”
박 대표의 헛웃음이 3박자 왈츠로 튀어나왔다.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다 몸을 세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일단 의사 확인만 한 거고, 자세한 건 차차 알려 줄게.”
“네.”
계약이 어떻고, 조항이 어떻고, 갑은 뭘 해야 하고, 을은 어떻게 해야 하고.
수철이랑 그런 말까지 하는 건 어렵다. 해 봤자 반응은 뻔하다.
멀뚱멀뚱.
졸지 않으면 다행이다.
“너랑 나랑 이제 같이 일하기로 계약한 거야. 이걸 구두계약이라고 해.”
“구두계약이요?”
“신발 쳐다보지 말고. 그런 단어를 쓴다는 뜻이야. 말로 하는 계약.”
“아…….”
이로써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계약이 체결됐다.
같이할래?
응.
“피곤해 보이는데 한숨 자, 나 갈 테니까.”
박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생일대의 결정을 했는데, 뭔가 아무것도 안 한 기분이었다.
“쌤.”
그걸 아는지, 수철이 뒤늦게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박 대표는 피식 웃었다.
“하하. 녀석. 좋긴 좋은가 보지?”
손을 맞잡으려 했다.
“아니요.”
수철이 손을 뺐다.
“……?”
“계약하셨으면 계약금 주셔야죠.”“뭐? 무슨 계약금?”
“계약하면 계약금 준다고 하던데요?”
“누가?”
“저 찾아왔던 사람들이요.”
“…….”
박 대표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수철이 시큰둥한 얼굴로 툭 말했다.
“돈 없으면 피자라도 사 주세요.”
박 대표는 멍한 얼굴로 끄덕였다.
“알았어, 피자는 내가 사 줄게.”
“감사함다.”
“근데 너, 점심 늦게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
“먹어 볼게요.”
“먹어 볼게요?”
수철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자, 박 대표는 수철을 빤히 바라봤다.
등을 돌리려다 뭔가 아쉬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내 회사에 들어왔는데 좋다는 표현 한 번쯤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좋아요.”
“끝이야?”
“네.”
“…….”
“…….”
“알았어. 내일 봐. 피자는 이따가 보내 줄게”“네. 안녕히 가세요.”
수철은 꾸벅 인사를 했다.
박 대표는 김이 팍 새는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가 다시 뒤돌아 수철을 올려다봤다.
수철은 이전과 변함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허, 참.”
오랜 시간 심사숙고한 것에 비해 싱겁게 끝나 버렸다.
하지만 예상은 했었다. 계약을 맺었다 해도 관계엔 변함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