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34화 (134/239)

#134화. 때가 됐다(1)

“축하한다.”

박 대표가 손을 내밀었다.

“에이전트를 해주는 사람 이름이 브라이언 김이라고 했나?”

“네.”

브라이언 김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과 관련해 수철의 에이전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도 다 맡기고 있어. 재즈뿐만이 아니라 클래식 음악가들도.”

영준이 형이 믿고 맡길 만하다고 해서 수철도 그렇게 한 것이다.

“방송에 얼굴 내밀며 활동할 것도 아니고, 밴드로 돌아다니면서 공연할 것도 아니니까 문제 될 건 없을 거야. 작품 관리만 하면 되는 거잖아.”

박 대표도 영준이 형과 같은 얘기를 했다. 브라이언에게 맡겨도 될 거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했던 박 대표가 이제 수철의 소속사 대표가 됐다.

수철은 박 대표와 브라이언 김을 서로 연결해 줬다.

“안녕하세요, 디데이 뮤직의 박성준입니다.”―네, 안녕하세요. 브라이언 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 대표도 유학한 경험이 있어서 둘은 얘기가 잘 통했다. 수철은 이제 박 대표를 통해서 유럽의 상황을 듣게 됐다.

“어? 이거, 일이 생각보다 많은데? 아무래도 너한테 수수료를 좀 받아야겠어.”“네, 제발 좀 그렇게 하세요. 그래야 저도 마음이 편하죠.”

벌써부터 수철의 음악과 관련해서 문의가 빗발쳤다. 여기저기서 갖가지 이벤트성 방송 출연 제안과 프로그램 협업 요청이 쏟아졌고, 자신들의 영상에 음악을 붙이고 싶다는 의뢰가 쇄도했다. 수철의 음악에 관심을 보인 유럽의 영화사 사람들은 음반사로 문의했다가 브라이언을 통해서 박 대표에게까지 연락했다.

“쌤이 알아서 해 주세요.”

수철은 처음엔 박 대표와 상의하면서 결정했지만, 여러 번 불려 가자 박 대표에게 알아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쨌든 그런 일이 많아지다 보니 박 대표가 수수료를 받아야겠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이참에 사무실도 얻고 직원도 뽑아야겠어.”“전 완전 찬성이에요.”

박 대표는 새로 사무실을 얻고 직원을 뽑을 생각을 했다. 수철의 일이 많아진 탓도 있지만, 하준의 일이 컸다. 하준과 관련한 일로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지하 작업실에서 이야기하는 건 좀 아니었다. 하준의 인기에 비해 회사가 너무 초라해 보일 뿐만이 아니라, 하준의 인기에 먹칠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박 대표는 주로 근처 카페에서 사람을 만났었는데, 이제 수철과 관련한 일도 늘어났으니 이참에 미뤄 왔던 사무실도 얻고 직원도 뽑겠다는 얘기였다.

수철은 적극 찬성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음, 어떻게 할까.’

박 대표의 일이 많아질수록 수철의 근심이 깊어졌다.

통장을 내밀어도, 돈을 내밀어도 박 대표는 다 거절했다. 은혜를 갚기는커녕 계속해서 박 대표에게 짐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박 대표는 계속해서 수철을 무료로 서포트하고 있었다. 수철에겐 이것이 딜레마였다. 잘되면 갚을 생각으로 뻔뻔할 정도로 박 대표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막상 잘되고 나니 보상을 할 방법이 없었다.

박 대표의 작업실도 수철은 자기 작업실처럼 드나들었고, 인지도가 없을 때 오퍼를 구하는 것도 박 대표가 연결해 줬다.

‘나중에 다 갚을 거니까 뭐.’

이렇게 편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갚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박 대표를 위해서 CF를 찍을 수도, 행사를 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음…….’

수철은 오랜 고민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곡이었다. 박 대표에게 곡을 선물할 생각을 했다.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었다. 박 대표가 저작권료를 챙길 수 있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날 밤 수철은 박 대표에게 어울릴 만한 재즈곡을 한 곡 만들었다. 저작권료를 기대해야 하기에 대중적인 코드를 듬뿍 담았다. 사람들이 편하게 따라 부를 수 있게 발랄한 멜로디에 스윙재즈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제 선물할 적당한 시기만 맞추면 된다.

* * *

수철은 얼마 후 한 번 더 놀랐다.

“사람들이 믿지 않을 거 같아요.”

앨범 판매와 음원 수익 중 받기로 한 퍼센티지만큼의 돈이 입금됐다.

어지간해선 돈에 반응하지 않는 수철도 눈이 동그래졌다. 박 대표도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엄청나네. 여기랑 비교 불가네.”“브라이언 형은 이제 시작이라고 하더라고요.”“하하, 그럴 거야.”

박 대표는 껄껄 웃더니 이마를 문질렀다.

“이 정도가 시작이면 앞으로는 얼마나 더 될지……. 휴, 나도 상상이 안 된다.”

쉽사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장이 큰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었다.

“역시 시장은 크고 봐야 해. 이러니까 너도 나도 외국으로 나가려고 하는 거지.”

박 대표는 수철이 받은 돈에 놀라면서도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했다. 기왕이면 큰 시장에서 활동하는 게 좋다고 했다.

그건 영준이 형도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우리나라 음악가들이 세계로 많이 나가야 하는 거야. 전 세계를 상대해야 한다고. 돈도 돈이지만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줄 수 있잖아.”

영준이 형은 강하게 주장했다. 수철도 동의했다.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번에 알겠더라고요.”“사실 외국에서 활동하다 보면 한국 사람에겐 특별한 음악 유전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음악 유전자요?”

수철은 처음 듣는 말에 갸웃했다.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게 좀 웃기지만, 공연하다 보면 두드러지게 재능을 보이는 한국 사람들이 많거든.”

“아…….”

“내가 학부 때 교수님도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 가르쳐 보면 한국 사람들이 음악을 참 잘한대. 재능이 있다는 거지. 그러면서 한국 사람은 저평가되어 있다는 말씀도 하셨어. 언젠가 한국 사람들이 미국과 유럽을 휩쓸 날이 올 거래, 음악으로 말이야.”

그 말에 수철은 빙그레 웃었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이미 클래식은 그렇게 휩쓸고 있고, 이제 재즈와 팝만 휩쓸면 되지.”

영준이 형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수철을 봤다.

“아니지, 이번에 네가 재즈와 퓨전을 휩쓸었으니까, 이제 팝만 휩쓸면 되나? 잠깐, 그것도 네가 다 휩쓸 건가?”

영준이 형은 수철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개구진 표정을 지었다. 수철은 대꾸하지 않고 장난스레 눈만 끔뻑였다.

영준이 형이 바짝 얼굴을 붙였다.

“그나저나 넌 대체 이번에 얼마나 받았을까? 연주만 한 내가 이 정도 받았는데?”

궁금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글쎄요? 얼마나 받았을까요?”“동그라미 세어 보지 않았어?”

“세어 봤어요.”

“몇 갠데?”

“너무 많아서 세다가 포기했어요.”

“…….”

영준이 형이 고개를 들며 어설프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 뭐, 괜찮아. 나도 예전에 꽤 많은 저작권료를 받은 적이 있어. 지금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꽤 반응이 좋았던 앨범이 있었거든.”“아, 그렇군요? 축하드려요.”“인제 와서 축하는, 어쨌든 넌 나보다 동그라미 두 개는 많겠지? 그렇지 않아? 어서 말해 봐. 궁금하잖아.”

영준이 형은 개구진 얼굴을 다시 바짝 붙여 왔다.

* * *

수철은 계속해서 여기저기서 작, 편곡 요청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K 방송사에서 기획하는 드라마 주제곡을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묻는데?”“쌤이 거절해 주시면 좋겠어요.”“S 그룹의 CM송도 안 할거지?”

“네.”

“지난번 작업했던 회사의 작, 편곡 요청도 안 할거고?”

“네.”

수철은 더 이상의 작업 의뢰를 받지 않았다. 더는 음악과 관련한 스케줄을 만들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음악과 관련해서 많은 일을 했다. 앨범, 영화, 광고, 드라마까지.

게다가 보컬 트레이너, 프로듀서, 디렉터, 앨범 제작자로서의 경험도 했다.

음악 판에서 쌓을 수 있는 경험은 이제 충분히 쌓았다.

금전적인 여유도 충분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갈 때가 됐다.

‘예스!’

수철은 박 대표가 계약 얘기를 꺼냈을 때 기뻤다.

말은 무덤덤하게 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뻤다.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다.

수철은 오래전부터 그런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다.

“쌤은 제가 필요하지 않으세요?”“네가 더 내가 필요한 거 같은데?”“어서 절 스카우트하세요. 서로 필요하니까요.”

“하하, 녀석.”

박 대표는 매번 웃어넘겼다. 하지만 수철은 박 대표의 소속이 되어 박 대표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디데이 뮤직’이라는 이름도 유명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제는 확신이 섰다. 그건 수철이 자신의 음악으로 영향력을 넓혀 가는 것이다. 영국에서의 흥행이 이런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수철은 마음 맞는 사람과 같이 작업하는 것이 즐겁다. 박 대표에게 프로젝트 앨범을 하자고 제안한 것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앨범에서 가능성을 봤다. 모두가 즐겁고 잘될 가능성을. 이것이 수철이 계속 박 대표와 같이하고 싶은 이유 중에 하나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친한 사람들과 계속 이런 앨범을 하고 싶다. 몸이 떨어져 있어도 앨범은 같이 할 수 있다.

친한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적인 잡담을 떠는 것. 그것이 이번에 수철이 프로젝트에서 느낀 매력이었다. 다소 예민한 시간도 있었지만, 그것 덕분에 나중에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수철의 이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주위에서 박 대표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음악보다는 성공에 초점을 맞춘다.

다혜도, 영준이 형도, 김명석도 마찬가지다.

수철은 음악의 큰 파도를 만드는 것은 마케팅이 아니라 음악만이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음악도 모두 그랬다.

사람들이 그런 음악을 만들려고 도전하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부딪치려는 용기가 없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박 대표는 수철이 생각하는 길을 가고 있다. 수철은 항상 든든했다.

박 대표는 수철이 가장 믿는 어른이면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철은 처음부터 박 대표 외에는 누구와도 같이할 생각이 없었다.

박 대표는 금별기획을 추천하지만, 수철은 금별기획이 아무리 대단한 제안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팀이 될 생각은 없었다.

협업 정도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 * *

“웬일이야? 이런 데서 밥을 다 먹자고 하고?”

수철은 저녁을 사겠다며 박 대표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쌤, 저 호주 가려고요.”“그래, 가야지. 거기 분위기가 그렇게 좋은데 이쯤 돼서 주인공이 한번 등장해 줘야지. 너무 신비로운 것도 매력 없어.”

박 대표는 당연히 가야 한다며 끄덕였다. 호주와 영국을 혼동하고 있었다.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야. 한번 가 봐서 알겠지만 거긴 한국이랑 달라서 사람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

“네.”

“근데, 잠깐!”

그제야 박 대표는 나라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호주라고? 영국이 아니라? 영국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친구들이 다 거기 있잖아?”“영국은 천천히 가려고요. 친구들도 유럽 돌며 공연 중이라 바쁘거든요.”

박 대표는 수철의 의도를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호주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박 대표에게 수철은 자신의 계획을 천천히 설명했다.

“제시 앨범 작업을 호주에서 먼저 시작하려고요. 녹음도 거기서 하고요.”“제시도 함께 공연 중이잖아? 계속 유럽에서 머물러야 할 텐데 왔다 갔다 하기에 너무 멀지 않아? 같이 작업하려면 영국으로 가야 할 거 같은데?”

박 대표는 다시 갸웃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작업을 시작하려고요. 나중에 제시가 오면 같이 준비해서 녹음하고요.”“그래도 시간이 많이 빌 텐데 굳이 호주까지 가서 작업할 이유가?”

수철은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박 대표를 봤다.

“쌤, 제시 앨범만 하러 가는 건 아니에요.”

“……아니면?”

“제시의 앨범은 시작일 뿐이에요. 그것 말고도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박 대표는 처음 듣는 얘기에 수철의 눈에 초점을 맞췄다.

“혹시 예전에 호주 공연 갔다 와서 거기서 작업하고 앨범 해 보고 싶다고 했던, 그걸 말하는 거야?”“네, 맞아요.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어요. 본격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도 해 볼 생각이고요.”

박 대표는 먹던 음식을 멈췄다. 입을 닦은 냅킨을 내려놓고 수철을 바라봤다.

수철이 드디어 판단을 내렸다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 멀리 떠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애써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왠지 금방 돌아올 거 같지가 않네?”

그 말에 수철은 대답하지 않고 박 대표를 바라만 봤다.

박 대표는 그런 수철의 표정을 읽었다.

“진짜야?”

“네.”

박 대표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지만, 수철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순간 박 대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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