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35화 (135/239)

#135화. 때가 됐다(2)

박 대표는 드디어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잘 생각했어.

좋은 결정이야.

이런 말을 해야 하는데, 선뜻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람인지라 충격과 섭섭함이 앞섰다.

잠시 머뭇하다 시선을 내렸다. 포크로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찔렀다. 입에 넣지는 않고 찔러만 놨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고 무릎에 놓인 냅킨을 집어 입을 닦았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때가 된 거네?”

“네.”

짧게 묻고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서로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제 하고 싶은 거 해 보려고요.”

수철의 이 한마디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그래, 그래야지.”

박 대표는 뭔가 중요한 말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습관적으로 덤덤하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다시 입을 뗐다.

“어떻게 시작하려고?”“제시의 앨범을 먼저 구체화하고, 집중해 보려고요.”

“집중? 어디에?”

“제 음악에요.”

“……!”

박 대표는 수철이 본격적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걸 알았다.

짧은 말 한마디에 긴장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크게 웃었다.

“하하! 잘 생각했어! 드디어 배가 출발하는군, 하하!”

마치 지금 상황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듯이 웃었다. 수철도 빙그레 웃으며 말을 붙였다.

“많은 경험을 해 보고 싶어요. 다양한 음악도 접해 보고, 다양한 음악가도 만나 보고 싶어요.”“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박 대표는 굵은 목소리로 끄덕였다. 수철은 계속 말을 이었다.

“새로운 소리도 만나 보고 싶어요. 소리엔 그 사람들의 역사가 담겨 있잖아요? 그래서 원주민들의 음악도 접해 보고 함께 작업을 해 보고 싶어요.”

수철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다양한 소리를 경험하며 다양한 부족의 토속 음악도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자연적이고 사람 본연의 소리를 찾아서 자신의 음악에 넣고 싶었다.

“하하, 원주민?”

그 말을 들은 박 대표는 웃음이 났다.

원주민들과 작업한다니.

생소하면서도 신기한 말이었다.

하지만 수철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표정을 가다듬고 몸을 붙였다.

“계획은 다 세운 거야?”“네, 그런데 재미없으면 빨리 돌아올 수도 있어요. 시간은 정해 놓지 않았지만요.”

그 말에 박 대표는 피식 웃었다. 빨리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다. 수철이 자신을 의식해서 가벼운 농담을 던진 걸 안다.

세계는 넓다. 분명 그곳에는 수철에게 열광할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수철은 더 자유롭게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수철을 음악가로서, 예술가로서 순수하게 존중해 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빨리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다.

“우리가 하는 음악도, 악기도 다 그 사람들 거잖아요. 그 사람들의 방식을 접해 보고 싶어요. 음악이 녹아 있는 삶의 방식이요.”

무척 매력적인 말이었다. 박 대표도 마음 같아서는 배낭 하나 메고 수철을 따라나서고 싶었다.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뗐다.

“여행하는 거랑 사는 건 다른데, 두렵고 그런 건 없어?”

수철을 잘 알면서도 노파심에서 물었다.

“전혀요.”

수철은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설렘이 가득해서 다른 감정은 생각도 안 날 정도였다.

“호주가 좋은 곳이지. 음악도 잘하는 곳이고. 거기 출신 유명한 뮤지션들도 많잖아.”“네, 특히 현대음악에선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어요.”“그래, 굳이 말하자면 재즈 같은 장르는 강대국이지. 팝과 락 쪽으로도 대단한 뮤지션들이 많고. 거기에다 호주는 뮤지션들 리스펙하는 거로 유명하잖아.”

“아…….”

박 대표는 수철보다 호주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 같았다.

“많은 뮤지션들이 호주를 꿈꾼다고 들었어.”

“왜요?”

“왜긴? 아름다우니까 그렇지. 신이 만든 섬이라고 하잖아.”

“아, 네.”

수철은 웃으며 끄덕였다.

수철이 호주를 택한 것도 절반은 그런 이유였다. 360도로 보이는 지평선,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하늘을 뒤덮은 노을, 그런 곳에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거기서 작품을 만들면 왠지 탄생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거 같았다.

수철이 처음 봤던 그 광경, 그걸 생각할수록 수철은 거기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소용돌이쳤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호주가 편하긴 하지. 영국보단 가까우니까.”

그 말에 수철이 바로 대꾸했다.

“그럼 꼭 오셔야 해요.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알았어. 디데이 뮤직의 1호 아티스트가 있는 곳인데 당연히 가야지. 아니, 이참에 아예 호주로 회사를 옮겨 버릴까? 어때?”“찬성이요! 백 퍼센트, 천 퍼센트! 같이 가시죠!”“하하, 진짜 그럴까? 이참에 나도 거시적으로 좀 놀아 볼까? 외국 가수들도 영입하고?”“네! 저도 도울게요, 어서 여권 만드세요. 비행깃값도 제가 낼게요!”“하하. 그런데 다혜랑 준이는 어떡하지?”

“…….”

한참 올라갔던 분위기가 꺾여 버렸다.

“걱정 마, 꼭 갈 테니까. 내가 말했잖아? 나도 외국에서 작업하고 싶다고. 특히 호주에서 말이야. 하하!”“네, 언제든지요. 제가 전망 좋은 바닷가에 작업실 만들어 놓을게요.”

“그래, 기대할게.”

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음식에 집중하지 못했다. 둘 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철은 혼자 남을 박 대표에 대한 생각을, 박 대표는 타지에서 혼자 생활할 수철에 대한 생각을.

마주 앉아 있으면서 서로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박 대표가 머리를 몇 번 털듯이 흔들고는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영국에 한번은 가야지 않아?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브라이언도 만나고, ECM 관계자들도 만나려면.”“네, 가야죠. 사실 처음엔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영국을 먼저 갔다가 호주로 가려고요.”

“그런데?”

“그런데 그건 정말 힘들더라고요. 지난번에 해 보니까요.”“하하, 그렇긴 하지. 장거리 비행은 진짜 곤욕이지.”“네, 그리고 멤버들이 계속 공연하느라 옮겨 다니니까 시간도 잘 안 맞았어요. 그래서 호주 가서 먼저 세팅하고 작업하다가 멤버들이 좀 한가해지면 그때 만나려고요.”“그래. 그게 낫겠네.”

박 대표는 좋은 판단을 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참, 브라이언 형이랑 ECM 관련한 일은 쌤이 다 맡아 주세요. 그리고 돈도 좀 많이 가져가시고요. 전 지금도 충분하거든요.”“하하, 녀석. 그래,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고 쌤.”

“응?”

“다혜와 다른 사람들에겐 제가 나중에 얘기할게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요.”“그래, 그렇게 해. 그런데 다혜는 나처럼 밥 한 끼 하면서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놀랄 테니까.”

“네, 그럴게요.”

수철도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혜에겐 툭 농담처럼 말을 할 수는 없다.

둘은 말을 멈추고 다시 식사를 했다. 많은 생각이 서로의 머릿속을 오갔다.

박 대표는 잠시 고개를 들어 수철을 바라봤다.

수철이 떠난다는 것이 선명해지자 다시 섭섭함이 밀려왔다. 섭섭함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문득 수철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래, 그때도 그랬지.’

박 대표는 수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다.

아무도 수철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는 걸.

누가 막아도 수철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걸.

혼자서 세상을 뚫고 나가는 것, 그것이 수철의 운명이라는 게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졌다.

지금은 그 과정에 하나일 뿐이다.

수철은 이번에 박 대표에게 말을 꺼내는 게 쉽지 않았다.

‘쌤이 놀라려나.’

소속이 되자마자 떠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떠나기 전에 소속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속이 되었으니 이제 회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공식적으로 박 대표에게 도움을 줄 길이 열렸다. 영국에서의 흥행을 경험해 보니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친구들을 남겨 놓고 간다는 아쉬움도 해소됐다.

그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다혜도, 하준도, 하린이도. 하나둘 각자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다.

이제 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수철은 거리낌이 없다.

박 대표에겐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오히려 갈 길을 가지 않는 게 더 실망을 줄 걸 안다.

박 대표의 말대로 이것이 거시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철아, 너 혹시…….”

박 대표는 뭔가 생각난 게 있는지 급하게 말을 꺼냈다.

“……?”

“금별기획에 이진석 차장이라고 알아?”“얼굴은 모르지만 통화한 적은 있어요.”“사실 이 차장이…….”

박 대표는 이 차장과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간에 나눴던 대화에 대해서 간단히 수철에게 말을 해 줬다.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는데 더는 미룰 수가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수철은 늘 그렇든 별 대꾸 없이 얘기를 들었다.

* * *

“진석아, 통화 가능해?”

박 대표는 다음 날 바로 이 차장에게 전화했다. 수철이 자신의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얘기를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자칫 오해할까 봐 만나서 얘기할 생각으로 미루고 있었는데, 더는 미룰 수가 없게 됐다.

―네, 형님. 말씀하세요.

“수철과 관련해서 변동 사항이 생겼는데 말해야 할 거 같아서.”―어떤 변동 사항이요?

“흥분하지 말고 내 얘기 끝까지 들어.”―네.

“수철이 내 회사에 들어오게 됐어. 정식 계약은 아니고 구두 계약을 한 상태야.”―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과 수철이 소속 계약을 맺었다고요?

이 차장은 흥분하지 말고 끝까지 들으라는 말을 그새 까먹고 흥분했다. 박 대표는 이래서 전화통화가 아니라 만나서 얘기하려 한 거였다.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런데.”―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다니요? 형님, 그게 무슨 장난 같은 말씀이세요?

이 차장은 또 말을 끊고 흥분했다.

―너무 무책임하신 거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계약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 차장이 흥분하는 건 당연했다. 희롱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는 수철과 금별 사이에 다리를 놓겠다더니 이제 와서 냉큼 수철과 계약을 했다는 말에 욱했다.

박 대표는 이 차장이 계속 흥분하자 잠시 핸드폰에서 귀를 뗐다가 붙였다.

“정식 계약은 아니고 구두 계약이라니까? 그리고 내 말 끊지 말고 끝까지 좀 들어 봐.”―……네, 말씀해 보세요. 그런데 정말 이해할 상황이 아니면 형님은 지금까지 저 갖고 장난치신 겁니다.

이 차장은 화를 쉽사리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자꾸.”―…….

박 대표는 이 차장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미리 얘기하지 못해서 미안한데, 변하는 건 없어. 지금 하던 대로 그냥 진행해도 무관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도 제로야.”

박 대표는 계속해서 그동안 수철과 관련해서 법적인 조언이나 세금 관련해서 도와왔다는 얘기를 해 줬다. 이번에도 그것과 관련해서 일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진행이 된 거고, 그래서 지금까지 하던 대로 그대로 진행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수철의 작품만 내가 관리해 준다고 생각하면 돼. 정산 확인하고, 제안 들어오면 수철에게 알려 주고, 문서 작성이나 혹시 모를 법적인 부분 그런 것들을 도와주는 거야. 쉽게 말하면 내가 비서처럼 그런 것들 관리해 준다고 생각하면 돼.”―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문제가 될 게 없는 게 확실한 거죠?

그제야 이 차장의 목소리가 좀 차분해졌다.

“그럼. 정식으로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니까. 내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어, 언제든지 수철에게 좋은 길이 있으면 그길로 가라고 떠밀 거야.”

이 차장은 잠시 멈췄다 입을 뗐다.

―수철도 형님과 같은 생각인가요?

“그래, 내가 설명을 했어.”―그럼 다행이네요.

한숨 돌린 목소리였다. 박 대표가 바로 말을 붙였다.

“어차피 너희 회사도 수철과 소속 계약을 생각하는 건 아니잖아?”―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거지, 저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죠.

“수철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알고 있어요. 그런데 말씀드렸잖아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고요. 수철이 거절하면 그다음엔 플랜 B를 논의할 거예요.

그 말에 박 대표는 눈에 힘을 줬다.

“플랜 B? 그게 뭔지 물어봐도 돼?”―그건 수철과 먼저 얘기하고 나서 말씀드릴게요.

이 차장은 선뜻 그것이 뭔지 말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말을 멈추고 핸드폰을 바라봤다.

갸웃했다.

처음 듣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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