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36화 (136/239)

#136화. 마지막 협상(1)

“제안이요? 참신하네요.”

이 차장은 처음 박 대표에게 수철이 협업을 제안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신하다고 했다. 하지만 속으로 비웃었다.

누가 감히 금별기획을 상대로 먼저 제안을.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철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그런 말을 전하는 박 대표였다.

아무리 천재 소릴 듣는다고 해도 그런 얼토당토않은 코미디 같은 얘기를 하면 타이르든지 해야지. 왜 같이 맞장구를?

쯧쯧.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황이 달라졌다.

그 코미디 같던 말이 현실이 됐다.

“이제 용수철의 음악은 나오기만 하면 히트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몇 달 동안 계속 휩쓸고 있잖아요.”

수철이 손을 댄 음악은 단 한 곡도 빠짐없이 모두 히트를 쳤다.

“도대체 어떤 점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걸까요? 트렌드를 쫓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쫓는 게 아니라 만들고 있죠. 그러니까 저렇게 폭발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거죠”

좀처럼 열기가 식을 것 같지도 않다.

“이 정도면 흥행 보증수표 아닙니까?”“완전 금광이야. 회사가 있는지 알아보고, 없으면 스카우트 가능한 상황인지 컨택해 봐.”

여기저기서 수철에게 눈독을 들이는 눈빛들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H 보험사 VVIP 3인방의 취향을 사로잡았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기획사는 돈 많은 재력가의 취향에 관심이 많다. 이들은 회사가 어려울 때 투자자가 되어 줄 뿐만 아니라, 말 몇 마디로 일거리를 창출하기도 한다. 금별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이 수철의 팬이 됐다면, 수철과 금별의 연결 고리를 통해 그들에게 잠재적인 조력을 기대할 수도 있다.

“음반사 관계자에 따르면 동양인이 이렇게 흥행한 적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현지 관계자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 왔다. 이 차장은 좀 더 정확한 소식을 듣고자 곧바로 현지 교포와 접촉했다. 그는 영국 언론사의 연예부 기자로 있는 사람이었다.

―한국인이 만든 앨범이 이렇게 대박이 나서 같은 한국인으로서 정말 뿌듯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업되어 있었다.

“재즈 정통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들었는데요?”―아, 그건 장르를 따지는 꼰대들 얘깁니다. 전혀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나이 든 평론가들이 으레 한마디씩 하는 거죠.

“그렇군요.”

―여기 반응은 정말 대단합니다. 놀라울 정도죠. 이렇게 국위 선양을 하고 있는데 한국 언론은 왜 가만있는지 의문이네요.

“아무래도 재즈는 좀…….”―네, 압니다. 한국에서는 재즈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죠.

교포는 아쉬운 톤으로 말을 했다. 자신의 고국이 재즈에 관심이 없다는 게 그랬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여기 영국은 매우 다릅니다. 많은 사람이 재즈를 사랑하죠.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곳곳에서 재즈 뮤지션들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럽네요.”

재즈에 관심이 많은 이 차장은 재즈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영국이 진심 부러웠다.

―여기 상황을 좀 더 설명하자면 ‘ABYSS’ 앨범은 퓨전이라서 젊은 층까지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장르를 초월해서 그 인기가 팝으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폭발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교포는 자신의 직장 상사가 이 정도로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흡입력 있는 앨범은 처음 본다며 감탄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영국 음악계의 관심사는 용수철이라는 어린 한국인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없어서 금별에까지 문의가 왔었고, 한국에 나와 있는 BBC 특파원에게 수철의 인터뷰를 부탁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그동안 수철에 대해 달라진 상황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 많다.

이미 영상사업단과 손을 잡은 다른 아티스트들조차 수철을 만나고 싶어 했고, 전위 예술가로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는 수철과 같이 작품을 하고 싶다며 공식적으로 프러포즈를 했다.

금별기획은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수철이 무슨 제안을 하든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 됐다.

* * *

“왜 아직 진전이 없지? 시기가 지난 거 아니야?”“원래는 드라마 음악 작업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수철과의 상황이 어떻게 돼 가냐고 묻는 이사에게 이 차장은 난처한 얼굴로 설명했다.

“요즘 용수철 작곡가의 스케줄이 바빠서 조금 미루고 있었습니다.”

“…….”

이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급진전될 줄은 몰랐습니다.”“상황 따지지 말고 서둘러서 진행해.”“네, 알겠습니다.

“이제 천재 영입이니 하는 얘기는 의미가 없어. 지금은 용수철과 연결 고리를 계속해서 이어 가는 게 중요해. 수익은 그다음 문제야.”

앞으로 발생할 잠재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수철은 이제 음악가로서의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브랜드 이미지 마케팅에 초점을 맞추는 금별기획으로서는 수철과 같이 작품을 하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어떤 형태의 제안이든 수용할 수 있는 최대치를 맞춰 볼 생각입니다.”“그래, 무조건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춰. 더 이상의 협상이니 하는 신경전은 의미가 없으니까.”

손만 대면 히트하고, 외국에서까지 돌풍을 일으키니, 이제 급한 건 금별기획이었다.

수철의 제안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상황.

더 이상 손익을 따져 가며 머리 굴릴 때가 아니다.

* * *

“앨범에 대한 협업을 제안하려 한다고 들었어요.”

“네.”

수철과 이 차장이 드디어 마주 앉았다.

“어떤 앨범인지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별로 설명할 게 없어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과 제시의 색깔에 교집합이 있어서 해 보려는 거예요.”

수철은 별로 설명하게 없다고 했지만, 이 차장은 첫 대화부터 수철의 말에 끌렸다.

‘색깔의 교집합이라니!’

심상치 않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수철은 항상 기대 이상을 만들어 내니까.

“좀 더 설명해 주겠어요? 분위기나 장르 같은 거요.”“분위기는 흩어져 있던 소리가 모여드는 거고요.”

‘흩어져 있던 소리가 모여?’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이 차장은 갸웃했다.

“장르는, 음……. 사람들은 그걸 뉴에이지나 장르 파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전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인데요.”

장르 파괴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금별기획이 가장 선호하는 말이다.

새롭고 신선한, 장르 파괴.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있었지만, 어쨌든 수철의 표현을 보면 뭔가 폭발력을 가진 작품이 나오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시장을 흔들 만큼 새롭고 신선한.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흩어져 있던 소리가 모인다는 부분을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머릿속에 그림이 잘 안 잡혀서.”“그건 말로 설명하기가 좀 그래요.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얘기라서요.”“보이지 않는 것이요? 혹시 영적인 것을 말하는 건가요?”“그런 것은 아니고요. 생각이나 어떤 흐름 같은 거예요. 그 부분이 저와 제시의 교집합이에요. 그 교집합을 향해서 소리들이 모여드는 거죠.”

이 차장의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교집합을 향해서 소리가 모여들다니.

수철은 그런 이 차장을 보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말로 설명하는 거보다 나중에 들어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거예요.”

말보다는 음악을 들려주는 게 편하다는 말로 들렸다.

“그 말은 벌써 구상이 끝났다는 얘긴가요?”

“어느 정도는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 차장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몸을 테이블에 바짝 붙였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얘기를 진행해 보죠.”

이 차장은 박 대표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고 했지만, 인제 와서 회사와 인연을 맺자는 얘기를 다시 꺼내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준비해 온 다른 플랜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급하게 말을 이었다.

“우선 수철 씨가 제안하는 앨범의 협업은 거절합니다.”

“네?”

수철은 이 차장과 눈을 맞추며 갸웃했다. 잘 대화하다가 느닷없이 거절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기껏 불러내서 얘기까지 다 듣고 나서.

박 대표는 거대한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고, 성공한 프로젝트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체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처음엔 빠른 길을 선택하는 게 좋아.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어.’

하고 싶은 걸 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우선 금별기획의 영업력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게 좋다고 했다.

박 대표는 금별기획과 그 뒤에서 엘진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모델을 참조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철은 박 대표의 말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지만,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또 금별과 드라마 끝나고 얘기를 하기로 약속한 적이 있어서 나온 자리였다.

그런데 거절한다니.

처음 얘기를 꺼낼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영국의 ECM에서도 수철의 다음 앨범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여차하면 수철이 혼자 제작을 해 볼 생각도 있다. 아무리 금별의 영업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수철은 큰 필요성을 못 느꼈다.

더 할 얘기가 없으니까 그만 갈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이 차장이 다시 몸을 앞으로 붙였다.

“놀랄 거 없어요, 그냥 과정이니까.”

‘과정?’

“일단 공식적으로 수철 씨의 제안을 거절하고, 우리 금별기획에서 다시 별도로 제안드리겠습니다.”

“……?”

“이번에 수철 씨가 시작하려는 앨범에 대한 협업을 제안하겠습니다. 어떠세요?

“그게 무슨?”

“수철 씨가 제안한 것을 그대로 다시 제안한다는 말입니다.”

“……?”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의아하실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건 다른 아티스트와 형평성을 맞추고자 하는 겁니다. 우리 금별기획에서는 먼저 제안을 하지, 아티스트 개개인으로부터 제안을 받지는 않거든요.”

“아…….”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았다.

금별기획은 그림 맞추기를 하는 것이다.

“계약 관련해서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전 그런 건 잘 모르는데…….”“간단한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모르면 모른다고 하시고요.”

“네.”

“영국에서 발매한 앨범은 계약이 어떻게 진행됐어요?”“ABYSS 앨범 한 장만 계약했어요. 판권은 그곳에서 갖고, 저는 음반 판매와 음원 수익에 대한 일정 부분을 받는 거로요.”“그렇군요. 혹시 그쪽에서 그 이후에 수철 씨에게 새로운 앨범을 제안했나요?”

“네, 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답변하셨나요?”“생각해 보겠다고만 했어요.”

“그렇군요.”

이 차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네.”

수철은 물끄러미 이 차장을 바라봤다. 무슨 제안을 또 하려는 건지.

“이번 앨범을 한국어 버전으로 한 장 더 발매하는 건 어떨까요? 국내에서 말이에요.”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수철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차장이 박 대표에게 말한 플랜 B가 이거였다.

“만약 한국어 버전을 진행하게 되면 가수는 저희가 선택하고자 합니다. 물론 제작과 마케팅도 모두 우리 금별에서 맡고요.”

수철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제시에게도 물어봐야 하고, 우선 박 대표와 상의해 봐야 할 거 같았다.

수철의 표정을 읽은 이 차장이 빠르게 말을 붙였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요. 돌아가서 박 대표님과도 상의를 해 보시고 천천히 결정하세요.”

이 차장은 수철을 배려했다.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고, 어차피 박 대표와 상의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럴 땐 박 대표와의 친분이 도움됐다.

수철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말씀하신 가수가 혹시 누군가요?”

직접 가수를 선택하겠다고 하니 궁금해서 물었다. 혹시 지난번처럼 하린이가 불쑥 튀어나오는 건 아닌지. 아니면 금별에서 새롭게 영입한 사람이 있는지. 누가 됐든 궁금했다.

이걸 아는 이 차장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생각하는 후보군은 없습니다. 하린이가 될 수도 있고요.”

“하린이요?”

수철이 놀란 눈을 뜨자 이 차장이 웃으며 설명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확정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이 차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수철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수철 씨도 들었겠지만 박 대표님, 아니, 성준이 형이랑 저랑은 예전부터 많이 친했어요.”“네, 얘기 들었어요.”“완전 매일 붙어 다닐 정도였어요.”

“아…….”

“그러니까 빙빙 돌리지 않고 쉽게 얘기할게요. 성준이 형도 있는데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은 별로 의미가 없으니까요.”

이 차장은 박 대표를 성준이 형이라 부르고, 우리 사이라는 단어까지 쓰며 친밀도를 높였다.

“제가 한 말은 쉽게 말해서 이번 수철 씨 앨범의 한국 판권은 우리 금별에서 갖겠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은 성준이 형에게 얘기하면 바로 고개를 끄덕이실 거예요. 우리도 얻는 게 있어야지 협업이 성사되죠.”

“그렇군요.”

“수철 씨는 조직을 잘 모르지만, 회사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움직여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수익이에요. 그래야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네.”

이 차장은 최대한 수철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했다.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차장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바로 다음 제안을 꺼내놨다.

플랜 B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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