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바람에 날리는 먼지
―형님, 얘기 들으셨죠?
“응, 들었어. 수고 많았어.”
이 차장이 전화를 해 왔다.
박 대표는 이 차장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다시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수철의 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성과가 없어서 좀 난감합니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확실한 연결 고리를 만들지 못해서 회사에 눈치가 보인다는 얘기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그냥 포기했어요. 괜히 그랬다간 다른 일까지 망칠 거 같아서요.
수철을 자극하면 안 될 거 같아서 할 말을 다 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드라마 주제곡 할 때와는 딴판이더라고요.
그 말에 박 대표는 피식 웃음이 났다. 드라마 할 때는 마냥 수철을 칭찬했던 이 차장이다.
“중요한 얘기는 다 한 거야?”―플랜 B에 관한 얘기만 했어요. 구체적으로 우리 금별에서 어떻게 할 거라는 얘기는 안 했어요.
“한 번 더 만날 생각인가?”―그건 아니고요, 형님이 말씀해 주세요. 아무래도 수철이 형님께 듣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얘기하지 않은 거예요. 제가 얘기해 봤자 멀뚱거릴 거 같아서요.
“알았어, 그 부분은 내가 설명할게. 그런데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나도 모르니까 나중에라도 제대로 한번 알려 줘야지.”―네, 그건 별도의 기획안을 만들어서 설명드릴게요. 우선은 형님이 수철에게 큰 그림만 알려 주세요. 개념을 잡을 수 있게요.
“그래, 그건 그렇게 할게.”
박 대표는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이었다.
“사실 수철은 마케팅이니 시스템이니 하는 것엔 관심이 없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들은 내가 알아서 다 해 주길 바라지.”―네, 제가 보기에도 그랬어요.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니까 말씀드린 거예요.
“그래, 알았어.”
―앞으로 업무 관련해서는 형님이랑 저랑 둘이 얘기하면 되겠어요. 이제 수철은 그만 만나고요.
그 말에 박 대표는 웃음이 났다. 수철을 만나서 진땀을 뺐다는 얘기로 들렸다.
“그래, 그게 수철도 바라는 거야.”
결국 박 대표와 이 차장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둘이서 남은 일을 구체화하게 됐다. 수철의 결정을 받느라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어찌 됐건 결과적으로는 잘됐어요. 이제 형님과 협상하면 되니까요.
“협상?”
―아니, 대화라고 할게요. 전 아무래도 형님이랑 얘기하는 게 편하잖아요. 어차피 수철이랑 얘기해도 결국 형님이랑 상의하게 될 테니까요.
“그런 면에서는 나도 편해. 앞으로 우리가 어떤 얘기를 나누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네, 일은 확실하게 해야죠.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요.
“그래.”
―아, 그리고 제가 최대한 조절은 해 보겠지만 수철이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금별의 역할이 달라질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남은 부분을 둘이서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국어 판권에 대한 배분과 부차적인 수익모델. 그리고 법적인 부분까지.
금별은 수철이 잠재적으로 금별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서포트를 하겠다는 거였다. 당연한 얘기였다.
“그래, 당연하지.”
박 대표도 당연하다고 끄덕였다. 그리고는 분위기를 바꿔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개운치가 않지?”
회사에서 이 차장의 위치를 알기 때문에 걱정스레 물었다.
―네, 좀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단지 아쉬운 건 나름 수철을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알아주기는커녕 바로 노!를 외치더라고요. 며칠 고민한 것에 비해 시원하게 성사가 된 게 하나도 없어요. 하하.
이 차장은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한국 판권이 있잖아.”―네, 그건 문제없겠죠?
“그래, 원하는 대로 하면 될 거 같아. 그건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줄게. 다른 부분은 나도 수철에게 강요할 수 없지만.”―감사해요, 이번에 느낀 거지만 수철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더라고요.
“하하! 그래,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지. 우리 시각으로 보면.”
수철은 이익을 좇는 게 아니기에 보통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저, 그날 걸어가면서 정신 나간 놈처럼 계속 중얼거렸어요.
“하하. 뭐라고?”
―‘그만하고 싶다고? 할 생각이 없어? 지금까지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어? 우리 금별을 상대로? 허, 나 참 기가 막혀서.’ 이렇게요.
“하하하.”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아시잖아요?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서 부탁하지, 우리가 아쉬운 소리 하지는 않잖아요.
천하의 금별이 쩔쩔맸다는 말로 들렸다.
“하하, 그렇지. 그럴 일이 없지.”
박 대표는 왠지 통쾌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큰 웃음이 났다.
―아직도 그날의 충격이 남아 있어요. 욕구 불만 때문에 잠까지 설쳤다니까요?
“하하!”
웃으면 안 되는데, 박 대표는 계속 웃음이 났다.
―뭐, 어쨌든 형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내가 금별기획의 차장에게 부탁을 다 받아 보네?”―…….
“하하, 알았어. 쓸데없는 갈등 하지 말고 잘해 보자고.”―네, 그리고 형님, 이번에 제시와 같이하는 앨범이요.
“응.”
―수철에게 몇 마디 설명 듣고 소름이 확 돋았어요.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잘하면 초대박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화기로도 이 차장의 느낌이 전해졌다.
박 대표도 수철에게 그 앨범에 관해 처음 들었을 때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이번엔 어떤 깜짝 놀랄 것이 세상에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저도요. 그래서 이번에 크게 성과는 없었지만, 그게 잘되면 다 커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윈윈 하는 거지.”―네, 그렇죠. 형님, 암튼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죠. 마무리할 것도 있으니까요.
“그래, 며칠 내로 얼굴 보면서 얘기하자. 내가 한잔 살게.”
* * *
그날 이후 수철은 호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호주에 대한 정보를 모아서 그동안 궁금했던 갖가지 궁금증을 해소했다.
날씨, 시간 차이, 항공료, 비자 문제, 간단한 역사, 그리고 시드니의 악기점과 음악 관련 소프트웨어를 살 수 있는 곳까지. 공연을 볼 수 있는 클럽은 물론이고, 지하철 노선까지 훑어봤다. 당장 필요해서라기보다 호기심이었다. 알면 알수록 관심이 가는 나라였다.
수철은 유럽에 있는 제시와 통화해서 날짜도 조율했다. 조금씩 호주로 옮겨 갈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웠다.
“10주 후에 출발할 거라고? 생각보다 길게 잡았네?”“제시보다 한 달 먼저 가려고요.”
“한 달 먼저?”
“제시가 석 달 후부터는 시간이 괜찮아질 거 같아서요. 날씨가 추워지면 공연을 못 하잖아요.”“그래, 아무래도 겨울은 공연이 비수기지.”“그래서 제가 한 달 먼저 가서 작업하다가 제시가 오면 연습하고 녹음하려고요. 그러면서 제 작업도 하고요.”
그 말에 박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오호, 나름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네?”
“네. 헤헤.”
“생각해 보니까 호주가 이점이 꽤 많아. 날씨도 반대니까 그때는 따뜻하잖아?”“네, 맞아요. 여름이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작업도 하고 이것저것 경험도 해 보려고요.”“그래. 그리고 나도 몰랐었는데, 호주가 녹음으로 유명하더라고? 세계적으로 상도 많이 받았고.”
그 말에 수철이 끄덕였다.
“저도 제시에게 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도 녹음하러 많이 온다고요.”“그럴 거 같아. 나도 그런 생각이 드니까. 녹음도 녹음이지만 경치가 죽이잖아?”“네, 저도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요.”
수철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실 녹음보다 수철은 호주가 가진 자연환경에 더 끌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해변과 하늘을 불태울 것 같은 노을,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들. 무엇보다 그런 곳에 사람 한 명 없다는 게 더 매력적이었다.
“어쨌든 한겨울에 가겠네?”“네, 새해는 거기서 맞으려고요. 거기 하버 브리지라는 곳에 모여서 사람들이 서로 새해를 축하한다는데, 그 광경이 대단하대요. 인터넷이 떠들썩할 정도로요. 그래서 그 모습도 한번 보고 싶어요.”“하하, 난 상상이 안 되네. 한여름에 새해 풍경이라……. 재밌긴 하겠어, 거긴 크리스마스 때 어떻게 하려나? 산타가 더워서 고생할 거 같은데 말이야. 하하.”
박 대표는 한국과 기후가 반대인 호주의 풍경을 상상하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아, 그리고 비자 문제는 내가 진석이랑 상의해 볼게.”
“차장님이랑요?”
자신의 비자 문제를 이 차장이랑 상의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3개월마다 관광 비자를 연장하는 것은 번거롭잖아? 그렇다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갈 것도 아니고.”“일하러 가는 게 아니니까요.”“그러니까.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는 이것저것 증명해야 할 게 많아.”
박 대표는 비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 차장이랑 상의해 보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떤 방법이요?”
“예술인 비자 같은 거.”
처음 듣는 말이었다. 비자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한지 몰랐다.
“가장 좋은 게 학생 비자를 받아서 체류하는 건데. 학교 다닐 건 아니니까 그건 안 되고. 관광 비자는 아무리 연장해도 1년밖에 안 되니까 다른 체류 비자가 있는 게 좋지.”“한국에 왔다가 다시 들어가면 된다고 들었어요.”
박 대표도 알고 있는지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해도 번거롭잖아. 내가 이 문제는 진석이랑 얘기해 볼게. 만약에 금별의 지사를 통해서 예술인 비자로 초청이 가능하면 2년 정도는 비자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있을 수 있을 거야.”
“아…….”
“내가 한때 외국에 오래 있어 봐서 아는데, 비자 문제가 생기면 정말 머리 아퍼. 갑자기 쫓겨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처음에 잘 선택해서 가는 게 좋아. 아니면 중간에 왔다 갔다 하고. 피곤해.”
박 대표는 경험이 있는지 머리를 저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넌 별로 그런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긴 해.”
“그게 무슨?”
“네가 이미 음악가로 유명한데 설마 비자를 안 내줄까? 내 생각엔 영주권도 발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진짜요?”
“그래. 외국엔 영화감독, 프로듀서, 작곡가 같은 아티스트에겐 쉽게 영주권을 주거든. 작품에 관한 증명만 하면 돼.”
멋있게 들렸다. 예술가를 우대한다는 말이니까. 물론 된다고 해서 수철이 영주권을 받을 건 아니지만.
“암튼, 그 문제는 내가 진석이랑 얘기 나눠 보고 알려 줄게. 나보단 금별이 더 정보가 많을 테니까.”
“네, 감사해요.”
박 대표가 얘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에 끓일 물을 올려 놓고 돌아봤다.
“남은 시간 동안 뭐 할 생각이야? 작업할 것도 없잖아?”“할 것 많아요. 운전면허도 딸 거고, 영어 공부도 해야죠. 못 만난 친구도 만날 거고요.”
수철은 계획이 다 서 있었다.
박 대표는 빙그레 웃다가 입을 뗐다.
“우리 MT 한번 갔다 올까?”
“MT요?”
“그래, 소속 뮤지션이 셋이나 생겼는데 단합 대회 한번 해야 하지 않냐고 이 실장도 성화고, 나도 오랜만에 바람 좀 쐬고 싶어. 같이 어울려서 공기 좋은 강가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술도 한잔하고. 좋지 않겠어?”
수철이 가기 전에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빼고 말했다.
“네, 저도 좋아요. 그런데 다들 바쁜데 시간이 맞을까요?”“내가 소속사 대표인데 그 정도는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아하.”
마주 보는 둘의 눈빛이 빛났다.
“그런데 저, 아직 호주 간다는 말을 못 했는데, 그전에 하는 게 좋겠죠?”“가서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분위기가 무거워질 텐데요?”“가볍게 얘기하면 되지.”
“어떻게요?”
“호주에 작업하러 간다고만 얘기해. 자세한 얘기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하더라도.”“네, 알겠어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요.”
수철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박 대표가 얼굴을 바짝 붙여 왔다.
“그리고 난 갔다 와서 바로 오픈할 거야.”
“오픈이요?”
“사무실.”
“와! 장소는 정하셨어요?”
“응.”
* * *
“자! 출발!”
이 실장의 신호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아이돌 그룹처럼 리무진 밴에 모두 올랐다.
밤에 강가에서 조용히 낚시를 즐길 생각하는 박 대표도, 고기 구워서 소주 한잔 들이켤 생각하는 이 실장도, 너무 바빠서 휴식이 필요했던 하준도, 마냥 바람 쐬러 멀리 가는 게 좋은 다혜도, 그리고 MT라는 걸 처음 가 보는 수철까지.
모두 즐거움에 입이 잔뜩 벌어졌다.
휘잉―!
신나게 달리는 밴 옆으로 국도에 쌓여 있던 흙먼지가 바람에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