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불멍
장소는 동강 근처의 조용한 팬션이었다.
박 대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한적한 곳으로 잡았다. 인기인이 몇 명 있기 때문이다.
“고고!”
짐을 풀자마자 래프팅을 하러 나섰다. 서울에 비해 날씨가 쌀쌀했지만, 이 실장이 팀워크를 쌓기에는 최고라며 깜짝 이벤트를 준비해 놓았다. 신이 나서 앞장서 걸어가는 이 실장을 보며 박 대표는 내키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혼자만 빠질 수는 없었다.
간단한 안전 교육을 받은 후 다 같이 구명조끼를 입고 래프팅을 시작했다.
“와!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
박 대표는 출발할 때와 다르게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보트가 이리저리 기울어질 때마다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진을 보면 박 대표가 가장 즐거워했다. 신나서 잔뜩 벌어진 입 사이로 물방울이 튀어 들어가고 있었다.
“야, 재밌다! 내일 가기 전에 한 번 더 타자!”
박 대표는 물 만난 개구쟁이같이 좋아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귀여운 눈으로 바라봤다.
“대표님이 좋아하시니까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재밌었나요?”
“네!”
이 실장의 물음에 모두 물에 젖은 머리를 털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팀워크를 쌓는 데 래프팅이 짱이라는 이 실장의 말이 증명됐다.
“대표님, 번지 점프하는 데 있는지 찾아볼까요?”
이 실장이 또 앞서가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번지 점프까지 하며 확실하게 팀워크를 쌓자고 했다. 이번엔 박 대표가 극구 말렸다.
“워, 워, 이 실장. 오늘은 여기까지. 배고프다, 들어가서 씻고 고기 구워 먹자.”
아쉬워하는 이 실장을 끌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 마당에 불판을 피었다. 준비해 온 삼겹살과 소시지, 버섯 등을 올려놓으며 파티를 시작했다.
큼지막한 쌈을 입에 집어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술도 한 잔씩 들이켰다.
“하하.”
“호호.”
분위기가 무르익자 하준과 다혜는 그간 있었던 방송 에피소드를 꺼내 놓았다. 파란 밤하늘에 웃음소리를 퍼트렸다.
한참 재밌게 떠들고 마시던 이 실장이 잠시 시끌벅적한 틈을 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시간 운전에, 래프팅에, 소주까지 들이켜니 얼큰해지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술이 확 오르네요. 대표님, 전 아무래도 먼저.”“그래, 오늘 수고 많았어. 우린 괜찮으니까 들어가서 쉬어.”
“네, 그럼.”
이 실장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박 대표도 힐끗 눈치를 보더니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좀 나갔다 올게.”“이 야밤에 어딜 가시려고요?”“요 앞에 가서 낚시 좀 하려고.”“낚시요? 이 시간에요?”“그래, 낚시도 하고, 새벽 물안개가 예술이거든. 여기까지 왔으면 그건 꼭 봐야지.”
박 대표는 우려하는 다혜의 시선을 외면한 채 낚싯대를 집어 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밤낚시를 해 보겠다고 낚싯대를 메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셋만 남았다. 하준은 장작을 집어넣으며 화력을 키웠다. 불이 활활 타올랐다.
모두 말없이 불만 바라봤다.
한동안 멍하니 장작불을 바라보던 하준이 먼저 입을 뗐다.
“힘든 기획사 시간도 버티면서 오랫동안 이런 날을 꿈꿔 왔었는데…….”
불을 보고 있어서인지 그간 마음에 담아 두었던 진솔한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철과 다혜는 귀를 열어 놓은 채 시선은 불을 향해 있었다.
하준이 멈췄던 말을 이었다.
“막상 이루고 나니 좋기만 한 건 아니야. 가끔은 내가 원했던 게 이게 맞나?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길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
“이게 음악 하는 게 맞나? 내가 바랐던 모습이 이런 거였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하준은 푸념하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선망했던 뮤지션들은 자유롭게 여행하며 공연하고. 무대에서 거침없이 소리 지르고, 밤새 술을 마시며 자신만의 음악 철학과 사상을 자유롭게 말하는, 그런 모습이었는데.”
“…….”
“그런데 지금 난 하루에 3, 4개의 행사장을 돌며 똑같은 노래에 똑같은 멘트만 내뱉고 있어. 노래하는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준은 시선을 장작불에 둔 채 실소를 보였다.
“아바타로 쓸 로봇이 있으면 맡겨 놓고 쉬고 싶어. 인생 표지판을 재점검하고 싶어.”
하준이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는 건 불에 비친 그의 표정에서도 알 수 있었다.
묵묵히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고 있지만, 마음의 소리는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얘기는 평소에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이런 데서나 할 수 있다, 활활 타는 장작불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한 채.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이번엔 다혜가 입을 뗐다.
“오빠 얘기 듣다 보니까, 제 얘기를 듣는 것 같았어요. 저는 오빠만큼 바쁘거나 정신없는 게 아닌데도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요. 작가 언니들이 넌 이래서 뽑힌 거야, 이 프로그램에서 네 역할은 이런 거야, 이런 얘기를 하면.”
다혜는 갑자기 울컥하는 게 있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이었다.
“방송국 사람들이 말하는 컨셉에 맞춰서 말하고 웃는 내 모습이 너무 가식적이라는 게 느껴져요. 솔직한 내 모습이 좋아서 뽑았다고 하는데, 그 솔직하다는 모습도 가면을 쓴 것 같아서 혼란스러워요.”
다혜는 고개를 저었다.
찌르륵. 찌르륵.
다혜가 말을 멈추자 적막함 속에 멀리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며 주변을 감쌌다. 셋은 잠시 풀벌레 소리에 휩싸였다.
수철과 하준은 다혜의 말에 대꾸는 없었지만 공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만들어 준 컨셉 때문에 가식의 가면을 써서 혼란스럽다는 말.
그 말은 모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동안 말을 멈췄던 다혜가 다시 입을 뗐다.
“쌤의 말이 다 옳았어요.”
“…….”
“작곡가는 작곡가의 길을 가야 해요.”
그 말에 수철과 하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혜는 방송이 재밌긴 한데 방향을 잃는 것 같다고 얘기도 덧붙였다. 방송을 할수록 박 대표의 말이 자꾸 맞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다혜가 얘기를 멈추자 다시 적막이 흘렀다. 모두 자작자작 타는 나무 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번엔 수철이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저, 호주 가려고요.”
“왜?”
“앨범 작업하러요.”
“좋겠다.”
“부럽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게 끝이었다.
아무도 심각하지 않았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성의 없게 묻고 성의 없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멍하니 시선을 장작불에 멈춰 둔 채.
눈동자엔 활활 타는 불꽃만이 비치고 있었다.
그래도 좋은 시간이었다.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공감을 하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수철은 한동안 맥주캔을 손에 든 채 불꽃을 바라봤다.
수철의 눈동자엔 불꽃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엔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하는 설렘이 스쳤다.
* * *
땅땅땅.
박 대표는 엠티를 다녀오자마자 바로 사무실을 오픈했다.
굵은 글씨로 나무에 새긴 회사명을 문 앞에 박았다.
‘웰컴 투 디데이 뮤직.’
박 대표는 흡족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다 문을 열고 들어가 사무실 한쪽 벽에 액자를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디데이 뮤직’에서 발매한 앨범들이었다.
짝짝짝.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사무실 너무 좋네요. 햇빛도 잘 들고요.”
반지하의 작업실을 드나들던 이 실장은 환하게 웃었다.
“와, 좋은데요? 진짜 회사 같아요.”
수철도 거들었다. 하지만 다혜는 퉁명스러운 표정이었다.
“애걔, 이게 뭐예요?”
“왜?”
“다른 데로 좀 가시지. 지하에서 3층으로 올라오는 게 뭐예요?”“왜? 좋잖아, 작업하기도 편하고.”
“…….”
“건물주 할아버지가 두 개 쓰면 대폭 할인해 주신다고 했어.”
같은 건물 3층에 사무실을 낸 이유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다혜는 괜스레 입을 삐쭉거렸다.
박 대표는 친한 사람들만 불러서 간단하게 개업식을 했다. 시장에서 떡과 전과 편육을 사 와서 한쪽 편에 음료수와 함께 펼쳐 놓았다.
이 실장은 돼지 코에 돈을 꽂아야 한다며 돼지머리를 사 오겠다고 했지만 박 대표는 그건 자신의 스타일에 안 맞는다고 극구 반대했다.
* * *
수철은 학원을 등록해서 운전 연습을 시작했다.
호주에서 작업하다 바람이 쐬고 싶으면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지난번 공연 때 멋있는 해안 도로를 많이 봤다. 그때 수철은 다시 호주에 간다면 혼자 운전하며 여행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호주는 운전대가 반대로 있는 게 좀 걱정이지만 그래도 면허를 따서 가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집중적으로 영어 공부도 시작했다.
그동안 틈틈이 공부해서 기본적인 소통은 할 수 있게 됐지만 그래도 남은 시간 동안 영어 공부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어설픈 영어 실력이지만 발음 교정에도 신경 썼다. 호주의 발음은 영국이나 미국과는 달라서 영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로 들릴 때가 많았다. 지난번 방문 때 그랬다.
수철은 영준이 형에게 호주 사람을 소개받아서 매일 한 시간씩 대화를 시작했다. 영어 능력도 발전시키고 발음도 교정했다.
“영국도 발음이 터프하지만 호주는 더해.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다니까. 하하.”
영준이 형의 말대로 호주의 발음은 터프했다.
생각해 보니 제시와 호주 멤버들의 발음은 정통 호주식 발음이 아니었다.
공연하면서 각국의 사람을 만나서 그런 거 같았다.
* * *
수철이 한창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박 대표는 이 차장을 만났다.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이번엔 막걸리집이 아니라 호프집에 마주 앉았다.
“시기를 맞추지 않겠다고?”
한국어 버전을 천천히 발매하겠다는 얘기에 박 대표는 소시지와 야채를 동시에 집다가 젓가락질을 멈췄다.
“네, 외국에서의 반응을 보면서 진행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이에요. 물론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돌다리를 두드려 보며 건너겠다는 거죠. 원래 회사가 그렇잖아요?”“그래,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렇게 해야지. 너무 약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하하.”
하고 싶어서 군침을 흘릴 땐 언제고. 서두르지 않겠다는 말이 언밸런스하게 들렸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닌데, 좀 망설이는 분위기가 있어요. 지난번 성과가 빈약해서요. 제대로 서포트하려면 뭔가 굵직한 게 필요하잖아요. 딱히 협업이라고 말하기도 좀 애매하고.”
이 차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드라마 차기작이라도 수철이 음악을 맡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제가 회사에도 면이 좀 서고.”
이 차장은 못내 아쉬운 눈치를 보였다. 하지만 박 대표는 바로 말을 끊었다. 지난 얘기를 다시 꺼내려고 나온 자리가 아니다.
“아쉽지만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내가 하라고 해서 할 녀석도 아니고.”“네, 알아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평소 쿨한 이 차장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회사에서 꽤 압박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박 대표가 얼굴을 내밀었다.
“대신 이건 어때?”
“……?”
“수철의 앨범을 한 장 제작해 보는 게.”“네? 그렇게만 되면 최고죠. 한방에 완전 게임 끝이죠. 그런데.”
이 차장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가 금세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수철은 무조건 형님 회사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던데요?”“알고 있어. 그래도 내가 수철과 진지하게 얘기를 해 볼게. 대신 조건이 있어.”
“어떤?”
이 차장은 궁금함에 박 대표와 눈을 맞췄다. 박 대표는 얼굴을 더 가까이 붙였다.
“금별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서 밀어줘. 수철이 단박에 올라설 수 있게.”
“……!”
순간, 이 차장의 눈이 커졌다.
금별기획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달라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둘은 깜빡이지도 않고 한동안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말을 한 사람도 말을 들은 사람도 비장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이 차장은 놀란 표정을 감추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이니까 가능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차 다시 물었다.
“형님이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계신 거죠?”
“당연하지.”
박 대표는 확고한 눈빛으로 끄덕였다.
“수철은 가수나 배우가 아니라서 음악만으로는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모든 컨텐츠를 다 돌려야 해요. 영상은 말할 것도 없고, 자잘한 캐릭터 사업까지요.”“바로 그 말을 한 거야.”
박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 차장은 박 대표의 어마무시한 말에 눈싸움하듯이 쳐다봤다.
“…….”
“…….”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박 대표는 이미 앞날을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머뭇하다 다시 입을 뗐다.
“만약에 한다면 시기는 언제쯤으로 생각하세요?”“길지 않게, 2년 안에.”“가능하겠어요? 수철이 허락할까요?”“쉽게 생각해, 수철은 디데이 뮤직에서 앨범을 발매할 거고. 디데이 뮤직은 그 앨범을 금별에 제안하는 거지. 일종의 위탁 형식으로.”
“……!”
허공을 떠다니던 이야기가 현실로 내려왔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자책이 들었다.
박 대표와의 친분을 떠나서 회사들 사이에서는 쉽게 벌어지는 일인데.
깜빡하고 있었다.
“수철에게도 미리 설명해 줄 거니까 그 부분은 우려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형님.”
“응?”
한가지 잊고 있었다.
“2년이면 수철은 이미 톱스타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요? 우리가 관여하지 않아도 말이에요.”
“…….”
박 대표는 대꾸 없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차장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흐름이 그렇잖아요? 이미 ECM도 그걸 증명해 보였고요. 앞으로 만들 앨범을 ECM하고만 해도 수철은 쭉 뻗은 고속도로 같은데요?”
“알아.”
박 대표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차장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네? 알아요?”
“그래, 우리가 뭘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될 거야.”
“그런데 왜?”
박 대표의 계속되는 반전에 이 차장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걸 알면서 왜 제안하냐고?”
“네.”
박 대표는 빙그레 웃다가 이내 묘한 미소를 띠었다.
“금별은 ECM이 못 하는 걸 할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