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마지막 연주
“아시아.”
“……!”
순간, 이 차장은 소름이 확 올라왔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고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수철의 앨범을 제안한 건 우발적으로 툭 튀어나온 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충분히 준비한 생각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처음부터 박 대표는 이 그림을 그리고 수철에게 금별을 추천했을지 모른다.
박 대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차장의 눈동자가 더 빨라졌다. 어떻게 한 개인이 거대한 회사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그 중심엔 수철이 있었다.
이 차장의 모습을 바라보던 박 대표가 툭 내뱉듯이 물었다.
“하린이도 그 방향 아니야?”
“그게 무슨?”
“하린이도 그쪽으로 가는 거잖아? 월드 스타.”
하린이에게 적용된 시스템을 수철에게도 돌리면 되지 않냐는 말로 들렸다.
“수철과 하린은 방향만 같을 뿐이지 디테일은 많이 다르죠.”“그래, 수철에게 더 디테일한 시스템을 붙여야겠지.”
“잘 아시네요.”
“그런데 내 말은 이미 비슷한 시스템이 있으니까 그걸 수정 보완하면 되지 않냐는 뜻이야.”
박 대표는 한발 더 나아가 하린이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고 문제점이 생기면 수정 보완해서 수철의 앨범에 더 퍼펙트하게 적용하라는 말이었다.
하린은 가수를 넘어 금별이 야심 차게 밀고 있는 하나의 컨텐츠다. 하지만 수철은 금별의 사람이 아니다.
이 차장은 박 대표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표는 이런 이 차장의 생각을 읽었는지 빠르게 몸을 붙였다.
“내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겠지만, 하나의 프로젝트로만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않아?”
사적인 감정은 내려놓고 업무적으로, 프로젝트만 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차장은 반발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형님, 수철과 하린은 출발부터가 많이 다릅니다. 수철은 혼자서도 뚫고 나갈 수 있지만 하린이는 그럴 수가 없어요. 우리가 가꾸고 성장시켜야 해요. 프로젝트를 하더라도 우리가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건 당연히 하린이죠. 어디 소속이냐를 떠나서요.”
맞는 말이다. 이 차장이 흥분해서 말했지만 정확한 얘기다.
박 대표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화의 흐름을 위해 한발 물러났다.
“미안, 내가 그 부분을 간과했네. 내 말이 좀 지나쳤어.”
박 대표가 쿨하게 인정하자 이 차장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수철과 하린이의 방향이 비슷하다고 해도 하린이는 가수예요. 힘을 싣는 건 사실이지만 모든 시스템을 돌려서 총력을 기울이는 건 아니에요.”
“…….”
“그런데 형님은 수철에게 그걸 바라시는 거잖아요, 모든 시스템을 돌려서 총력을 기울이는.”
“…….”
박 대표는 대꾸 없이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다는 뜻이었다.
“제가 아까 다시 여쭤봤잖아요. 형님이 말씀하신 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냐고요. 형님의 말씀은 수철을 시대의 아이콘이나 하나의 문화로 만들자는 거예요.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맞아, 바로 그 뜻이야.”
“네?”
박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자 이 차장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박 대표는 시크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거기는 문화 만드는 곳이잖아.”
“…….”
문화를 만든다는 금별기획의 슬로건을 꺼내 붙였다.
“잘 생각해 봐.”
“뭘요?”
“수철이 과연 불가능할까?”
“……?”
“위로 올려놓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수철이 알아서 끌고 갈 텐데?”
“……!”
“내가 보기엔 여기저기서 무조건 달려들 거 같아. 한번 만들어만 놓으면 그다음부터는 떨어지는 꿀에 입만 벌리면 되잖아?”
“……!!”
한 번만 올려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수철이 만든 컨텐츠가 알아서 끌고 간다는 말이었다. 얼굴을 내놓고 활동하는 연예인이 아니라서 리스크도 적다. 그러니까 서두르지 않으면 외국의 다른 회사들이 눈독 들이고 달려들 거라는 말이었다.
이 차장은 생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형님, 일단 이 얘기는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거로 하죠.”“그래, 나도 이야기할 데가 없으니까.”“쉽게 여기서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 형님이랑 저랑 계속 부딪치면서 구체화해 보자고요.”
“바라는 바야.”
박 대표는 미소를 지으며 생맥주잔을 들어 이 차장과 부딪쳤다.
생맥주를 들이켜는 둘의 표정이 상반됐다.
박 대표는 오래 묵은 이야기를 꺼내 놔서 시원한 얼굴이었고, 반대로 이 차장은 생각이 더 많아졌다. 잘만 하면 이 차장이 대박 프로젝트의 중심에 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얘기가 일단락되자 둘은 편하게 남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분위기도 아까와는 다르게 건배도 자주 하고, 노가리도 뜯었다.
“비자는 어떻게 됐어?”“아, 그건 문제없을 거 같아요. 호주에 있는 관계사에서 예술인 비자로 초청하기로 했어요.”
“잘됐네.”
“네, 호주에서 공연하고 촬영하는 조건이 붙긴 했는데 그건 크게 신경 안 써도 돼요. 형식적인 거니까요. 어쨌든 2년간은 편하게 있어도 돼요.”
“그래, 고마워.”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이 차장은 노가리를 한입 뜯어서 질겅 씹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크게 신경 안 써도 될 거 같아요. 그동안 수철의 경력도 있고, 호주에서 수철의 음악이 한창 뜨거운데 문제가 생기겠어요?”“그렇긴 한데 비자는 또 다른 문제니까.”
이 차장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별걱정 안 해도 돼요. 형님 말씀대로 이 정도면 나라도 영주권 주겠어요.”“하하, 그렇긴 하지.”
박 대표는 동의한다며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수철에게 그렇게 전할게.”“네, 승인이 나는 데 두 달 정도 걸린다니까 서두르라고 전해 주세요.”“그래, 알았어. 두 달이면 수철이 계획한 날짜랑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지겠군.”
박 대표는 끄덕이고는 잔을 들었다.
“자, 한 잔 하지.”
“네.”
이 차장은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켜고 노가리의 가시를 발라서 일렬로 늘어놓았다.
“계속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왜 호주예요? 미국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고요?”“거기가 마음에 든대.”
뭐라 반박할 수 없는 가장 적합한 이유였다.
“지난번 연주 여행 갔을 때 호주의 자연에 푹 빠졌나 봐.”
“뮤지션답네요.”
이 차장은 부러운 눈치로 끄덕였다.
박 대표는 이 차장을 슬쩍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미국을 얘기해 봤었는데, 관심도 두지 않더라고.”
수익적인 면으로는 미국으로 가는 게 좋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미국이면 우리가 일하기 편하죠. 법인도 활성화되어 있고, 제휴 업체도 많으니까요.”
“그러니까.”
“호주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요. 지도만 봐도 혼자 뚝 떨어져서 덩그러니 말이에요. 덩치만 크지 인구도 별로 없고, 앨범 내고 활동하려면 영…….”
영 좋지 않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업무차 관계자들이 찾아가기에도 너무 멀다는 뜻이었다.
“나도 그 부분이 걸려서 얘기했었는데, 급한 사람이 찾아오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 하하.”“하하, 배짱이 대단하네요.”
이 차장은 박 대표를 따라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틀린 말은 아니죠. 돈 벌고 싶은 사람이 찾아와야죠.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하하.”“얘기가 그렇게 되나? 하하.”“암튼 그 대표님에 그 뮤지션이네요. 가만히 보면 형님이랑 수철은 은근 닮은 구석이 있어요.”
“뭐가?”
“자유로운 영혼이잖아요.”“하하. 듣기 싫은 말은 아니네.”
박 대표도 노가리 한 마리를 입에 물고 말을 이었다.
“수철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요?”
“네가 내 소속이라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어. 하하.”
“하하.”
박 대표는 장난스럽게 웃었고, 이 차장은 못 말리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 * *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수철은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제주도로 가서 동민이와 며칠의 시간을 보냈다. 성산 일출봉을 올라가고 한라산을 다녀왔다. 스쿠터를 타고 제주도도 한 바퀴 돌았다. 오랜만에 둘은 제주 밤바다를 보며 밤새 지난 추억을 나눴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수철은 마이클과 은주를 만났다. 맥주를 마시며 그동안의 근황을 들었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 둘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짬을 내서 도어스에도 갔다. 수철은 사장 형에게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오랜만에 음악을 신청해서 듣고, 칵테일도 몇 잔 마셨다. 그곳에 앉아 있으니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혜와 박 대표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여기 도어스니까.
친구들을 다 만나고 나서는 할아버지 3인방을 합주실로 초대했다.
마지막 연주 들려주기 위해서다.
수철은 평소와 사뭇 다른 느낌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건반을 누르는 손끝 하나하나에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평소에 보이던 스피드와 경쾌함은 사라지고, 손끝으로 깊은 울림을 만들어 냈다.
할아버지 3인방은 긴 의자에 쪼르륵 일렬로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합주실에 견학을 온 아이들 같았다.
수철은 계속 건반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았다.
연주에 귀를 기울이던 정 선생 할아버지가 속삭였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그러게,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하는 건가?”“맞아, 오늘 연주가 딱 그런 느낌이야.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할아버지들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얼마 후, 20분가량의 연주를 마치고 수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짧았나요?”
수철이 돌아보며 묻자, 할아버지들은 멀뚱거렸다.
“짧은 것보다 느낌이 좀…….”
그 말에 수철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역시 할아버지들이랑 저는 통하는 게 있어요.”
고 선생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어? 느낌이 싸한데?”“하하, 무슨 일은 아니고요. 한동안 연주를 못 들려드릴 거 같아요.”
“왜?”
“어디 좀 갔다 올 건데, 오래 걸릴 거 같아요. 나중에 돌아와서 또 들려드릴게요.”
그 말에 할아버지들의 기색이 안 좋아졌다.
“어디 가는데?”
“멀리요.”
“비행기 타고?”
“네.”
할아버지들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수철은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대신 오늘은 특별하게 신청곡을 하나씩 연주해 드릴게요.”
그 말에도 할아버지들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싫으시면 여기서 끝내고요.”
수철이 재촉하자 할아버지들은 마지못해 상의하고는 한 곡씩 신청했다. 신청곡은 모두 수철의 ‘ABYSS’ 앨범에 담겨 있는 곡이었다.
수철은 바로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메인 테마 16마디를 연주하고는 곧바로 변주해서 멜로디 라인을 바꿔 나갔다. 그리고 다시 그 곡을 즉흥적으로 풀어서 연주했다.
할아버지들은 긴 의자에 일렬로 앉아 조용히 음악을 감상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음악에 집중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연주에 맞춰 무릎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표정은 숙연했다.
“오늘은 제가 저녁도 사 드릴게요.”
연주가 끝나고 수철은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근처 시장으로 향했다. 전집으로 모시고 가서 할아버지들이 좋아하는 전을 골라 모듬전을 만들었다. 막걸리를 따라 드리고 음식을 먹기 좋게 접시에 담아서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는 할아버지들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평소 장난스러운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정 선생 할아버지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오늘 연주는 다른 날보다 더 깊고 심오했어.”
수철은 빙긋 웃었다. 특별히 다르지 않았는데 괜한 느낌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로 가는데?”
묵묵히 있던 신 선생 할아버지가 물었다.
“오시게요?”
“갈 수도 있지.”
“하하.”
“말해 봐. 어딘데?”
“호주요.”
“호주? 에이, 난 또!”
“……?”
신 선생 할아버지가 갑자기 피식 웃으며 몸을 세웠다.
수철은 갸웃하며 바라봤다.
“호주는 내가 자주 가는 나라야. 호주랑 나랑 친해.”
“친해요?”
“그래, 우리나라 추울 때마다 한 번씩 가. 사우나 하는 거처럼 말이야. 올겨울에도 갈 거야.”
그 말에 할아버지들은 서로 번갈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는 수철에게 어디에 머물 것인지를 물었다. 수철은 모른다고 했다. 할아버지들은 주소가 정해지면 꼭 문자를 보내라고 했다. 수철은 한곳에 머물지 않을 거라서 주소가 없을 거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들은 못 믿는 눈치였다.
“인제 그만 들어가셔야죠.”
수철은 막걸리 한 잔 더 하고 싶다는 할아버지들의 등을 떠밀어 보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이별을 했다. 어쨌든 마지막 연주를 들려드렸으니 마음은 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