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41화 (141/239)

#141화. 설렘의 공기

“나 어제 ‘사랑은 익스트림’에 나왔던 여배우 봤어. 화면으로 볼 때보다 훨씬 말랐더라고. 그리고…….”

다혜는 방송국에서 누굴 봤고, 라디오 프로에선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떠들었다.

수철의 분위기가 어떻고, 반응이 어떻고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진 일을 신나게 얘기했다.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한참을 들었다.

“작가 언니들이 수철이 너 한 번만 섭외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

다혜는 수철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했어.”

“잘했어.”

수철은 끄덕였다.

“아 참, 그리고 은주도 만났어. 방송국 복도에서 만나니까 신기하더라고.”“하하. 재밌는 광경이네.”

“그러니까.”

다혜는 수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지 한참을 떠들었다.

수철은 다혜의 말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호주 간다고 했잖아.”

“응, 다음 주에.”

다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좀 오래 걸릴 거 같아.”

“오래? 얼마나?”

다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냅킨을 뽑아서 탁자 위에 놓았다.

“시간을 정해 놓은 건 아니지만 꽤 오래 걸릴 거야.”“얼마나 오래? 몇 달?”

냅킨 위에 수저를 놓으며 되물었다. 수철의 말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더?”

다혜가 그제야 하던 행동을 멈추고 수철과 눈을 맞췄다.

“응.”

“그럼 일 년?”

“그것보다 더.”

“더?”

다혜의 눈이 커졌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장난하는 거 아니지?”

수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혜는 수철의 표정을 보고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다혜는 당황했다. 탁자에 바짝 몸을 붙였다.

“말해 봐, 유학이라도 가는 거야? 아니지, 네가 유학을 왜? 그럼 이민? 그것도 아닐 테고. 그럼 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작업하고 녹음하고 여러 앨범을 해 보려고.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이제 시작하는 거야.”“아니, 그건 한국에서 해도 되잖아?”“많은 경험을 해 보고 싶어.”“그렇다고 해도 왜 그렇게 오래?”

다혜는 계속 당황했다. 얼굴에서 열이 나는지 볼을 문지르고 물을 마셨다.

“지금은 호주로 가지만 다른 나라도 가 볼 생각이야. 가능한 많이.”

“…….”

다혜에겐 그 말이 세계 여러 나라를 떠돌겠다는 말로 들렸다.

집시처럼.

다혜는 말이 없어졌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가 시작됐다. 수철이 밥을 사겠다고 장소를 말했을 때 다혜는 좋아하는 맛집이라며 폴짝 뛰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다혜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수철이 분위기를 바꾸려 장난을 걸었다.

“너, 설마 우는 거 아니지?”

“내가 왜?”

다혜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꾸를 했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수철이 떠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둘은 큰 대화 없이 식사를 마쳤다. 사람들이 바글대는 맛집이었는데 둘은 조용했다.

“줄 게 있어.”

밥을 먹고 나와서 수철은 줄 게 있다면 다혜를 작업실로 이끌었다.

* * *

“와, 이게 뭐야?”

우울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다혜의 눈이 커졌다.

수철은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뭐긴 뭐야, 선물이지.”

수철이 내민 건 쉽게 보기 힘든 오래된 서양의 아코디언이었다. 수철은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다가 이태원의 한 앤틱(Antique) 가게 유리창에서 아코디언을 발견했다. 특이하게 생긴 게 한눈에도 귀중하다는 게 느껴졌다. 소장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혜가 기뻐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수철은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아코디언을 샀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것이 있어서 박 대표에게 줄 생각으로 몇 개를 더 샀다.

다혜는 아코디언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어깨에 메고 건반을 눌러봤다. 고풍스럽게 생긴 외형답게 울려 나오는 소리도 중후했다. 오랜 역사가 묻어 있는 거 같았다.

“와! 진짜 맘에 든다. 딱 내 스타일이야!”

다혜는 입이 귀에 걸릴 듯이 좋아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좋은…….”

다혜는 왜 갑자기 선물이냐며 물어보려다 멈췄다.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수철이 떠난다는 말이 떠올라 고개를 들어 수철을 봤다.

다혜의 시선이 먹먹해졌다.

이번엔 정말 눈가에 눈물이라도 맺힐 거 같았다.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아서 더 그런 거 같았다.

“너 진짜 왜 그래? 안 돌아올 사람처럼.”“무슨 말이야? 안 돌아오긴.”

수철은 아니라고 했지만, 다혜는 못 믿는 눈치였다. 수철이 명확하게 못을 박았다.

“여기가 내 집이야. 내가 어떻게 안 돌아와? 엄마 아빠도 여기 계신데.”

다혜는 잠시 멈칫했다가 해맑게 웃었다.

“그렇지?”

“그럼.”

“알았어, 선물 고마워. 잘 쓸게. 그리고 내 선물은 네가 돌아올 때 줄게. 공항에서. 기대해.”

“알았어.”

* * *

수철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번 일정이 길어질 거 같다는 얘기를 전했다.

김명석과는 돈가스 맛집을 한 번 더 갔고, 이 실장에겐 고급 명함 케이스를 선물로 건넸다.

하린은 따로 연락하기가 그래서 생략했고, 하준과는 차를 마셨다. 하준에겐 달랑 선물만 주고 오래 걸릴 거라는 말만 하기가 그랬다.

하준에겐 수철이 눈여겨보고 있던 마이크를 선물했다.

“선물은 내가 해야 하는데. 어쨌든 정말 고마워, 소중하게 잘 쓸게.”

하준은 선물을 받아 들고 무척 기뻐했다.

수철의 얘기를 듣고 잠시 어두워졌지만 금방 표정을 바꾸고 잘 다녀오라고 응원해 줬다.

“화이팅! 국위 선양 열심히 하고!”“하하, 네. 시간 나면 놀러 와요, 형.”“당연히 가야지. 이번 활동 끝나면 첫 여행지로 너한테 먼저 갈 거야.”“좋은 생각이에요.”

* * *

수철은 마지막으로 작업실 정리를 시작했다.

필요한 것들만 집으로 옮겨 놓고, 자잘한 것들은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

노트북을 챙기고, 손때가 묻은 마스터 건반과 음악프로그램, 그리고 그간 작업물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따로 챙겼다.

호주엔 그것만 가져갈 생각이다.

나머지 장비는 호주에서 구매하면 된다.

그 외에 보관이 필요한 중요한 것들은 박 대표에게 맡기고, 자그마한 악기들은 다혜에게 줬다.

* * *

“이제 자주 못 올 거야. 한동안은……. 괜찮지?”

수철은 엄마 아빠를 보러 가서 솔직히 얘기했다.

“엄마 아빠도 그걸 바라잖아.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 맞지?”

수철은 납골당 앞에서 엄마 아빠의 사진을 보며 한참을 중얼거렸다.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부모님의 사진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다음에 또 올게.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보기 좋을 거야. 약속할게. 그때까지 잘 있어.”

수철은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엄마 아빠가 자신을 응원해 줄 거라고.

하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 * *

“이게 무슨 곡이야?”

어쩌다 보니 박 대표에겐 맨 마지막에 선물을 주게 됐다. 박 대표의 선물은 한가지가 아니어서 우선 악보부터 내밀었다.

박 대표는 신기한 눈으로 악보를 넘겨봤다.

“생각나서 만들어 봤어요. 선물이에요.”“선물? 네가 나한테?”“네, 쌤이 좋아할 만한 스윙 재즈곡이에요. 그리고 이건…….”

수철은 시디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또 뭐야?”

“피아노 연주곡이에요.”“이것도 선물이야?”

“네. 나중에 한번 들어 보세요.”

악보로 내민 곡은 얼마 전에 박 대표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만든 곡이고, 시디에 담긴 연주곡은 영준이 형과 영국 공연 중에 만든 곡이었다.

그동안 선물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주지 못했다.

한 번에 두 곡을 선물 받은 박 대표는 뭐라 기분을 표현하지 못하고 배시시 웃음만 흘렸다.

“악보는 어떤 음악인지 알겠고. 시디엔 어떤 음악이 들었을까?”

박 대표는 악보를 내려놓고 시디플레이어에 시디를 밀어 넣었다.

곧바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피아노 선율이 평소에 듣던 수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많이 달랐다.

그때는 런던의 비 오는 밤이었다. 수철은 호텔 창가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우연히 박 대표가 떠올랐다.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아저씨를 보는 순간 그랬다. 왜 그 아저씨도, 박 대표도 외롭게 보였을까. 수철은 두 아저씨 모두 비를 맞지 않길 바랐다.

그 기분을 음악에 담았다.

멜로디를 기억해 놨다가 다음 날 합주실에서 즉흥적으로 녹음했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마이크를 대고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를 받았다. 그래서 사운드는 잡음이 섞여 있고 거칠었다. 하지만 박 대표의 귀에는 그래서 더 운치 있게 들렸다.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섞인 오래된 LP판을 듣는 기분이었다.

“미완성곡이네?”

눈을 감고 선율을 감상하던 박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음악이 마무리 없이 계속 이어지다가 소리만 줄어들며 끝이 났다.

“엔딩은 쌤이 해 주세요.”

수철은 그날, 음악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아니, 엔딩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기분이 그랬다. 계속 진행으로 남겨 놓고 싶었다.

“오호, 그럼 이 곡은 내 선물이니까 내가 맘대로 해도 되는 거야?”

“그럼요.”

“가사도 붙이고 편곡도 하고?”“네, 이제 쌤 곡이니까 맘대로 하세요.”“오케이, 최고의 선물이네. 너한테 음악 선물을 다 받고. 베리 땡큐!”

박 대표는 한 손엔 악보를 한 손엔 시디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바로 표정을 바꿔 장난스레 말을 얹었다.

“내 생각이 나서 만든 거야?”“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시간 나서 만들어 봤어요.”“하하, 녀석.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

“암튼 고맙다. 이런 선물을 다 받아 보고.”

이번엔 수철이 장난을 걸었다.

“너무 감동하지는 마세요. 쌤이 우시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하하. 녀석, 확 울어 버릴까 보다.”

“하하.”

수철은 옆에 있는 박스를 내밀었다.

“이것도 쌤 거예요.”

“이것도?”

박 대표는 아까부터 박스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다.

수철이 힘들게 박스를 들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서둘러 수철이 내민 박스의 뚜껑을 땄다.

“아니, 이게 뭐야?”

박 대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래된 축음기가 들어 있었다.

수철은 다혜의 아코디언을 사면서 오래된 엔틱 축음기도 같이 구입했다.

축음기 위에는 나팔꽃 모양의 스피커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요.”

수철은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박 대표에게 세운상가까지 가서 구매한 LP판도 내밀었다. 모두 박 대표가 학창 시절 좋아했던 음악들이었다.

박 대표는 선물과 수철을 번갈아 보며 입이 귀에 걸렸다. 금방이라도 껴안을 자세였다. 수철은 슬쩍 한걸음 뒤로 물러놨다.

“살다 살다 이런 날도 다 오네?”

박 대표는 상상도 못 했었다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수철은 박 대표의 감탄을 그만 보고 싶어서 서둘러 호주머니에서 마지막 선물을 꺼내 내밀었다.

손목시계였다.

3명의 뮤지션을 소속으로 둔 대표인데 멋들어진 손목시계 하나는 있어야 할 거 같았다.

박 대표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시계였다.

어쩌다 보니 선물이 많아졌다. 원래는 곡과 시계였는데, 축음기가 추가된 것이다.

박 대표는 입을 벌린 채 시계를 차 보며 좋아서 말은 못 하고 끅끅댔다.

수철은 너무 많은 선물을 건네다 보니 왠지 좀 뻘쭘했다.

“와, 이게 다 내 선물 맞아?”

박 대표는 선물을 한곳에 모아 놓고 탄성을 질렀다.

“왠지 평생 줄 거 한 번에 다 주는 거 같은데?”“하하. 그럴 수도요.”

수철은 이제 홀가분해졌다. 줄 선물을 다 줬다.

* * *

“마지막 날인데 혼자서 저녁 먹는 건 좀 아니지.”

수철은 마지막 날 박 대표의 제안으로 다혜와 셋이 오랜만에 드라이브하고 저녁을 먹은 후, 헤이리 마을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

어쩌다 보니 이별하는 우울한 분위기가 잠깐 있었지만, 다혜는 잘 참아 넘겼다. 금세 웃음을 보였다.

수철은 지금 같이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3총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혜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 놀러 가면 가이드해 주는 거야?”“설마 나한테 그걸 바라는 거야?”

수철은 다혜에게 쓸데없는 기대를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대신 악기 들고 와.”

“악기?”

“그래, 동전 통 놓고 버스킹 해서 여행 경비 모아야지. 호주엔 그런 사람들 많아.”

그 말에 다혜의 표정이 환해졌다.

“알았어, 둘이서 버스킹 하면서 호주 일주 한번 하자.”“콜! 그런데 그렇게 하면 시간이 얼마 걸리는 줄 알아?”“얼마나 걸리는데?”

“한 20년 걸릴걸?”

“뭐?”

다혜는 황당한 얼굴로 빤히 쳐다봤다.

“못 믿겠으면 지도 찾아봐.”

마지막 밤은 그렇게 셋이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보냈다.

몇 잔의 커피와 함께.

* * *

“잘 갔다 와라. 올 때 선물 사 오고.”

“또요?”

“아니, 그래도 기념으로 뭐 하나.”“알았어요. 뭐 사 올까요?”

“캥거루?”

“캥거루요?”

“그래. 이번에는 열쇠고리 말고, 진짜로 한 마리 데리고 와. 한번 키워 볼게.”“물어는 볼게요, 한국 가겠냐고요.”“하하! 그래, 음악 잘하는 녀석으로 데리고 와. 캥거루면 드럼 좀 칠 수 있겠는데?”

이제 진짜 헤어질 때가 됐다.

수철은 다혜와 먼저 포옹을 했다.

“밥 잘 챙겨 먹고, 건강히 돌아와.”“그래, 너도 잘 지내고 있어. 꼭 놀러 오고.”

“알았어.”

그리고 박 대표와 포옹을 했다.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면 얘기해. 금방 날아갈 테니까.”“네, 쌤도 제가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수철은 한 번 더 포옹한 후 등을 돌렸다. 박 대표와 다혜는 수철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얼마 후 수철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비행기는 시드니 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수철은 장거리 비행을 우려했던 것과 달리 푹 잤다.

와인 몇 잔 마시고 눈을 붙이라는 박 대표의 조언이 잘 먹혔다.

비행기에서 나오자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파란 하늘이 보였다.

상쾌하다.

수철은 설렘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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