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본다이 비치
존, 마크, 잭이었다.
수철이 시드니에 온걸 알고 있는데 연락이 없자, 먼저 전화하고 지리를 잘 모르는 수철을 배려해 호텔까지 찾아왔다.
수철도 연락할 생각이었지만 세팅하다 보니 좀 늦어졌다.
“헤이!”
수철이 다가가기가 무섭게 한 명씩 돌아가며 격하게 포옹했다.
마지막으로 포옹을 한 마크는 양팔로 수철을 잡고는 탄성을 내뱉었다.
“와! 너 유명해지더니 이제 이런 곳에서 지내는구나?”
신기한 얼굴로 호텔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둘러봤다.
넓은 로비와 천장에 달린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갖가지 문양이 박힌 빛나는 대리석 바닥.
정장 차림의 비즈니스맨들이 두 갈래로 휘어진 큼지막한 대리석 계단을 오르내리고.
반면에 존, 마크, 잭은 낡은 청바지에 얼굴이 다 지워진 어느 뮤지션의 모습이 새겨진 라운드 티.
한가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분위기.
바쁜 걸음의 비즈니스맨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곳에서 존, 마크, 잭은 이방인 같았다.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친구들은 공연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같은 복장이었다. 변화가 없는 날씨 탓인 거 같기도 하고, 패션엔 관심이 없는 거 같기도 했다. 그래도 큰 키에 덥수룩한 수염이 분위기를 만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여기 앞으로 지나다닌 적은 많지만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야.”“나도 그래. 어떤 사람들이 이런 곳에 머무는지 궁금했는데, 바로 수철이 너였구나.”
존과 잭도 두리번거리며 한마디씩 했다.
“아니야, 그런 거.”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구구절절 사연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이사할 때까지만 임시로 있을 거야.”
“이사?”
수철은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본다이 비치에 있는 하우스로 이사할 거란 얘기를 했다. 그곳에서 앨범 작업과 녹음을 마무리할 거라고 했다.
“와, 굿 뉴스네?”
친구들은 좋아했다. 하이파이브까지 했다. 친구들에겐 수철이 오래 머문다는 얘기가 기쁜 소식이었다.
“꼭 다시 돌아올 거라고 하더니, 약속을 지킨 거네?”“뭐, 그런 셈이지.”
* * *
노천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호텔은 분위기가 맞지 않아서 나가자고 했다.
“우린 네가 스케줄이 있어서 온 줄 알았어. 방송 출연이나 페스티벌 같은 거 말이야.”
친구들은 수철이 스케줄 때문에 온 줄 알고 있었다. 미리 이유를 말하지 않은 탓이었다.
“제시한테 얘기 못 들었어?”“제시? 그런 얘기 안 하던데? 그리고 제시랑 통화하기 어려워. 바빠서 말이야.”
제시가 바빠진 탓에 통화를 자주 못 하는 모양이었다. 잭은 지금 상황이 별로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시가 잘된 건 좋지만.
친구들은 수철도 제시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ABYSS 앨범이 엄청난 흥행을 했기 때문에 시드니에도 그 때문에 온 거로 생각한 것이다. 호주에서는 아직도 음악이 상위권에 머물고 있다.
수철은 말이 나온 김에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난 여기 없는 사람으로 해 줘.”
조용히 작업하러 온 거니까 여기 있는 것은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
편하게 지내고 싶다고 입조심을 부탁했다.
친구들도 알겠다며 끄덕였다.
“남들은 무조건 뉴욕으로 가는데 넌 정반대로 호주를 오다니, 이해 불능이야.”
잭은 좋으면서도 괜히 한마디 툭 던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호주에서 영국으로 갔다가 흥행하면 미국으로 가는 게 코스니까.
“난 여기가 좋아. 작업은 자기가 좋아하는 데서 해야지.”
수철도 툭 던지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존이 끼어들었다.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사실 우리도 너랑 같은 이유로 여기 있는 거야.”
“……?”
“너도 알다시피 우리 실력이면 뉴욕은 언제든지 갈 수 있잖아?”
존은 뉴욕에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거라고 했다. 실력은 충분하지만, 뉴욕은 공기가 안 좋아서 안 가는 거라고 했다. 잭과 마크는 그 말을 피식 웃어넘겼다.
“하긴, ECM이 초대해도 안 나타나는 용수철인데 뭐.”
친구들은 수철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었다.
한창 난리가 난 영국 음반사에서 초대해도 안 갔는데, 뉴욕을 안 가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수철, 오스트레일리아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친구들은 다시 한번 돌아가면서 수철과 손바닥을 부딪쳤다.
“수철, 너 우리랑도 프로젝트 앨범 한 장 해야 하는 거 아냐? 네가 영국 친구들을 선택했다는 말을 듣고 섭섭했어.”
존이 농담처럼 말하며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생각지도 못하게 엄청난 흥행을 하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더군다나 제시도 호주인이니까.
“영국 음반사에서 먼저 제안을 한 거야. 곡도 거기서 만든 거고.”
수철이 이유를 설명했다.
“하하! 수철, 신경 쓰지 마. 저 녀석 괜히 심술 나서 그런 거니까. 이미 영준한테 얘기 들었어. 미안해할 거 없어.”
마크가 툭 치면서 이해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장난스레 표정을 바꿔서 존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와도 한 장 해야지?”
“못 할 거 없지.”
“언제?”
“죽기 전에. 급할 거 없잖아?”
“…….”
수철은 앨범 얘기가 나온 김에 세션 얘기를 꺼냈다.
“다들 녹음하는 데 문제없지?”“응, 정확한 스케줄이 나왔어?”“4일 후에 이사하니까, 이사하고 7일 후. 그러니까 오늘부터 11일 후에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녹음실은?”
“맨리 R 스튜디오.”
“와, 거기 엄청 좋고 비싼데!”
잭은 그곳을 아는 눈치였다.
맨리 R 스튜디오는 맨리 비치라는 유명한 바닷가에 인접해 있다. 언덕 위에 있어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기가 막힌다고 소문난 녹음 스튜디오다. 수철도 사진으로만 보고 아직 가 보지는 못했다.
“확정된 거야?”
“응, 제시가 그곳에서 하길 원해.”“제시는 그때 없잖아?”“제시는 보컬 녹음할 때 들어올 거야. 이제 4주 남았네.”
수철은 제시가 들어오면 바로 보컬 녹음을 할 수 있게 미리 악기 녹음을 해 놓을 생각이다. 제시의 스케줄이 넉넉하지 않고, 수철도 빨리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어서다.
“이제 너희 얘기 좀 해 봐. 너희 일상은 어때?”“우린 뭐, 그때랑 달라진 게 없지. 각각 팀을 하면서 가끔은 같이 모여서 공연하고.”
존이 대표로 얘기했다.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얘기였다.
“난 시티 음악학교에서 야간에 파트타임 클래스 시니어 반을 가르치고 있어. 알바 하는 거지.”
마크는 큰 변화가 없다는 존의 대답이 밋밋하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은 조금 다르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 * *
“저기 보이는 곳이 오늘 공연할 곳이야.”
수철과 친구들은 마크를 따라 공연을 보러 왔다.
공연이 있어서 먼저 가야 한다는 마크를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기가 그랬다.
그래서 수철의 제안으로 다 같이 햄버거 하나씩 먹고 잭의 공연을 따라왔다. 공연도 보고, 맥주도 마시자고 의기투합했다.
공연하는 곳은 멀리 하버강이 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공연하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허름한 펍 같았다.
“밖에서는 저래 보여도 안은 달라. 소리가 잘 빠져서 듣기 좋아.”
외관은 허름하지만 시드니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있는 곳이라고 잭이 설명했다.
펍에 가까워지자 경쾌한 스네어 드럼 소리와 두꺼운 트럼본 소리가 들려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자 잭의 말대로 전통이 있어서인지 어둠 속에 많은 사람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잭과 존은 여기가 익숙해 보였다. 바로 가서 맥주 3병을 사 가지고 와서 수철에게 한 병 건넸다. 마크는 오늘같이 연주할 동료들에게로 가고, 나머지는 뒤에 서서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구경했다.
나이가 지긋한 재즈팀의 공연이 끝나고 얼마 후 다음팀이 무대에 올랐다. 연주자들이 악기를 매만지며 자리를 잡자, 느지막하게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황금색 펜더 기타를 메고 무대에 나타났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좀 많고, 아저씨라고 하기엔 좀 젊은 사람이었다.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서로 나지막이 템포를 주고받더니 곧바로 모든 악기가 동시에 연주를 시작했다.
블루스였다.
수철은 갸웃했다. 재즈 클럽에서 블루스라니.
흔한 광경이 아니다.
그런데 관중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가 연주를 시작하자 더 환호했다.
놀랍고 낯선 모습이었다.
이곳의 절반은 그의 연주를 들으러 온 사람들 같았다.
수철의 낌새를 눈치챈 존이 어깨를 붙여왔다.
“신기하지?”
“응.”
“나도 처음 봤을 때 그랬어. 재즈 클럽에 블루스 기타리스트라니.”
존은 자신도 놀랐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뿐.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무대 위의 그는 블루스로는 재즈 뮤지션과 같이 연주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깨고 있었다.
그의 연주는 사람들이 환호할 만했다. 블루스뿐만이 아니라 모든 장르를 넘나들었다. 락의 강렬함과 재즈의 수학적 스케일까지 블루스 안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거침이 없었다. 이팩터를 써 가며 갖가지 톤을 만들어 현란하게 즉흥연주로 내달렸다.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카타르시스가 뚝뚝 떨어졌다. 몇몇은 불뚝불뚝 감정이 솟아오르는지 리듬을 타며 격하게 몸을 흔들었고, 몇몇은 광적으로 좋아하며 환호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제 이해돼?”
존이 다시 어깨를 붙여 왔다. 여기 무대에 서는 이유를 이제 알겠냐는 뜻이었다. 수철은 시선을 기타리스트에게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수철? 네가 무대에 올라서 같이 한번 연주해 보는 게? 저 사람의 에너지를 꺾을 사람은 여기에서 너밖에 없을걸?”
존은 수철이 입조심하라는 당부를 잊고 위험한 농담을 던졌다.
수철은 피식 웃고 말았다.
계속 이어지는 곡에서도 그의 연주는 수철의 귀에 들어왔다.
그의 손가락엔 보통 사람과 다른 무언가가 실려 있었다. 흔히 말하는 교과서적인 연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길들지 않은 거친 야생마.
앞발을 높이 쳐들고 날뛰는 야생마.
그의 연주는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열광했다.
그의 무대가 끝나고 마크 팀이 무대에 올랐다. 마크의 콘트라베이스는 여전히 멋있었다. 그때보다 더 성장해 있었다. 손끝으로 튕기는 멜로디의 그루브는 정말 좋았다. 수철의 심장을 두드렸다. 마크가 최고의 연주자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마크는 자신의 팀과 함께 다가왔다. 잭과 존은 그들과 잘 아는 사이인지 편하게 인사를 나눴다. 마크는 수철에게 친구들을 소개했다. 수철의 말을 의식해서 한국에서 온 친구라고만 소개했다.
“너한테 한국인 친구가 있었어?”
멤버들이 의아해하며 물었지만, 마크는 공연하다가 만났다고만 대답했다. 특별한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같이 공연 다녔으니까 공연 다니면서 만났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철은 나중에 아까 그 기타리스트에 관해 물었다.
“그 사람, 여기서 자주 연주해?”“응, 시드니에선 꽤 유명한 블루스 연주자야. 우리가 보기에도 연주력이 대단한 사람이야.”
그는 이언이라고 불리는 싱가폴 사람이었다.
수철은 마크에게 얘기를 들으면서 다음에 세션으로 초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가 되면 같이 연주도 한번 같이해 보고 싶었다.
수철은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맥주를 마셨다. 몇 군데 펍을 옮겨 다니며 친구들이 소개하는 수제 맥주도 맛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아까 그 기타리스트가 다시 떠올랐다.
‘지미 헨드릭스와 많이 다르지만, 아마 사람들이 지미 헨드릭스를 처음 봤을 때 저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수철은 그런 생각을 하며 호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
수철은 럭셔리한 호텔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본다이 비치(Bondi Beach)에 있는 하우스로 이사했다.
2층에서 해변가를 내려다보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수철은 그날 저녁부터 매일 노을을 보고, 매일 밤 산책했다. 머릿속에 다양한 음악을 만들었다가 없앴다가를 반복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다녔다.
덕분에 비치에 놀러 온 여성들이 착각하기도 했다. 노천카페에 앉아 있다가 다가와 말을 걸고 전화번호를 물었다. 같이 사진 찍자고도 했다.
* * *
가사가 나왔다.
“완성본이야. 노래하면서 조금 수정할지도 몰라.”
제시는 바쁜 스케줄에도 가사를 완성해서 보내 왔다. 가사를 살펴본 수철은 의도를 잘 파악해 준 제시가 고마웠다.
이번 Intersection 앨범에 실릴 5곡은 곡명이 없다.
음악의 순서도 없다.
“제목 없이 가는 건 어떨까?”
수철이 처음 물었을 때 제시는 갸웃했다.
“제목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