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45화 (145/239)

#145화. 새삼스레

“출발할까?”

수철은 녹음 일정을 확정하고 계산을 치르기 위해 맨리에 있는 녹음실로 향했다.

마크와 잭은 공연 때문에 시드니를 벗어나 있어서 존과 둘이서 갔다.

“저긴가?”

‘맨리 R 레코딩 스튜디오’는 사진으로 볼 때보다 더 멋있었다. 천혜의 자연미를 자랑한다는 말이 맞았다. 스튜디오 주위의 배경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맨리 비치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스튜디오가 아니라 요새 같지 않아?”

스튜디오 건물도 독특했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스타일.

존의 말대로 요새 같았다. 전쟁이 나도 이곳에서 녹음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철은 스튜디오 안에 들어서며 스탭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의 안내를 받으며 내부를 둘러봤다.

내부는 외부와는 또 달랐다. 딱 녹음하기 좋게 환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소리를 흡수하게 설계되어 있는 벽도 전반적으로 밝았고, 조명도 그랬다. 여기서 우울한 분위기의 음악을 녹음하는 건 피해야 할 거 같았다.

느낌을 잡기 어려울 거 같았다.

“장비가 한국과 많이 다르네.”“그래? 한국은 어떤 장비를 쓰는데?”“한국은 여기보다 신형 장비를 많이 쓰지.”

스튜디오는 최첨단으로 설계했는데, 이곳에서 쓰는 녹음 장비들은 한국과 다르게 올드했다.

수철은 그게 신기했다.

녹음 콘솔도, 모니터에 떠 있는 프로그램도 심하게 말해서 구닥다리였다.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왜 이런 올드한 장비들을 쓰냐고 묻는 건 실례다. 그렇다고 존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존은 뭐가 이상한지 모르는 눈치였다. 존의 시각에서 이런 장비를 쓰는 건 당연하니까.

“여기는 사운드 디자인하는 방이에요.”

수철은 한국의 녹음실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공간에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사람들이 각각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만의 장비를 가지고 소리를 디자인하고 있었다. 영화 아니면 게임에 들어갈 음악을 만드는 것 같았다.

구관이 명관.

그것이 이유였다.

오래된 장비를 사용하는 건 자신의 손에 익었기 때문.

손에 익은 장비가 최고의 장비라는 단순한 이유인데, 너무 앞다투어 새로운 장비만 들여놓다 보니 그 단순한 논리를 까먹고 있었다.

수철은 피식 웃음이 났다.

‘외부는 시대를 앞서가며 상상 속에서나 꿈꿔 볼 것 같은 스튜디오인데, 안에서는 구닥다리라고 불리는 장비를 사용한다니.’

잠시 이런 생각을 한 것이 부끄러웠다.

외부도, 내부도, 장비도, 모두 최고의 소리를 만드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이분이 앨범 ‘Intersection’의 녹음을 진행해 줄 메인 엔지니어입니다.”

녹음실에는 여러 명의 스탭이 있었다. 어시스턴스(Assistance)로 보이는 엔지니어도 있었고, 헤드폰을 쓰고 믹싱에 집중하는 또 다른 엔지니어도 있었다. 녹음해서 결과물이 나오는 일련의 과정이 각각 세밀하게 분업화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에 집중하느라 수철과 존이 들어온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모두에게서 전문가의 포스가 풍겼다. 이들은 하나의 팀이 되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집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래서 시드니 최고의 녹음 스튜디오라고 하는 거군.’

수철은 사람들이 이곳 맨리 스튜디오의 이름만 꺼내도 엄지를 치켜세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튜디오 입구에 금박으로 박혀 있는 ‘맨리 R 레코딩 스튜디오’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제시가 이곳은 선택한 이유를 알았다.

이곳은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곳이다.

* * *

“악기들 사운드 체크 먼저 하겠습니다.”

이틀 후 녹음이 시작됐다. 존, 마크, 잭이 각자의 악기를 세팅하고 있을 때 스텝이 수철에게 다가왔다.

“일정 확인 좀 하겠습니다.”

“네.”

“오늘은 악기 녹음만 하실 거죠?”

“네.”

“보컬 녹음은 다다음 주고요?”

“네, 맞아요.”

“3일간 하실 거고요?”“이틀 걸릴 것 같지만 넉넉하게 그렇게 잡은 거예요.”“일찍 끝나면 페이백(payback)해 드릴게요.”

“네, 감사해요.”

“아, 그리고 오늘 바로 믹싱을 하실 거라고요? 악기 트랙만 먼저요?”“네, 맞아요. 악기 트랙을 우선 보내야 해서요.”“알겠습니다. 일정은 확인했고, 변동 사항이 생기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수철이 녹음을 서두르는 건 제시의 스케줄 때문이다. 제시가 시드니에 머무는 시간이 2주밖에 안 된다. 그마저도 방송과 공연 스케줄이 잡혀 있다. 그래서 녹음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 4일이다. 그동안에 같이 연습을 하고 녹음을 마쳐야 한다.

“수철, 시간을 다시 조율하는 건 어때?”

제시는 쫓기듯이 녹음하고 싶지 않다며 녹음을 조금 미루든지 영국에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었다. 하지만 수철은 충분히 가능하다며 제시를 안심시켰다. 수철은 더는 이 앨범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어서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대충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걱정하지 마, 충분히 가능해. 미리 악기 녹음 다 해서 보내 줄 테니까, 그거 들으면서 보컬 연습만 하고 와.”

수철은 제시가 연습만 해 오면 3, 4일이 아니라 2, 3일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제시는 불안해했지만 수철이 보기엔 그건 괜한 걱정이다.

“네가 오면 바로 녹음할 수 있게 미리 준비를 다 해 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만약에 녹음해 보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내가 영국으로 가든지 할게. 그러면 되겠지?”

제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넌 참.”

“참 뭐?”

“어떤 때는 텅 빈 것처럼 허술하고, 어떤 때는 컴퓨터처럼 너무 정확하고.”

제시는 고개를 저으며 푸념 투로 말을 덧붙였다.

“지금 상황이 너무 이상하지 않아?”

“뭐가?”

“같이 바빠야 하는데 나만 바쁘잖아.”

“…….”

“그렇잖아? 노래도 네가 하라고 했고, 가사도 네가 쓰라고 했는데.”

“…….”

“음악은 네가 다 만들고, 프로듀싱까지 다 했는데. 너도 조금은 바빠야 하는 거 아냐?”

수철은 말을 아꼈다.

제시가 생떼를 쓰는 것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괜히 속내를 말했다간 핀잔을 들을 거 같았다.

제시의 불평은 조금 더 이어졌다.

“이율배반 아니야?”

속으로 대꾸했다.

‘이율배반은 아니지.’

“네가 무슨 배트맨이야? 루팡이야? 왜 그렇게 숨어 다녀?”

‘베트맨? 루팡? 둘 중에 어떤 게 낫지?’

제시는 자신은 너무 유명해져서 거리를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인데, 자유로운 수철이 부럽다고 했다. 그래서 배신감도 든다고 했다. 자신을 밀어 놓고는 발을 쏙 뺀 거 같다는 투정도 했다.

“수철, 넌 역시 똑똑해.”

그 말로 푸념을 마무리 지었다.

남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살던 제시가 급작스런 인기 때문에 일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제시가 그러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뛰쳐나갈 수도 없다.

이젠 혼자가 아니라 팀도 있고, 에이전시도 있고, 매니저도 있으니까.

“지금 연주한 것 킵해 주시고, 다시 한번 갈게요.”

“네.”

녹음하는 분위기는 진지하다 못해 엄숙했다. 아무도 장난을 치거나 웃지 않았다. 삼엄한 느낌이 날 정도였다. 모두 신경을 집중하고 눈을 반짝였다.

녹음실 분위기 때문에 수철과 멤버들도 더 진지해졌다.

“12마디째 낯선 악기 나오는 부분이 좀 안 맞는 것 같은데, 그 부분 다시 한번 연주해 볼게요.”

존, 마크, 잭은 실력 있는 뮤지션답게 수철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빠르게 연주 트랙을 만들어 갔다.

“자, 한번 들어 볼까요?”

“네.”

역시 친구들의 연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연주가 귀에 착착 감겼다.

수철이 처음 생각했던 그림대로 악기들이 제자리를 찾아서 잘 안착했다. 수철이 만들어 놓았던 악기들과도 잘 어우러졌다.

수철은 이런 게 좋다.

연주자에게 많은 요구를 하지 않는 게.

작곡은 작곡자가, 연주는 연주자가.

수철이 좋아하는 말이다.

연주자에게서 자신이 생각 못 한 새로운 연주를 듣는 건 기쁜 일이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연주를 다 하는 것은 결코 즐겁지 않다.

“수고했어. 먼저 들어가.”“같이 안 갈 거야?”

“난 믹싱 좀 하고 갈게.”

“믹싱을 벌써?”

“제시에게 보내고 한국에도 보내야 하거든.”

* * *

친구들은 집으로 가지 않고 맨리 비치가에 모여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몰랐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수철의 의도가 명확하게 보이더라고. 너무 명확해서 놀랄 정도였어. 이런 거까지 예상한 걸까?”

마크가 얘기를 하다 말고 놀랍다는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모습을 둘러앉은 잭과 존이 빤히 바라봤다.

친구들은 바닷가 카페의 파라솔 아래 앉아서 긴 다리를 쭉 뻗고 있었다. 맨리까지 왔으니 바다를 보며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자는 생각에서였다.

마크는 고개를 젓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털이 잔뜩 난 팔뚝을 쓰다듬었다.

마크의 말을 잭이 이어받았다.

“난 놀랍기도 했지만 열 받기도 했어.”

그 말에 마크와 존의 시선이 잭에게 향했다.

“수철은 다 알면서도 적당히 했어.”

“적당히?”

“너희도 느끼지 않았어? 데모에 넣은 연주 말이야. 수철은 우릴 배려한 거겠지만 솔직히 좀 열 받더라고. 누구에게 지배당하는 것 같은 기분은 학생 때 이후로는 처음이야.”

잭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호주의 강한 햇볕에 살짝 달아오른 볼이 더 빨갛게 보였다. 얼음 컵을 들어 볼에 대고는 말을 이었다.

“자기가 정해 주는 선을 넘어가지 말라는 거잖아. 마치 표지판을 보고 길대로만 따라가라는 거처럼 말이야.”

연주자에겐 열 받는 얘기다.

“대충해도 되는 부분은 그냥 흘려넘기고. 중요한 부분은 앞에 나서서 지휘자처럼 지휘한 거지.”

존과 마크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잭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자신들도 느꼈던 부분이다.

“수철이 정해 주는 대로 맞춰서 연주해야 하는 기분이 들어서 열 받았었어.”

그 말에 오랫동안 잭의 말을 듣던 마크가 입을 뗐다.

“수철의 의도가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잖아?”“알지, 내 말은 처음에 그랬다는 거야. 수철은 물론 창작자로서 최대한 좋은 연주를 끌어내려고 그렇게 한 거겠지. 우릴 배려해서 핵심만 챙기고, 나머진 비워 둔 거고. 그런데 우리가 보통 그렇게 세션하지는 않잖아?”

잭이 마크에게 되묻자, 마크도 그 말에는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보통은 음악 분위기만 알려 주고 연주자의 연주에 의존한다. 그래서 그만큼의 가치를 가진 연주자를 높이 사며, 비싼 돈을 지불한다. 그런데 수철은 최고의 세션비를 주면서도 가이드를 다 잡아 놓았다. 그래서 잭은 이럴 거면 혼자 하지, 자신들에게 왜 부탁했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처음에 그랬다는 얘기다.

“물론 수철이 우리를 잘 알아서 그랬다는 거 알아. 내 말은, 그냥 처음에 잠깐 삐뚤어졌었다는 얘기를 한 거야.”

잭은 뒤늦게 멋쩍은 웃음으로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열 받은 건 그렇다 치고, 놀란 건 뭐야?”

마크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대충하면서도 핵심 디테일은 다 챙겼다는 거야. 들을수록 소름이 돋더라고. 그 부분을 몇 번 들어 보니까 수철이 처음에 얘기했던 의도가 선명하게 그려지더라고. 말은 놀랐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했어. 그걸 알고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으니까.”

잭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볼에 얼음 컵을 댄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말없이 앉아 있던 존이 의자를 바로 잡으며 몸을 붙였다.

“수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연주 테크닉은 우리가 낫잖아?”

존은 당연히 동의할 거라고 몸을 세우며 말했는데 예상했던 반응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다들 오히려 그 말에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존은 뻘쭘해졌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뒷머리를 문질렀다.

마크가 뒤늦게 대꾸했다.

“수철이 그것까지 다 해 버리면 우리의 존재가 없어지지.”

냉정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진짜 놀랍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

“우리가 연주 여행도 같이 다니고 이번에 녹음도 같이했지만, 아직도 수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거야. 처음 연주할 때 놀라고, 공연하면서 계속 놀라고, 이번에 또 놀라고.”

벌건 대낮에 모두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난 사실 그날 잠을 못 잤어. 음악 듣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어떤?”

“내가 진짜 뮤지션 맞나 하는 그런 생각.”

마크는 대답하며 피식 웃었다.

“하하, 뭐?”

존도 그 말에 따라서 웃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난 수철처럼 저렇게 음악에 깊숙이 빠져들어 간 적이 언제였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그 말에 모두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파라솔 옆으로 내리쬐는 햇볕과는 상반됐다.

마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음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는 없었던 거 같아. 아니, 없었어.”

마크는 자신을 책망하듯 강한 눈빛을 보였다.

“그래서 이제 다시 옛날의 풋풋한 아마추어로 돌아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 앨범에 참여하면서 내가 느낀 점이야.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수철을 좀 따라다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어. 가끔은 친구로서, 또 가끔은 열 받게 하고 놀랍게 하는 선생으로 말이야. 하하.”“하하.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하. 나도.”

셋은 커피잔을 들어 부딪쳤다.

호주의 강한 햇빛이 이들이 앉아 있는 파라솔 주위를 내리쬐고 있었다. 덕분에 다리가 벌겋게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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