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47화 (147/239)

#147화. 바쁜 여가수

“준비됐어?”

“응.”

수철은 제시가 부스 안에 들어가 헤드폰을 쓰자 노래할 준비가 됐냐고 물었다. 제시는 머리를 끄덕였다. 수철이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반주 틀게.”

“오케이.”

제시는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반주가 시작되고 곧이어 제시의 노래가 시작됐다.

수철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노래가 시작되는 첫 소절부터 느낌이 좋았다. 호흡이 고르게 움직이며 빌리 홀리데이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소리가 안정적으로 뻗어 나왔다. 수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한 곡을 마친 제시가 수철을 봤다.

“반주 끊지 말고 계속 틀어 줘. 나머지 곡은 한 번에 쭉 다 불러 볼게.”

“괜찮겠어?”

“응.”

제시는 컨디션이 좋은지 다섯 곡을 쉬지 않고 연달아 불렀다.

노래를 듣는 수철의 표정은 갈수록 밝아졌다.

제시는 기대했던 거보다 훨씬 더 노래를 잘 소화하고 있었다.

‘더 연습이 필요할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대로 최종 파일을 만들어도 될 거 같았다.

제시의 소리는 예전보다 더 탄탄하고 깊이가 있었다. 라이브를 많이 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수철은 처음 계획보다 보컬의 레벨을 좀 더 올려잡았다. 제시가 혼자서 이만큼 만들어 왔으니 조금 더 끌어올려 보자는 생각에서다.

“노래 더 할 수 있겠어?”

“응, 해 볼게.”

“그럼 두 번째 불렀던 곡 한 번 더 불러 봐 줘.”

“오케이!”

수철은 가장 인상적으로 들었던 노래부터 다시 한번 들었다.

이 곡은 수철이 예상했던 것보다 제시에게 훨씬 더 잘 맞았다. 이보다 완벽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목도 순서도 없지만, 사람들이 제일 좋아할 거 같았다. 타이틀이 될 거 같았다.

‘이 곡은 바로 녹음을 받아 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음악이 주인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들었어. 나와서 커피 한 잔 마시자.”

“네, 선생님.”

제시는 장난스레 대답하고는 헤드폰을 벗고 밖으로 나왔다.

* * *

스튜디오 한편의 응접실에 제시가 앉자 수철은 커피를 타서 내밀었다. 제시는 커피를 밀어놓고 따스한 물로 목부터 축였다. 목 관리를 하는 것이다. 수철은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연습을 많이 했나 봐? 시간이 없다고 하더니.”

수철이 곡을 다 익혀서 왔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제시는 연습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불안해했다. 에이전시에서 잡은 스케줄이 빡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말했잖아, 이 음악에 중독됐다고. 연습을 안 할 수가 없지!”

제시는 손바닥을 들더니 장난스레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음악에 이끌려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하하. 그래 알았어.”

수철은 제시의 짓궂은 장난을 보며 크게 웃었다. 그러나 얼굴을 내밀었다.

“느낌 좋은데 바로 녹음해 버릴까?”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뭐?”

그 말에 제시가 눈을 크게 떴다.

이내 표정을 바꾸며 입에 손을 대고 웃었다.

“호호! 수철, 넌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그렇게 강철 체력으로 보여? 난 가녀린 여자라고. 호호.”

평소 털털하고 보이시한 제시가 갑자기 여자 웃음소리를 냈다. 여자에게 무슨 그런 무례한 말을 하냐며 살짝 흘겨봤다.

수철도 알고 있다. 아무리 체력이 좋고 성대가 튼튼해도 바로 다섯 곡을 녹음하기에는 무리다. 하지만 오늘 제시의 컨디션이 최고고, 아까 들은 노래들이 기억에 남아서 한 소리다.

수철은 평소답지 않게 숙녀처럼 웃는 제시에게 장난을 걸었다.

“알아, 네가 여자라는 거. 강철 여자.”

“뭐?”

“하하, 농담이야. 소리가 너무 잘 나와서 해 본 말이야. 너 같으면 욕심나지 않겠어?”“걱정 마, 내일은 더 잘할 테니까.”

제시는 녹음을 많이 해 본 선수답게 노련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엉뚱한 얘기를 꺼내놨다.

“있잖아, 저번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다가 갑자기 이번 앨범에 있는 곡을 부르고 싶다는 충동이 확 드는 거야.”

“뭐?”

제시는 ABYSS 앨범으로 참여한 공연 중에 이번 앨범의 곡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했다. 아직 녹음도 끝나지 않은 음악을.

수철은 놀란 눈을 뜨고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ABYSS와 Intersection의 작곡자가 같은 사람이니까 슬쩍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반응도 볼 겸해서 말이야. 히히.”

수철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영준이 형이랑 멤버들에게 음악을 들려준 거야?”

수철이 의심의 눈초리를 날렸다.

영국 멤버들에겐 음악이 완성되고 노래가 다 끝나면 들려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오라는 영국은 안 오고, 호주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게 미안한 구석도 있었다.

제시는 수철의 물음에 반발했다.

“들려주지 말라면서?”

눈을 크게 뜨고는 말을 이었다.

“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충동이 들었다는 거야. 자꾸 연습하다 보니까 음악이 완전 다른데도 묘하게 교집합이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말을 하다가 씨익 웃었다.

“이런, 교집합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어 버렸네. 요즘 무슨 말 할 때마다 계속 교집합, 교집합 한다니까? 하하.”

“하하.”

“어제는 매니저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매니저를 힐끗 쳐다보고는 나지막이 얘기를 이었다.

“방송 스케줄 중에 교집합이 있는 것은 한 번에 다 모아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어. 나누는 건 방송국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고. 하하.”

“하하!”

* * *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은 따로 장소를 정하지 않고 녹음실에서 진행했다. 이번엔 MR(반주)을 틀어 놓고 바로 노래를 녹음해서 모니터링하며 의견을 나눴다. 문제점을 짚으며 바로 교정을 했다. 잘 잡히지 않는 부분은 수철이 피아노로 반주하며 확실히 잡았다.

제시는 이미 곡을 다 익히고 있어서 분위기 전환과 힘을 실어야 할 부분을 빼고는 문제가 없었다. 같이 앨범을 한 경험이 있기에 소통이 수월하고 빨랐다. 첫날은 그렇게 체크만 했다.

“내일 봐.”

제시는 연습이 끝나고 매니저와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 한가하게 해변에 앉아서 맥주를 기울이는 옛날의 제시는 없었다. 인기 여가수의 스케줄이 그랬다.

* * *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보컬 녹음이 시작됐다.

“컨디션 어때?”

“좋아.”

“바로 시작해 볼까?”

“오케이!”

제시는 어제보다 컨디션이 더 좋았다. 그래서 녹음을 시작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막상 녹음이 진행되니 수철은 어제와 분위기가 달랐다.

“너, 디렉팅이 지난번 앨범과 많이 달라.”

제시는 수철이 지난 ABYSS 앨범과는 디렉팅이 다르다고 투덜댔다. 수철이 너무 예민하게 소리를 잡는다는 뜻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음악이 다르니까.”

수철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디렉팅이 다른 건 사실이었다. 더 섬세하게 소리를 잡았고, 전체적인 퀄리티를 끌어올렸다.

덕분에 제시는 지난 앨범보다 두 배 이상의 에너지를 쏟았다. 평소 긴장하지 않는 제시가 긴장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수철, 잠시 쉬었다 하자.”

먼저 쉬자는 말을 하지 않는 제시가 쉬자고 했다. 에너지를 많이 썼다는 얘기다.

소파에 앉아서 따스한 물을 마시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제시가 입을 열었다.

“넌 음악이 달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렇지 않아, 확실히 이번 앨범에 쓰는 에너지가 달라.”

“어떻게?”

“디테일을 더 챙긴다고 할까? 아니면 공을 더 들인다고 할까?”

“…….”

“특별히 애착이 가는 곡이 많아서 그런 건가?”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야, 오히려 기준치를 많이 낮췄어.”

그 말에 제시가 황당한 얼굴로 몸을 세웠다.

“뭐? 날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힘들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켰다. 활기차게 녹음을 시작할 때와는 달리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수철에게 그런 자신을 보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물었다.

수철은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네가 그렇게 느끼는 건 지난번과 설정이 다르기 때문이야.”

“설정?”

“지난번은 ECM에서 제안할 때부터 연주곡에 가사를 붙여 보컬 음악을 만들겠다는 거였잖아? 그래서 난 같이 공연한 친구들과 추억으로 남기는 앨범 정도로 생각하고 프로듀싱을 한 거야. 특별히 디렉팅까진 생각하지 않았어.”

제시는 한국에서 녹음할 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봤다. 수철의 얘기가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이 말을 이었다.

“같이 편곡하고 같이 연주한 거잖아. 내가 특별히 디렉팅할 필요가 없었지. 하지만 이번은 다르잖아. 제안도 내가 했고, 처음부터 색깔도 내가 잡았어. 물론 너랑 상의는 했지만.”

“…….”

제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이번 앨범을 장르 파괴라고 하겠지만 난 제한을 두지 않은 거야. 장르에 상관없이 관심 있으면 아무나 들으라고. 대신 음악이 좀 낯설 수 있으니까 듣는 문턱을 낮추려는 거야. 보컬의 노래를 통해 진입 장벽을 낮추려는 거지. 그래서 네가 그렇게 느끼는 거야.”

“…….”

제시는 이제야 수철의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수철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이 정도는 과한 게 아니야. 그리고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안 돼, 넌 그 이상을 할 수 있어. 난 그걸 알기에 이렇게 디렉팅 하는 거고.”

수철은 음악이 평범하지 않은 만큼 보컬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경 썼다. 덕분에 제시가 그만큼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수철은 제시의 능력이 이 정도에 버거워할 정도가 아니라 생각했다. 충분히 이 이상도 가능하다 생각했다. 그러니까 시도하는 것이다.

게다가 음악이 제시에게 잘 맞는다. 처음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소리를 끌어내야 한다. 그게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의 몫이다. 녹음은 한 번이면 끝난다. 한번 앨범이 나오면 그 음악은 영원히 고정되어 돌아다닌다. 되돌릴 수 없다.

“알았어. 다시 힘을 내볼게.”

수철의 말을 들은 제시는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면서 걱정스레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다고 너무 몰아세우지는 말고.”

“알았어.”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끄덕였다.

아무리 제시가 경험이 많고, 보이스 색깔의 폭이 넓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수철은 과하게 끌어올릴 생각은 없다. 제시의 역량 안에서 가장 좋은 소리만 걷어 낼 생각이다.

그것이 이번 앨범을 디렉팅 하는 방향이자 본질이다.

“아까보다 소리가 많이 안착이 되네?”“응, 나도 느끼고 있어.”

위험한 고비가 넘어가자 녹음은 빠르게 진행됐다.

“수철, 한 번 더 해 볼게. 지금 느낌이 좋아.”

오히려 이번엔 제시가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제시가 욕심내지 않은 곡을 제외하고는 두세 번의 녹음으로 끝이 났다.

수철은 새삼 제시가 그동안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스 안에서 열심히 노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보다 힘이 더 붙어서 소리의 굴곡이 심하지 않았고, 수철이 강하게 디렉팅을 한 탓인지 갈수록 소리가 점점 안정되어 갔다. 덕분에 녹음은 예상한 시간보다 빠르게 마무리됐다.

“밥 한 끼는 먹고 헤어져야지.”

수철은 녹음이 끝난 후 근처 레스토랑에서 제시와 식사했다. 제시는 그간 영국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긴 시간을 가질 순 없었다. 제시는 가야 할 곳이 있었고, 스케줄이 끝나면 멜번에 가족들을 만나러 갔다가 곧바로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잔 못 해서 아쉽네.”

“다음에 하지 뭐.”

“그럼 다음에 한잔하고 바로 맨리 비치로 달려갈까?”

“…….”

제시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장난을 걸어왔다. 수철은 대꾸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시는 피식 웃었다.

“겁먹긴.”

“뭐? 내가? 왜?”

수철도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결국 제시는 그렇게 노래 부르던 알코올은 다음에 영국에서 하기로 하고 돌아섰다.

누드 비치에서 수영하는 것도 다음으로 미루겠다고 했다.

대신 귓속말로 수철이 준비되면 언제든지 달려오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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