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재규어와 함께한 3개월
수철은 다음날 바로 믹싱을 진행했다.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소개한 곳에 가서 마스터링도 마무리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스터링 스튜디오는 맨리 스튜디오와 또 달랐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스피커들이 너무 많아서 스피커 박물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철은 처음 보는 스피커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관심을 멈췄다. 서로 다른 스피커가 너무 많아서 나중에 책자를 찾아봐야 할 거 같았다.
“이 버전은 느낌이 어떠세요?”
마스터링을 진행하는 엔지니어들의 모습은 녹음 스튜디오와는 확연히 달랐다. 마치 실험실의 학자 같았다.
들어 보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다시 조절하고.
“생각하신 것에 근접하고 있나요?”
“네.”
“그럼 이번엔 이렇게 한번 바꿔 볼게요. 어떠세요?”
메인 엔지니어와 옆에 앉아 있는 몇몇의 모습을 보면 마치 의사 그룹 같았다. 전문의를 따라다니며 모습을 관찰하는 수련의 같았다.
결국, 선택은 마지막에 수철이 했다.
“두 번째 들었던 버전이 저는 제일 좋았어요. 다른 음악들도 모두 거기에 맞춰 주셨으면 좋겠어요.”“네, 같은 생각입니다. 좋은 선택을 하셨어요.”
엔지니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따라서 끄덕였다.
재미난 경험이었다.
“잠시나마 같이 작품에 참여하게 돼서 즐거웠습니다.”
“네, 저도요.”
그들은 매너까지 최고였다.
마스터링의 결과물은 그들이 공들인 만큼 좋게 나왔다. 다음에도 이곳에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수철은 앨범을 마무리 짓고 나니 해방된 기분이었다. 상쾌했다. 오랫동안 미뤘던 숙제를 마무리한 기분이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번 앨범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 앨범에 관해 얘기를 꺼내 놓고 완성하기까지 그랬다. 이런 방식의 작업은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 앨범이 늦어진 이유가 어떻든 간에.
수철은 마스터링이 끝난 다섯 곡의 완성물을 박 대표에게 보냈다. 박 대표는 각각의 제휴 업체에게 음원을 보내고, ECM에도 보내서 앞으로 일정을 상의할 것이다. 금별은 제시의 버전을 들어 보고 대중들의 반응을 모니터하며 한국어 버전을 구체화할 것이다. 어쨌든 이제 공은 넘어갔다. 남은 일은 회사가 할 일이다. 수철은 이제 자유다.
아아함.
보내기 버튼을 클릭하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니면 녹음에, 믹싱에, 마스터링으로 며칠 동안 소리에 시달린 탓인지 하품이 멈추지 않았다.
수철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잠에 빠져들었다.
째깍째깍.
수철이 잠든 사이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서서히 기울어졌다. 어느새 노을의 붉은빛이 창문으로 들어와서 잠들어 있는 수철을 비췄다. 그리고 얼마 후 어두워지더니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별들은 오랜 시간 반짝이다가 서서히 빛을 발하며 사라져 갔다.
으으윽.
그제야 수철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몇 시간을 잔 거지?’
수철이 눈을 떴을 땐 새벽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얼추 15시간은 잔 거 같았다.
으으윽!
수철은 다시 기지개를 거하게 켠 후 발코니에 서서 태양이 떠오르는 바다를 바라봤다. 그러다 옷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이른 아침 바다는 정적이면서도 활기찬, 평소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바다도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파도를 밀어 보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해변가를 걷는 수철은 멍했다. 불과 며칠 전과 달리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모든 걸 쏟아낸 탓이다. 이제 한동안은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없다. 갑자기 자유로움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왔다.
수철은 낮은 파도에 발을 적시며 긴 해안을 오랫동안 산책했다.
그리고 일찍이 문을 연 카페를 찾아갔다.
“Excuse me, Can i have a…….”
수철이 블랙퍼스트 메뉴를 주문하자 얼그레이 밀크티에 계란 스크램블, 베이컨, 소시지, 신선한 야채, 그리고 몇 조각의 토스트가 나왔다.
수철은 이른 아침 식사를 즐기며 바닷가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여유롭게 바라봤다.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그때.
“……!”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앨범을 마무리하고 나서 하려고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수철은 급하게 밀크티를 들이켜고 토스트를 입에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cuse me!”
웨이터를 불러 서둘러 계산하고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Go to the used car market please!”
* * *
‘와, 이게 다 차야?”
시드니의 중고차 마켓은 색다른 느낌이었다. 드넓은 야외 주차장에 차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땅이 넓어서 그런지 비행기 활주로처럼 거대했다. 다 돌아다니기가 힘들 정도로 거대했다. 하지만 차를 선택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차를 찜하면 바로 직원이 달려왔다.
‘그래, 너다.’
중고차 마켓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철의 눈에 들어오는 차가 있었다. 한눈에 확 띄었다. 그 차는 오랫동안 수철을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었다.
‘재규어!’
은색 재규어 한 마리가 보닛(bonnet) 위에 딴딴하게 붙어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가 달릴 자세로 우뚝 솟아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잘 지내 보자.’
수철은 진지한 표정의 재규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차가 마음에 드세요?”
“네.”
수철이 흐뭇한 얼굴로 차를 보며 서 있는데, 직원이 다가왔다. 수철은 직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다시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첫인상이 좋으셨나 봐요?”
“네?”
“사람과 마찬가지로 차도 첫인상이 중요하잖아요.”“아, 네.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수철은 직원의 물음대로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차가 늘씬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쫙 빠졌다고 해야 하나.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햇살에 비쳐서 반짝이는 모습이 어서 자기를 선택해서 같이 달리자고 외치는 거 같았다.
수철은 자세를 뽐내며 서 있는 차를 다시 한번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짜식, 우리 지금 네 얘기 하는 거야!’
속으로 씨익 웃었다.
‘저건 뭐지?’
차를 선택하고 서류를 작성하는데, 그 옆에 딴딴해 보이는 검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차에는 야생마 한 마리가 정면에 붙어서 달리고 있었다.
‘기다려, 넌 다음에 타 줄게.’
수철은 야생마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이제 다 된 건가요?”“네, 즐거운 여행 하세요.”
수철은 즉석에서 돈을 지불하고, 보닛에 붙어 있는 재규어의 뒷모습을 보며 부웅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온 수철은 배낭에 짐을 챙기고 앤디에게 전화를 했다.
“앤디, 저 한동안 집을 비울 거예요.”―드디어 가시는군요.
앤디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대꾸했다.
―집은 걱정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기억에 남을 여행 되시길 바라요.
* * *
부웅―!
수철은 지도 한 장을 펼쳐 놓고 북쪽으로 내달렸다.
초보라도 부담 없이 달렸다.
차도 없고, 길도 넓었다.
시원하게 뻗은 길 위로 재규어가 내달리자 등 뒤로 붉은 태양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 * *
“여기가 말로만 듣던 골드코스트군.”
1번 국도를 따라 며칠 달리다 보니 퀸즐랜드주의 골드코스트가 나타났다. 해변이 있는 관광 휴양도시답게 관광객들이 바닷가를 오고 갔다.
수철은 오랜만에 많은 사람을 볼 수가 있었다.
‘멋있다.’
바닷가 모래사장과 끝없이 이어진 해안의 크기는 시드니와는 차원이 달랐다. 크고 화려했던 본다이 비치가 작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해수욕장에는 보드를 옆에 끼고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서퍼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높은 파도를 기대하며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가 골드코스트면 이제 곧 브리즈번이 나타나겠네?”
수철은 보닛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우뚝 솟아 있는 재규어에게 말했다.
“어때? 다시 달려볼까?”
수철은 그렇게
브리즈번.
케언스.
퍼스.
애들레이드.
멜번.
그리고 다시 시드니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 내달렸다.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은 다시 시드니로 돌아오는 데 3개월이 걸렸다. 수철은 그 시간 동안 호주 곳곳의 도시를 누볐다.
“Thank You, I very enjoyed the your music.
낮에는 거리의 버스킹을 구경하고 밤에는 클럽에서 갖가지 장르의 공연을 관람했다. 가끔은 그들과 어울리며 음악에 얽힌 그들의 에피소드를 들었다.
“Cheers!”
펍에서 로컬 뮤지션과 어울리며 맥주를 마시고, 즉흥적으로 같이 어울려 연주를 하기도 했다. 재즈, 블루스, 락, 전통악기와의 잼(jam)까지. 가리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그들과 함께 즐겼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들이 다양한 악기로 연주한다는 점이었다. 드럼에 쓰레기통 뚜껑을 올려놓고 두드리는 드러머도 있었고, 이상한 뿔피리 같은 것은 들고 나와서 즉흥적으로 잼을 하는 뮤지션도 있었다. 온몸에 갖가지 조개껍질로 치장한 한 아티스트는 소라로 만든 악기를 들고나와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짝짝짝.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고 리스팩했다. 모두가 뮤지션이고 모두가 아티스트였다.
수철은 여행하며 호주 유명 뮤지션들의 순회공연도 봤고, 유럽과 미국에서 온 뮤지션들의 투어 공연도 구경했다. 호주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뮤지션과 관객이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음악의 나라였다.
수철은 여행하면서 다양한 뮤지션들을 만났고, 이들에게서 새로운 에너지도 받았다. 음악을 잘하건 못하건 간에 이들은 모두 자유로웠다. 음악은 이들이 뮤지션으로서 누리는 가장 아름다운 축복이었다.
이렇게 몇 달이 훌쩍 지나갔다.
브리즈번, 케언스 그리고 삥 돌아서 퍼스.
이 구간은 캠핑카로 바꿔 탈까 하는 유혹이 있었다. 도시 사이의 거리도 멀었고, 여행보다는 탐험이 어울리는 곳들이 많았다.
‘그래도 의리가 있지.’
재규어와 함께 먼지를 일으키며 계속 나아갔다. 애들레이드를 거쳐 멜번까지.
그 사이에 이어진 해안도로는 예술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신의 창조물에 감탄했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의 장관이었다.
수철은 노을이 지고 어둠이 몰려올 때까지 한참을 절벽 끝에 서 있었다.
* * *
긴 여행을 마치고 다시 시드니에 들어섰다. 편안한 마음으로 본다이 비치로 향했다. 얼마 살지 않은 집이지만 그동안 많이 그리웠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날씨가 쌀쌀해져 있었다. 바닷가에도 사람들이 많이 줄어서 한적했다. 한창 더울 때 떠났는데, 어느덧 가을이 되어 있었다.
수철은 짐을 내려놓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몇 개월간 쌓인 여독을 풀기 시작했다.
으으윽.
한참을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수철의 얼굴은 많이 그을렸지만, 밝고 건강해 보였다. 여전히 미소는 부드러웠고, 하얀 이는 더 하얗게 빛났다.
수철은 며칠 여독을 푼 후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정리해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 * *
“마크, 나야.”
―하하, 수철. 돌아온 거야?
“응.”
―여행은 어땠어?
“좋았어, 무척.”
―넌 정말 부러운 뮤지션이야. 모두가 꿈꾸는 삶을 살고 있잖아?
마크는 수철이 돌아왔다는 반가움에 괜한 오버를 했다.
“여행 한번 한 건데 뭘.”
수철은 멋쩍게 대꾸했다.
마크는 목소리를 키웠다.
―여행을 말하는 게 아니야. 뚝딱 앨범 한 장하고, 훌쩍 떠났다가 컴백하는 게 멋있다는 거지. 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산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온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한다. 그게 정말.
“마크.”
마크의 말이 길어지자 수철이 끊었다.
―어, 말해.
마크는 멈칫하다 대답했다.
수철은 전화한 용건을 말했다.
“지난번에 봤던 그 기타리스트 있잖아.”―기타리스트 누구?
“그때 싱가폴 사람이라고 했던.”―이언?
“그래, 이언.”
―그 사람 왜?
“내가 한번 만나 볼 수 있을까?”